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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그들은 어떻게 부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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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중-

 

유대인들은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웠다.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열세 살에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선 '모세오경', 즉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중 한 편을 반드시 모두 암기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자기가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 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 162-163

 

 

당시 로마제국 내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며,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는데,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간주돼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위정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유대교의 또다른 한 분파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12

 

 

만일 그들이 나라없이 유랑할 때 <토라>와 동족이 겪었던 학살과 마사다의 의미를 망각했더라면 분명 지금의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속담에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대인은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 또한 없다고 믿는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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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8-27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기억'이 유대인의 핵심이라고 봐요. '기억'을 간직하고 전승하면서 핏줄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identity를 전승한거죠. 실제로 지금 '유대인'이라고 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을 떠난 셈족이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북유럽인가 동유럽 어디의 왕국이 개종하고 유대인이 되었는데, 그들이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밀려난 '기억'을 갖고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는 거죠. 사실 '이디시'도 유대인의 고유언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구요.

Alicia 2014-08-28 09:08   좋아요 0 | URL
저는 역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유대인들의 저력이 저 '기억'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죠. 괴로우니까요.. 그런데 일정한 정주의 공간없이도 기억에 의지해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해요.
전에 하버드대생들이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법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KBS에서 제작한 적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한국인 입양아였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규정짓는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네요. 분명히 배타적이예요, 그런데 한국의 순혈주의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14-08-29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혈주의는 피가 섞이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함께 지내도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은 문화와 종교를 망라한 '기억'을 공유하면서 생기는 것 같아요. 실제로 많지는 않지만 중국-유대인, 한국-유대인 이런 개념이 있더라구요. 결국 인종이 사라져도 '유대인'이라는 '기억'을 공유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한, '유대인'은 사라지지 않겠죠.
 
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77
이디스 워튼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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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밤, 이디스 워튼을 생각한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는 얼핏 보면 세 남녀를 둘러싼 애정의 삼각관계와 뉴욕 상류사회의 취향과 도덕과 위선을 그린 것 같지만, 나는 이 책이 거짓, 그리고 규칙(관습)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했다. 많게든 적게든 사람은 사회 안에서 자기의 social gifts를 자아 내어야 하고 그것이 주는 피로감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내면에 또 얼마나 많은공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생각했다. 그가 알아서 내 마음을 짚어주길 바라지만 만일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와 함께 갈 수는 없을거라고.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평생 남도 나도 속이면서 사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뉴랜드 아처는 인간애와 지성을 갖춘 남자다. 그런데 그 지성은 엘렌에 대한 사랑 앞에서 아무런 쓸모없이 무너져 내린다. 사랑 앞에서 바보가 되는 일은 여자들한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꼭 남자들이 머리 나쁜 동물이라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를 파멸상태로 몰고 가지 않았으니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는 지혜로웠다)

[순수의 시대]는 거짓과 규칙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투명을 강요하는 사회가 저신뢰 사회이듯, 규범을 강요하는 사회는 순수한 사회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디스 워튼이 말하는 순수는 규범에 의존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상태-무지-의 냉소적 표현인 것만 같다.

그런데 무언의 온갖 규칙이 숨통을 조여오는 닫힌 사회 안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관용은 존재한다는 것, 규범과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절대권력인 규범 또한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다는 희망 또한 이디스 워튼이 말하고자 했던 바였던 것 같다.

작품속의 사랑은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 사랑이 기품을 잃지 않음으로써 작품 또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별로 주워 가질만 한 문장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곁에 두고 읽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아, 이 문장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아, 좋은 대화. 세상에 그것만 한 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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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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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을 외치는 세상에서 신의로써 다져진 만남을 읽는 일은 향긋했습니다. 신뢰는 신뢰로 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닐런지요. 저자의 노고가 묻어나는 글을 읽는 일은 언제나 보람있고, 어릴 적 다산초당의 기억과 남도의 정취를 떠올리는 일도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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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6-05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좋은 제자를 만나는 것도 모두 서로에게 너무 중요한 일인데, 요즘에는 어려운 듯 합니다. 인생에서 단 한분만이라도 진정한 스승을 만나는 건 큰 복이 아닌가 싶어요.

Alicia 2014-06-05 16: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공감해요. 정민 선생은 요즘은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고 말하는데, 저는 역으로도 선생은 있고 스승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나이들어서 좋은 영향을 주는 스승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새삼 깨닫는데, 눈을 뜨니 없네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꼭 학교에서 만나야 스승과 제자인가요. 살면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때가 또 오겠죠. 그러려면 먼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는게 인간관계 이기는 하지만... ^^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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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 에티카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비참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해지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피곤하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려는 결의다. -121,124쪽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134쪽

애인과 친구의 가치를 알려면, 사실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 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에 진짜 애인인지 가짜 애인인지, 혹은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당신의 행복을 함께 행복해하고 당신의 불행을 함께 불행해하는 사람이어야만이 여러분은 자신에게 애인이나 친구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당신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당신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에 뿌듯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6쪽

무엇인가 욕망하는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 보아야만 한다. 실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나의 것이었는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법대에 간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입학하자마자 "이제 시작이다, 멋지게 살아가야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반면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었다면 "이제 완성이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188쪽

카페나 술집에 들릴 힘이 있을 때, 충분히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 갈 수 있을 때, 동경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한마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별다른 불편이 없는 사람이 과거를 동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절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과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절정에 다를 수 있다. -198쪽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 잡으려고 할 것이다. (중략)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도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218쪽

감사 또는 사은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에티카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삭힐 수 있다. 아니, 삭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272쪽

말을 걸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삶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헤어지면 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욕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한다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라 단지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 -338쪽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조심하라! 법 없이 살 사람을 조심하라! 결국 우리가 가까이 해도 되는 유일한 인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니, 적과 동지가 명확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된다면, 이런 사람과는 주저하지 말고 사랑에 빠져도 된다. -376쪽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처럼 거대한 착각이 어딨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어디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394쪽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408쪽

"난 너를 믿어." 이 말을 들었을 때 지혜로운 사람만이 상대방의 깊은 의심을 읽어낼 수 있다.(중략)

확신과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의 슬로건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닌 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 여부를 확신하거나 의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면, 그것을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 혹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해 확신을 갖거나 의심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심과 확신에 갇힌 사람이라면 이제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도록 하자. 그러면 아마도 너무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38쪽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영원히 확신과 의심 사이를 방황하는 길 잃은 영혼으로 남게 될 것이다. -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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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구판절판


대개의 어리석음은 어떤 종류의 '반복'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그 성격이 형식적이다. 형식을 이루지 못하는 실수는 반복되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현명함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 자체로 형식을 이루지 않도록 민활하게 애쓸 일이다. -25쪽

호의는 바로 그 호의의 천국 속에서 사적 규칙을 만든다. 호의지상주의자인 선량한 이들은 사적 규칙에 의해서 선의의 천국, 신뢰의 관념론을 건설한다. 그러나 신뢰는 타자들 사이의 심연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기 때문에, 사적 규칙은 실질적으로 별무소용이다. 오히려, 개인의 호의 속에서 번창하는 사적 규칙들은 신뢰라는 공공의 건축에 적지 않은 장애를 제공한다. -26쪽

어쩌면 호의와 호감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가는 생각 밖으로 극히 중요하다. 호의가 만든 천국의 수만큼, 우리는 바로 그같은 종류의 호의가 만든 그만큼 많은 지옥의 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31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종의 '배치'인데, 말하자면 호의와 호감을 인간관계의 어느 곳에 배치하는가, 그리고, 배치한 후에 어떤 식으로 그것을 모른 체 하는가, 하는 문제다. 신뢰와 호감이 각각 제 나름의 가치를 발하려면, 호감은 신뢰를 이드거니 통과하는 통시의 과정이 필요하고, 신뢰는 호감을 재구성하는 변화된 공시의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다. -46쪽

내 애인의 사랑에 토대가 없다는 사실, 그 사랑의 텍스트가 우연과 비약의 결과라는 사실은 때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픈일이다. 그래서 연정은 흔히 환상 속에서의 흔들림(물매)과 그 흔들림의 관성적 자가동력으로 근근이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호의나 그리움에 토대가 없다는 진실은 전래의 통념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수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63쪽

선의나 호의도 우리 삶의 잡박한 흐름 속의 일부일 뿐이며, 계몽과 성숙을 통해서 그 나름의 변증법적 변용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로써, 선의나 호의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들이 시공간속의 일관된 실천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건강하게 펼쳐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69쪽

호의라는 사적 규칙과 신뢰라는 사회적 약속이 서로 겹치거나 어긋나는 문제를 다룰 때에, 관련 당사자들의 사회적 관계에 원천적으로 개입하는 권력의 무게나 물매는 흔히 생략되거나 축소된다. 이른바 '마음의 환상적 전능성'속에서 빠르게 무책임하게 움직이는 호의는 특히 권력의 비대칭적 기반과 그 물매를 모른 체하곤 한다. 어쩌면, 종종 호의도, 고백(가라타니 고진)이나 웃음(바흐친)처럼 역시 기성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무화시키려는 또다른 종류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82쪽

교태는 광고의 광고와 같다. 자신을 광고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 새로운 광고의 소재로 등장하는 행위 속에서 교태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태는 광고처럼 비본질을 상대와 공유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94쪽

약속은 그 근본에서 일종의 도착이다. 그것은 '세속'이라는 어긋남, 그 불가능성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과거에 붙박힌 채, 미래를 선취하려는 과욕이기 때문이다. -116쪽

세속은 호의가 신뢰의 문 앞에서 자빠지는 꼴 속에서 그 화색을 드러냅니다. 호의를 향한 슬픔과 신뢰를 향한 아픔이 교차하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 사건이 총체적 무지 속에서 반복되는 조건/한계 속의 바로 그 사건의 밝은 아우라가 세속이지요.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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