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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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세기 사학사'라는 제목보다 외려 부제-'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가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단순히 지난 시대의 사학사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공세 속에서 '역사학은 끝났는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지난 시대의 역사학을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랑케로 인해 하나의 전문 분과로서 출현한 고전적 역사학은 그 특유의 형이상학적 가정과 관념성, 정치위주의 서술, 그리고 무엇보다 랑케 스스로 '실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역사가도 그 자신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판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고전적 역사학의 위기는 당시 각광받던 사회과학에 의해 '구제'된다. 이러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은 독일의 사회경제학파와 미국의 신사학파에 의해 조악하게나마 그 모습을 보이다가 프랑스의 아날학파, 마르크스주의 사학파, 독일의 역사적 사회과학 학파에 의해 만개하지만 이는 60년대 말 크나큰 도전을 받게된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야만과 이어진 베트남전의 부조리, 관료제의 모순은 계몽의 기획 자체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아울러 서구 중심, 근대적 합리주의 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사고의 부당함과 야만성이 재조명되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이전의 역사서술 방식 전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분석과 이야기가 동일하며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구성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고찰에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역사학은 애초 그 대상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대해 어찌되었건 역사가들은 사실과 관련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정직한 학문과 선전, 선동을 구분하지 못한 '목욕물 버리느라 애까지 버린'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지난시대의 역사학의 단선적 구성방식이나 협소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역사학의 범위를 더 넓혀 더 풍요롭고 더 다원적인 역사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신문화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굉장히 호의적인 입장을 내비치는데, 이는 저자가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 어떻건간에 결과적으로는 역사학의 틀안에서 역사학을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보고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사실 따지고보면 포스트모던의 근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근본주의적'이고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데에서 랑케의 고전적 역사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근간이 된 문학이론이나 랑케의 역사학이 애초 상아탑 속의 고답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실재를 보지 못한 점도 없지 않기에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계몽이 그 이상적인 측면만큼이나 야만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인간이 하는 사유인 이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단적으로 '홀로코스트'마저 부인하고야 마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제기는 모더니즘보다 얼마나 덜 야만적인지 묻고싶다) 어찌보면 포스트모던은 인류(엄밀히 말하자면 '서구문명')의 숱한 실패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지적 유희는 아니었을까? 반성과 고찰을 넘어서 계몽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책임과 무능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계몽의 단죄를 넘어 계몽을 부정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역사학이야말로 철학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몇안되는 학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사학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현 시점에서 역사학을 복원하고 있는 저자의 시도는 매우 소중하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이 '60년대 말의 사회적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사유된 서구에 비해 '90년대 사상의 공백기에 수동적으로 수용되어-그 급진적인 언술에도 불구하고-보수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색체마저 띠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저자의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는 다시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사학을 다루고 있다는 본서는 '21세기'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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