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 역사의 종말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7
스튜어트 심 지음, 조현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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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이 북스에서 나오는 아이콘 시리즈는 적어도 제목만 놓고 봤을 때 독특한 구석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푸코와 이반이론',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뭐 이런걸 보면 호기심도 일지만 한편으론 그 적은 분량에 난해한 사상가의 사회적 논란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다 수록하나 싶은 걱정도 든다.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도 제목만 보면 흥미로우면서도 역시나 한편으로는 위와같은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사상에 관한 입문서보다는 살짝 수준이 높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책이라고 보기에는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부족한점이 많다고 할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데리다 사상 사례풀이(?)'정도로 생각이 되었는데, 실제로도 저자는 본서의 주제를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로 정한 이유에 대해 '종말론 논쟁에 대한 데리다의 공헌은 문화적으로 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해체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그 길은 대중의 평판과는 달리 해체를 훨씬 덜 난해한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보이게끔 해줄것이다.'라고 언급하여 그러한 목적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사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은 데리다의 유명한 신조어(?)인 '차연'개념만 생각해봐도 이미 까일(?)준비를 하고 있는 개념처럼 보이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책은 비단 후쿠야마의 '종말론'뿐만 아니라 일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종말론'도 비판하고 있다.(곰곰히 생각해보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실질적으론 그들이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는 해겔의 역사개념과 그 궤를 거의 같이 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싶다) 암튼 본서를 통해 하여간 데리다에 관해 개인적으로 정리가 안되고 있던 수많은 부분들-이를테면 '메시아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것-이 은근슬쩍(?) 정리되었던 터라 꽤나 만족감을 느꼈다.

저자는 해체론도 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정치적 논쟁이나 윤리학적 측면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해체론 그 자체로부터 도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역사의종말'학파(?)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소개했다는데, 확실히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이러한 논의들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 개인적인 감상을 논한다면, 데리다는 '해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활용했을 따름이지 정치적 기반이나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는 데리다 본인 스스로는 밝히지 않았을지라도 해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확고한 기반(?)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사실 애초 알튀세르등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구가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맑스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그의 행위 자체가 굉장히 사려깊은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행위였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자가 보여주려던 해체의 적극적 측면 대신, 개인적으로는 해체가 부당한 도덕적 우월성을 파괴하는 데에 굉장한 '방법론적'유용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해체가 가치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데리다처럼-그것이 분명하진 않더라도-해체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확고한 기반에 의지하여야 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보게 되었다. 데리다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모호한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후회하진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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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시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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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주인공 '지기 예프젠'이 이 소년원 특유의 교화방침에 따른 독일어 작문시간에 작문주제 '의무의 기쁨'에 대해 '쓸것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쓰지 못해 독방에 가둬져 작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의무의 기쁨에 대해 쓰지 못한 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너무도 모순되고 복잡했던 기억 때문인데, 그 기억이란 바로 경찰인 그의 아버지 '옌스'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주인공을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화가 '막스 난젠'를 감시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인 옌스는 사회적으로는 특별히 하자가 없는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충직하게 의무를 지키는 것을 심지어 낙으로 삼을 정도로, 어쨌건 국가의 기준에서는 그 누구도 따를자 없이 선량(?)한 사람이고 준법정신 또한 철저한 사람이다. 한편 그의 동향친구이자 어린시절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막스는 유연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다. 다소 고집불통이라는 점은 둘다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고집불통의 근거로 삼는 규범은 각자 다르다. 옌스는 실정법, 그리고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자신의 규범으로 삼지만, 막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의, 혹은 자유라는 개념을 자신의 행동 준칙으로 삼고 있다.

문제는 막스에게 '창작금지령'이 내려지고, 이를 옌스가 감독해야만하는 의무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옌스는 이러한 감독의무를 너무도 '충실하게' 이행하며 막스는 이에대해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한다.(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창작하는 막스의 전략?이야말로 이 저항의 백미였다) 철저한 준법의식의 소유자이자, 의무를 지키는 것만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옌스는 서서히 그 의무에 지배되어 심지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남은 그림을 소각하고, 막스의 작품 중 자신의 딸이 모델로 된 그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녀를 꾸짖으며, 전쟁 중 탈영했던 전과가 있는(참고로 그는 그 탈영한 아들이 포탄에 맞아 집으로 돌아오자 상부에 신고하여 체포시킨다) 아들과 의절한다.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의무와 막스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던 영특했던 소년 지기는 의무에 '미쳐버린' 아버지로 인해 결국 그림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강박관념으로 또한 '미쳐버리고'결국 막스의 그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간다.(참고로 막스 그림의 절도사건을 쫒는 의무 또한 아버지 '옌스'에게 맡겨져 있었음이 소설에 암시된다) 이처럼 자신이 감옥에 들어오기까지의 일화들을 지기는 독방에 가둬져 관둬도 좋다는 원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써내며(이로써 그는 '의무의 기쁨'을 느낀다. 이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결국엔 가석방되지만 그의 앞에 놓여진 것은 유년시절과 전혀 다를바 없는 부조리한 세상이다.(지기는 간수 요스비히의 축하인사에 이렇게 답한다. '새로운 생활이요?..(중략)..그런건 없어요. 우리가 먹으려는 국에는 이미 어떤 놈인가가 침을 뱉어 놓거든요)

사적인 됨됨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하며, 냉정하기보다는 우유부단한, 따뜻하며 다소 어리버리한 것처럼 보이기까지하는 옌스. 딸 말마따나 '자상한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던' 옌스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사악한'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로부터의 강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글쎄. 외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존감, 그리고 그에 기반한 자신의 윤리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는 수많은 잔인한 행동들을 그 말마따나 '마지못해' 하면서 언제나 변명한다. 이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 속에 자신의 판단이나 자신의 자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한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남(즉, 국가나 법등등)에게 맡겼고, '경찰관'이라는 지위를 통해 얻게 된 권력의 지나친 향유는 그를 결국 의무의 노예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은 '올바르지 못한 세상'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러한 나쁜 세상의 권유와 강요를 선택한 '올바르지 못한 개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코 용서될 수 없으며, 이는 오늘의 수많은 '옌스'들에게도 마찬가지일 듯 싶다.(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그 '옌스'들이 대부분은 자신의 사악함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다는 점에서, 아울러 우리 또한 그 '옌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가슴을 정말이지 답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에 대한 비난만으로도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세상과 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기는 부조리는 '올바른 개인'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를 만듦으로서 그 해결이 모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인공의 유년시절의 부조리한 현실이 그의 현재시점의 부조리함과 기묘하게 엮여져, 독자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하는 의문을 지속적으로 품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극히 착하고 계몽적인 요스비히나 너무도 온유한 힘펠 원장이 과연 옛 시절의 옌스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렇게 '착한'그들이 과연 올바른가? 착한것이 올바른것이 아니라면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어떠해야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을 소설은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배경으로보나, 서술자의 회상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는걸로 보나, 아울러 서술자가 감금상태라는 것으로보나 본 소설은 여러가지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 떠올려지는데, 개인적으로는 본소설이 '더' 재밌었고 '덜' 난해했다는 느낌이다. 번역도 무난하다. 하여간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인듯.

ps.본 소설의 화가 '막스 난젠'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를 그 모델로 한 것이라고. (근데 그게 누구...??ㅋ-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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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스튜어트 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5
제임스 프록터 지음, 손유경 옮김 / 앨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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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에서 나온 'Critical Thinkers'시리즈는 영국 루틀리지 출판사의 동명의 시리즈를 번역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이후 두번째 읽은(완독은 처음)책인데, 개인적으로는 특정 인물에 대해 특별히 추천된 소개서가 없는 경우 이 시리즈를 선택하신다면 후회는 안하시리라 보장한다. 그만큼 책은 구성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쉬우면서도 알차다. 지금까지 제젝, 사이드, 스피박, 바르트, 그리고 지금 리뷰를 올릴 홀까지 다섯권이 나왔고, 들뢰즈의 경우 태학사에서 별개로 번역되어 있으며(이 또한 들뢰즈 개론서로서 굉장히 호평을 받는 것으로 알고있다.) 앞으로 데리다, 하이데거, 보드리야르, 리쾨르, 폴 드만, 프레드릭 제임슨 등등등 기라성같으면서도(?) 만만한 개론서를 찾기 힘든 사상가들의 소개서가 나온다는데 개인적으로는 기대 만빵이다.

스튜어트 홀은 표지에 소개된대로 '이렇다 할 저서 한권 없는 이 시대의 대표적 문화이론가'이다. 사실 그가 이렇다할 저서 한권이 없는 것은 그의 전략이기도 한데 그는 권위나 상식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스스로 권위가 되기를 거부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공동작업'으로 수행하였으며, 또한 그는 영구적 단행본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변화되는 상황에 변화되는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잠정적 논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그 '수많은 홀'하나하나가 모두 오늘 우리의 문제에 굉장히 많은 시사점과 상상력의 단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절합'하고,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볼로시노프의 다액센트 개념을 융합하여 문화와 언어를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투쟁의 장으로 보아 지속적인 실천적 함의를 지닌 이론들을 만들어낸 그의 면모였다. 물론 오늘날 그에 대해 '문화적 포퓰리즘'의 혐의가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는 그 자체로 비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문화건 언어건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울러 미디어를 단순히 발신하고 수신하는 것이 아닌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발신자의 메시지가 다 발신자의 의도대로 수신되는 것은 아님을, 결국 수신자에게도-발신자만큼 크지는 않지만-다악센트성을 지닌 언어를 가공할 여지가 있음을 밝혀낸 그의 이론 또한 관심이 갔다. 대처리즘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도 꽤나 흥미로웠는데, 왜 노동계급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보수정당에 몰표를 줄까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도움이 될만한 해결책의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처럼 몇 개의 노랫말만 배우고 음악은 잊어버리면 안되겠지만.

사실 다양한 국면마다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던, 즉 오늘의 실천과 문제해결을 위해 핵심적 입장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던 홀을 한권의 책으로 쓴다는게 쉬운일은 아닐게다. 그럼에도 저자는 묘한 줄타기(?)를 통해 그 홀의 수많은 모습들과 그 속에서 묘한 일관성 아닌 일관성(적어도 일관된 이론이 변화하는 정치에 비현실적일 따름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그의 무지개처럼 수가지의 경쾌한 연구'방법'론 만큼에는 일관성이 있는것 아닐까?)을 부여하여 저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 정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어찌보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울러 홀이 원채 이런저런 입장들을 많이 취해 온 터라(?^^)문화이론의 입문서로도 적당할 듯 싶다. 하여간에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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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법치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6
정태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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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사회에 법치만큼이나 '순수하다고 전제되어' 사용되는 단어가 있을까? 순수함이 지나쳐서 씨니컬하게 들릴 정도인 '법대로 해.'는 비단 사인 상호간의 분쟁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외려 '법대로 해'는 우리사회 정치의 장에서 '법치'라는 담론에 의해 모든 정파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정파들은 서로 그 '법치'를 외치며 다시 '싸운다'는 것이다.

왜일까? 저자는 아마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정치와 법치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라고. 맞는 소리다. 사실 입법을 주 임무로 하고 있는 의회와 각 정당이 법치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법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 아닌가? 결국 정치가 법을 만들고 그들이 만든 법에 의해 정치는 규제된다. 즉, 법치는 복잡한 정치가 귀찮아졌을 때 한번씩 꺼내보는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라는 거다. 법치는 정치가 바로설 때 가능한 것이지, 그 자체로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와 법치는 상호보완적인 것, 아니 외려 정치가 법치에 우선하는 것(법치는 어쨌거나 정치에 의해 구성되기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내용없이 법치를 부르짖었던 판사출신의 정치인-지금은 은퇴한-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법실증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는 정치와 법치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법치에 대한 정치의 우선성 즉, 정치에 의해 법치가 구성되는 측면을 잘 포착해낸 칼 슈미트와 존 롤스의 견해를 비교하며, 단순히 실존적 권력만을 중시하여 정치과잉(?)에 빠진 슈미트의 함정을 피해 정치에 있어서도 관용과 공공성이라는 '내용'에 천착한 롤스의 견해를 통해 우리의 정치와 법치가 바로서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소 의아했던 것은 롤스가 정치적 기본권을 경제적 기본권에 비해 더욱 중시했다는 이야기인데, 경제적 기본권과 괴리된 정치적 기본권이 과연 그 제대로된 역할을 해 낼 수 있겠느냐에 대해 적지않은 의문이 들었다. 자유주의 정치학자의 한계인가? 롤스가 그 정도 생각을 안했을리는 만무하고, 결국 내가 공부를 좀더 해봐야 하겠다는 이야기.-_-;;;;;

책의 내용이 갖고 있는 시의적절성과 문제의식은 책이 쓰여진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이지만, 우리의 현실에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법실증주의 비판하랴, 슈미트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랴, 현실정치 비판하랴 등등 너무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다가 다소 서술체계가 무너진 듯한 단점이 엿보인다. 아울러 다소 흥분해서 서술한 부분도 보이는데 저자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뭘?ㅋ) 조금 힘을 빼고 서술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내용없는 법치가 횡행하며 일종의 '폭력'이 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사회에서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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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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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말에서 00년 초로 기억한다. 붉은색 배경 속에 그야말로 '꽃미남'이라는 말 외엔 설명할 수 없는 한 인물이 대학가를 휩쓸던(?)시절말이다(따져보믄 고작 4년전 일인데, 무지 예전 일처럼 쓴것같아 좀 민망하다.^^)그 인물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흔히들 줄여 체 게바라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인물이다.

서구의 60년대를 수놓았던 체게바라의 깃발이 그의 사망 30주기라는 시기적인 이유와 RATM이라는 걸출한 밴드로 인해 우리의 2000년대를 장식하던 그 시절, 대학 초년생을 지냈던 우리들의 책꽂이엔 시쳇말로 '운동권이건 비권이건' 마치 교과서인양 그의 평전이 꽂혀 있었다. IMF와 모집단위 광역화로 인해 학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개인주의화, 파편화,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는 선배들의 걱정이 한창이던 그 때, 낭만적인 혁명 이야기가 주 내용을 이루고있는 그의 평전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는건 꽤나 역설적으로 보여진다. 허기사, 자신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나 사진집이 상업적으로 엄청 성공한걸 체게바라가 봤다믄 뭐라고 했을지, 진부한 의문이긴 하지만, 정말 궁금한것만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친구 하나가 이 책이 출간되기 적어도 3년전(?)부터 자신의 필명을 죄다 'Che'로 써놓는 바람에 유행보단 조금 일찍 그를 접하긴(-_-;;) 했지만, 책을 읽고 나자 그를 일컬어 '금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했다던 사르트르의 말이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한 천식에 굴하지 않고 갖가지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의사, 불굴의 혁명가, 경제관료, 외교관, 그리고 다시 혁명가로.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투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나아가는 성품,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와 남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외모까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됨됨이와 삶의 자세, 이상에 대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노력하는 너무나 모범적인 그의 인생이 이 평전의 '재미'를 감소시키는 하나의 요소인 것만은 분명해 보이며, 덕분에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참 재미없게 봤던걸로 기억한다. 더군다나 그의 인생이 우리와 지구 정반대편에 존재하는 미지의 지역인 남미와 연관되어 있다보니 제반지식의 결여는 물론이거니와 모른다고 해서 특별히 관심가는 부분이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이-_-;;;; 때문에 글쎄, 모르겠다. 정말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던 후배 하나는 이 책을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으로 꼽던데, 난 읽으면서도 정말 아니다 싶었던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작가인 장 코르미에의 매우 프랑스틱한 서술(왜, 다소 오바(?)하고 종교적으로 성스런 단어를 종종 사용하는 그런 거-_-;;)또한 자꾸 머릿속에서 충돌하는데 꽤나 제어하기 힘들었음이다.

외려 내가 주목하는건 이 책의 문학적인 면, 혹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아닌 출판사(史)적(?)인 의의다. 실천문학사의 평전시리즈 10번째였던 이 책은 출판사마저 놀라 뒤집어질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 책의 성공은 이후 우리나라 출판계의 새로운 조류, 즉 평전문학의 르네상스라 부를만큼 평전이 우후죽순 격으로 출판되는 세태를 낳기에 이르렀다. 갠적으론 이러한 평전문학의 르네상스적 상황이 그리 오래 갈 것이라 예상치는 않았지만, 지금도 면면히 그 유행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러한 평전문학(?)의 르네상스(?)라는 조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편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평전이라는 것들이 그 인물이 직접적으로 하고자 했던 말들인 1차 문헌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 자체를 직, 간접적으로 제한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 첫번째 이유요. 권위를 가진 작가의 주관이 인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됨에 따라, 독자가 그 인물을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제한하게 만든다는 점이 그 두번째 이유다. 사견이지만, 적어도 카프카나 맑스는 자신의 평전보다 그들의 저서가 읽혀지기를 더 바랄 것이라는 것, 오노 요코는 자신의 미술품들이 감상되어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의 인생이 읽혀지는것보다 더 선호할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평전'이라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혹은 잘못 알려진 인물을 재조명하고 새로운 논의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는 장점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 세태는 무언가 거꾸로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다. 체게바라 평전 서평쓴답시고 갑자기 평전문학의 과도한 열기(?)를 비판하는 글이 되어부렸군. 하여간 우째꺼나 함 읽어볼만한 책이긴 한 것 같다만, 아주 꼭 읽어봐야 한다고 추천하긴 갠적으로도 좀 글타. 아니 머 내가 이 책 별로라고 한다해도 새내기라믄 예의상 호기심에 다 한권씩은 사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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