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잠깐동안 한학기 다니던 대학에서 본서를 읽고 리포트를 써낸 적이 있다. 물론, 당시의 나는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는 다시 치르게 될 입시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고,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 책에 대한 기억은 뙤약볕 속에서 총을 쏘는 뫼르소의 모습과 이방인을 '레뜩항제(?)'라고 하시던 교수님의 발음 뿐이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다시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 때 본 이방인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계속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시험때문에, 혹은 리포트 때문에 하는 독서는 오래 갈수도, 의미있을 수도 없다.

이 소설의 일반적인 감상이야,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순전히 내 개인적인 감상을 쓴다면 :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울지 않았다. 왜? 슬프지 않았으니까.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한다. 왜? 뙤약볕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쨌건, 외견상 나름 친절하고 나름 평범한 소시민이던 뫼르소는 이러한 살해사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뫼르소의 살인행위 자체와 그에 응분한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다. 타인들, 즉 사회가 관심 있는 것은 그저 뫼르소가 '착한놈이냐 나쁜놈이냐'하는 것이다. 법정에서 수많은 증인들-뫼르소도 이전에 만난적이 있는 사람인지 기억을 할똥말똥한-이 뫼르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것도 진짜 뫼르소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그냥 평범한 살인자(이거 말이 좀 이상하군)일 따름이고, 행위에 따른 책임만 지면 될 사람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아서' 장례식날 울지 않았던 그는 이 이유로 희대의 악마가 되고 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한마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타인을 자신의 기준에서 규정지으려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인간은 타인을 종종 괴물로 만든다.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타인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워할 구석만큼 좋아할 구석도 충분히 있음을, 우리 모두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는 것이 지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세상을 맞을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ps.카뮈는 스스로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고는 하지만, 본 작품만 놓고봤을 때 그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든다. 허기사, 실존주의자로 '규정'되는 것마저 꺼렸다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본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 작가에 불과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일약 스타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독일어권 국가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작품 중 하나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적잖게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본 작품은, 따지고보면 오케스트라에서 정말 중요한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드러나지 않고, 그 누구도 그 악기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를 소재로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서를 단순히 무명 작가였던 저자 자신의 자전적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외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결코 부유하진 않지만 어쨌건 먹고살만한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하지만 자신의 노력에 비하자면 하잘것 없는 보상속에서 그 누구로부터 주목받지 못한채 살아갈 '수밖에'없는 연주자. 결코 이루지 못할 신분상승을 바라고, 언제나 악기로부터 '소외'되어 수단으로 취급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그렇다고 확 뒤집어 엎을만큼 과감하지도 못하기에, 짜증은 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보수적인 관념에 충실하려는 오늘의 소시민이 삶을 사는 연주자. 이처럼 저자는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입을 빌어 오늘의 대중의 삶을 구구절절 잘 그려내고 있고, 때문에 본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보러 가서 콘트라베이스나 심벌즈 주자를 보며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안가져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재를 이용하여 이처럼 멋지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과 통찰력 덕분이 아닐까? 이제는 대중의 '피상적인' 관심에 피곤할 정도로 유명한 작가가 된 그이지만(이러한 그의 감상은 또다른 조그마한 소설인 '좀머씨 이야기'에서 표현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최고 작품으로 바로 이 '콘트라베이스'를 꼽고싶다. 본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대중(혹은 소시민)의 삶을 담아,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이야기'해 줌으로써 보듬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따뜻하며, 개인적으로도 각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 참으로 드물게도, 책을 구입해 놓고는 '내가 이책을 어떤 이유로 샀나'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나로써는 이 책이 그랬다. 내가 '근대와 탈근대'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것도 아니고, 민족이나 섹슈얼리티는 물론이거니와 병리학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산 책은 딱딱한 주제에 비해 굉장히 재미있었으며, 이 책을 통해 고미숙씨, 나아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꽤나 큰 의의를 갖는 책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적 통념-민족이라는 신화와 남녀 역할에 관한 통념, 그리고 병과 위생에 대한 관념-들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하여 그 도입과정의 왜곡됨과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의 근대는, 서양의 근대와는 달리 국가적 위기 상황의 타계책으로 들여왔다는 점, 그것을 들여온 식자층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깊게 스며있었다는 점, 아울러 어떠한 역사적 단계와 물적 토대에 의한 필요성이 아닌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전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서구의 근대보다 더욱 그 근대적 주체의 성립과정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모순적이었고, 때문에 그 병폐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직선적인 기차와 광대한 웹을 비교하며 탈근대적 주체로서의 그 대안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대안을 주장하기 위해 근대적 주체의 계보학적 고찰을 하는 부분(특히 병리학 부분)을 읽다보면, 탈근대적 주체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래서 탈근대적 주체담론이 새로운 보수주의로 전화하는 위험성 또한 띄고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생기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계보학적으로 서술한 우리의 근대적 주체의 성립과정상의 모순과 그러한 단선적 사고로 인하여 비롯된 야만을 생각해보면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공감도 가면서도 논쟁의 여지도 있기에 즐거운 책이었다. 뿐만아니라 고미숙씨의 즐거운 문체는 이 책을 더욱 밝게 빛나게 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3
구춘권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울리히 벡은 지구화를 '가장 많이 사용되고 조작되며, 그리고 가장 정의하기 어려우며 오해하기 쉽고, 깊은 안개 속에 싸여 있지만, 그러나 정치적으로 가장 효력이 큰 단어'라고 이야기 했단다. 울리히 벡 씩이나 되는 사람도 지구화를 이렇게 '모호하게' 정의할 수밖에 없는 정도이니 지구화라는게 참 쉽지않은 문제긴 한가보다.

본서에서 저자가 정의하는 지구화란 거칠게 정의하면 경제적 지구화(?)이다. 물론 이러한 지구화 과정도 각각의 분과마다 균등하게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상 전지구적으로 균등하게 관철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누구나 어느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 지구화에 대한 성실한 개념정의를 한 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오늘날과 같은 방식의' 지구화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조절이론(?)에 입각한 듯 보이는 설명은 저자의 시원스러운 문체와 압축적이면서도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은 내용 덕택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포드주의적 선순환구조가 무너지면서 등장한 포스트포드주의적 축적양식(물론 이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양식-신자유주의라고 이야기되는-이 어떤 확실한 이론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포드주의적 순환구조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복고주의적 성향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수도)와중에 금융자본은 산업자본과 분리되어 통화주의자는 득세하고 금융시장은 폭발적으로 팽창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 중에 드러난 모순과 야만에 대해 서술하며 이후 대안으로 '대안적 지구화'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대안적 지구화가 이루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책의 발간 이후의 상황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침략전쟁만 봐도, 선진국과 후진국 간 뿐만 아닌 선진국 안에서 마저도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경향을 봐도, 다원성보다는 일원화되는 세계 문화의 경향만 봐도, 갈수록 오염되는 우리의 환경만 봐도, 대안적 지구화의 길이란 무척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어쩌랴? 결국 중요한건 이성으로 아무리 비관되더라도 끊임없이 의지로 낙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한 것 아닐지?

비슷한 이런류(?)의 서적중에 이만큼 간명하고 시원시원하게 오늘의 지구화를 설명해 놓은 책도 흔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화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오늘을 고민하시는 분이라면, 입문서로 제격이라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삼국지 1 - 난세의 영웅
박종화 지음 / 대현출판사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S대 수석합격자는 그 합격 비결로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엉뚱하게'삼국지'를 꼽았으며, 아이가 어느정도 컸다고 판단되면 엔간한 가정에서 의례적으로 사주는 것이 바로 삼국지 전질이다. 너도나도 삼국지를 권하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그 좋은 동양고전 다 내팽개치고 처세, 협잡, 권모술수가 판치는 본서를 꼭 권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은 제처두자. 이미 그 부분은 너무도 많이 지적되어 온 것이니깐. 그냥 나는 내 개인적인 '삼국지'에 관한 추억을 써보고 싶다.

내가 본 삼국지는 이문열씨의 것도, 혹은 최근에 나왔다던 황석영씨의 것도 아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한자공부는 따로 안하더라도 한자와 '친숙해지기라도'바라시던, 그리고 '삼국지같은 책은 옛 작가가 쓴걸로 봐야 제맛이 난다'는 다소 독특한(?) 지론을 갖고 계시던 아버지께선 한사코 한시 원문이 수록된 옛 삼국지 판본을 고집하셨고, 때문에 초등학교5학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더웠던 그 해 여름, 아버지와 난 청계천 고서점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다녔었다. 하지만, 수시간을 찾아헤매여도 아버지께서 염두에 두신만큼 옛스러운, 한자가 빽빽한 삼국지는 찾기 힘들었고, 그나마 한시가 원문으로 수록된 유일한 삼국지가 박종화씨가 편역한 삼국지였다. 박종화씨의 삼국지(그의 호를 따서 '월탄삼국지'라고 불리웠다)는 당시 '어문각'이라는 출판사에서 6권짜리 양장본으로 나와있었고, 이것이 내가 수도없이 읽었고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삼국지'되겠다.

이 삼국지에는 다른 삼국지와 다른 몇가지 장점이 있는데, 가나다 순으로 배열되어 그 인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진 인물사전, 삼국지에서 실화인 부분과 가상으로 꾸며진 부분에 관한 설명, 삼국지의 주인공들 자손에 의해 이어지는 '후삼국지'에 대한 간략한 개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삼국지 동호회'같은 곳을 보면, 아직도 절판된 '박종화 삼국지'를 찾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런걸 보면 그 때 아버지와 함께 땀 뻘뻘 흘리면서 찾아다니던게 헛 고생은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