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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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씨의 첫번째 단편집. 처음 읽었을 때에는 솔직히 모든 소설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감이 오진 않았지만 묘한 슬픔과 그 속에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었다. 텍스트를 진정 이해했다고 말하기 위해선 두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신(?이게 어디 나만의 소신일까?ㅋ)에 따라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며 깊은 몽상(??-_-;;;)에 빠져들어 본 후, 그때서야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박민규씨가 이 단편선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것은 바로 '꿈'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의 달콤하고 따뜻했던, 하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던 꿈. 너무도 순진했던 그 시절이었기에 품을수 있었던,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바로 그 꿈 말이다. 대왕오징어의 기습도 그렇고, 지구가 알고보면 거대한 개복치라는 이야기도 그렇고, 실종된 아버지가 기린으로나마 부활한 모습도 그렇고. 학생 건강 생각해서 무료로(세상에~!!)야쿠르트를 내주는 야쿠르트 아줌마나, 팍팍한 삶을 떠나 오리배를 타고 가족과 함께 '유목'하며 사는 오리배 사장님 이야기, 역겨운 일상 속에서 괴로워하는 샐러리맨의 때를 밀어주는 너구리는 또 어떤가? 모두 우리가 다른 형태로, 하지만 같은 생각으로 품었던 몽상들 아니던가?

그리고 박민규씨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소박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그 무엇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소중했던 독자들의 그러한 '꿈'들을 소설에서나마 이루어준다. 아마도 내가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따뜻함이란 거기서 기인한 것일 듯 싶고, 소설들을 읽으며 느꼈던 슬픔 또한 그것이 오로지 '소설 속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느꼈던 슬픔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본서에서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인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마지막, 즉 우리의 몽상이 끝나는 그 부분에서 박민규씨가 남긴 시(?)는 나의 그러한 감상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 시는 그 따뜻함 때문에 한동안 내 미니홈피 프로필로 쓰였다는.^^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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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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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서평을 쓰다가, 이 책'이야말로' 추천해보고 싶어서 한번 써본다.

대학 1~2학년 시절, 소위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던 분들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분은 김규항씨라고 종종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내 생각에, 강준만씨와 진중권씨는 다소 공격적으로 보였고, 유시민씨는 조금 무서웠으며(-_-;;;)고종석씨와 홍세화씨는 글 속에 다소 '쓸쓸함'이 묻어나와 조금씩 꺼려졌었는데(그래도 그 분들 모두 좋아하긴 했었다) 김규항씨는, 글쎄. 그런 느낌보다는 그냥 위선을 굉장히 싫어하는 분, 때문에 '믿을만한 분'정도로(그렇다고 다른 분들을 믿지 못했다는 얘긴 아니다)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의 단행본을 읽은 것은 위에 나열한 '비판적 지식인'의 책들을 한권이상 읽은 후 2003년 여름쯤에서나 가능했다. 재생용지에 소박한 디자인은 너무도 '그 다웠고', 때문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도서관에서 졸릴 때마다 틈틈히 보리라 생각했지만, 책을 잡고 한두시간만에 다 읽어버리면서 굉장히 아쉬워했던 기억도 난다.

흥미로운건, 시간에 따라 바뀌는 그의 글들의 뉘앙스(?)였다. 사실, 김규항씨 본인또한 서문에서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만, 그가 초기에 썼던 글들은 굉장히 냉소적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냉소적이기'만'한 글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은 점점 따뜻하고 희망적이 되어지며,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알고 있던 김규항씨가 등장(?)하더라. 아, 그때의 묘한 기쁨(?)이란.

위선을 싫어하지만 도처에 위선이 깔려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좌파로 사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이지만, 그런 그마저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엇인가 희망을 보았고, 때문에 그의 글들도 시간이 감에 따라 금씩 밝아졌었던 게 아닐까? 세상은 알고보면, 수많은 절망만큼이나 수많은 희망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의 날카로운 문장, 날카로운 비판들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진보적 지식인이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은근슬쩍 보게 된 것 같아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나온 '나는 왜 불온한가'보다 이 책이 더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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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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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씨가 낸 두번째 책이다. 사실, 그간 그의 블로그를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 든 터. 대부분은 이미 읽었던 글이었지만, 다시보니 의미가 더 새로웠다. 이런저런 글들의 감상을 하나하나 적다보면 이 책 서평 하나 쓰느라 날밤 샐 것이 뻔해보이고, 특별히 인상에 남았던 두 가지만 언급해 보련다.

먼저 첫번째는 김규항씨의 '예수이야기'였다. 아니 웬 예수? 개인적으로는 신자가 아닌터라(물론, 나이롱 천주교 신자이긴 하다. 나름 본명도 있다는-_-v), 김규항씨의 블로그에 가끔씩 예수이야기가 올라와도 안읽고 넘겼고, 책을 읽으면서도 처음엔 넘어갔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너무 빨리 읽어버린 아쉬움에 빼먹고 넘어간 예수이야기를 하나, 둘 읽다보니 내가 그간 알아 온 '예수'는 '예수'가 아닌 '교회의 예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아니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 싶다.(그래, 부자가 천당가는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류의 예수님 말씀을 내가 애초에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잊었을 뿐)

두번째는 책 말미에 실린 '일기 모음(?)'이다. 이 부분은 외려 그의 엔간한 칼럼들보다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활이 그의 신념과-아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다르지 않더라는, 그의 생활 속에 그의 신념이 오롯이 녹아있었다는 '충격'때문이었다. 신념과 생활의 괴리를 이젠 완전히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 입장에선, 그의 '일기'를 읽으며 굉장히 부끄러울 수밖에. 게다가 그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언급하기도 한다. '내 글을 제 얼마간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슬렸고...'이거 완전 내 얘기 아닌가.

다시금 반성하며 글을 마친다. 개인적으로 정말 '빨리읽기 아까웠던 책'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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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도입과 전개과정
김수행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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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에서의 좌파는 완전히 말살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맑스 또한 학계에서 금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초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체제를 보편화시키려는 자의적이고 몰역사적인 가정하에 서 있다는 난점이 있었던 주류경제학은 경제사와 농업경제학 분야를 커버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경제학의 '일부'분야에서 맑스주의는 1950년대에도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흐름이 7,80년대 변혁의 흐름속에 다른 경제학 분야로 전이되어 하나의 '맑스주의 경제학'이라는 흐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상아탑 뿐만 아닌, 현실정치에서도 빛을 보게 되어 지난 2004 대선에는 '좌파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책은 이러한 한국에서의 맑스주의 경제학의 역사를 짧지만 압축적으로 잘 서술해내고 있다. 학문적 토론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가 거의 허용되지 않다보니 현장과 학계가 연계하여 토론하고 학습하기가 거의 불가능 했다는 점, 맑스의 원전 및 관련서적 입수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다분히 교조적인 북한 혹은 소련의 교과서로 학습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7~80년대 맑스주의 경제학의 한계였다는 것, 사회구성체논쟁에 있어서 주요 학설들에 대한 비판들 등등이 볼만 했고, 무엇보다 특히 요즘 '뉴라이트'와 연계로 뜬금없이 '뜨고있는'(?) 안병직교수(아울러 그의 제자인 이영훈교수)의 경제사 연구가 애초부터 맑스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는 지적에 관심도 갔고, 공감도 했다.

물론 분량이 너무 적다는 것,(총 110페이지지만, 영문 요약, 각주등등 빼면 70페이지가 약간 넘는다) 서울대의 맑스주의 경제학 연구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것,('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거니깐'이라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다만-_-;;;)그리고 '경제학'의 범주에 한정지어 맑스주의의 도입과 전개를 서술했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그래도 이러한 연구의 '시작'이었고, 책으로 출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겠다라는 생각은 든다.

ps.이 책의 후편격(?)으로 '한국의 좌파경제학자들'이라는 책도 출간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셔도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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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
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 책갈피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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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아마, 저자인 몰리뉴 교수는 이렇게 답하고 싶으셨나보다. '그것은 바로 트로츠키주의이다.'

저자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느냐 않느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보느냐. 그리하여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도록 하느냐,'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저자는 흔히들 마르크스주의의 한 지류로 꼽히는 카우츠키주의나 스탈린주의, 그리고 제3세계 민족주의를 '알고보면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것'으로 논증해낸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의 분석과 비판에 대해 토를 달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상당부분 동감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하는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카우츠키주의건 스탈린주의건 제3세계 민족주의건 애초 취지는 자본에 대한 저항과 변혁이었고, 어찌되었건 조금이라도 더 진보적이고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미약한 사회경제적 토대나 지도자의 스타일, 혹은 체제 내재적 모순은 그러한 '주의'들을 막말로 '망'하게 만들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들의 실수 또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하에서 검토되고 비판되는 것, 그러한 성찰과 반성이야말로 조금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를 만들기 위한 생산적인 작업이 아닐까. 스탈린주의가, 일국사회주의가 알고보면 국가자본주의라는 저자의 지적에 당연히 동의하지만, 그러한 스탈린주의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는 이미 저자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는 사람으로 꼽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에 노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분석과 비판, 혹은 반성은 빼놓은 채 여러 다른 맑스주의계열의 사상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언술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일까. 그 어느 책보다도 짧은 내용 속에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알기쉽게, 잘 지적하고 비판해 낸 이 책은 나에게 99%만족을 줬지만, 저자의 작업이 썩 '생산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라는 1%의 실망감? 혹은 당혹감? 때문에 나에게 책을 읽은 후 만족감보다는 찜찜함의 기억을 더 오래 남겨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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