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77
이디스 워튼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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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밤, 이디스 워튼을 생각한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는 얼핏 보면 세 남녀를 둘러싼 애정의 삼각관계와 뉴욕 상류사회의 취향과 도덕과 위선을 그린 것 같지만, 나는 이 책이 거짓, 그리고 규칙(관습)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했다. 많게든 적게든 사람은 사회 안에서 자기의 social gifts를 자아 내어야 하고 그것이 주는 피로감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내면에 또 얼마나 많은공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생각했다. 그가 알아서 내 마음을 짚어주길 바라지만 만일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와 함께 갈 수는 없을거라고.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평생 남도 나도 속이면서 사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뉴랜드 아처는 인간애와 지성을 갖춘 남자다. 그런데 그 지성은 엘렌에 대한 사랑 앞에서 아무런 쓸모없이 무너져 내린다. 사랑 앞에서 바보가 되는 일은 여자들한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꼭 남자들이 머리 나쁜 동물이라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를 파멸상태로 몰고 가지 않았으니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는 지혜로웠다)

[순수의 시대]는 거짓과 규칙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투명을 강요하는 사회가 저신뢰 사회이듯, 규범을 강요하는 사회는 순수한 사회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디스 워튼이 말하는 순수는 규범에 의존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상태-무지-의 냉소적 표현인 것만 같다.

그런데 무언의 온갖 규칙이 숨통을 조여오는 닫힌 사회 안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관용은 존재한다는 것, 규범과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절대권력인 규범 또한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다는 희망 또한 이디스 워튼이 말하고자 했던 바였던 것 같다.

작품속의 사랑은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 사랑이 기품을 잃지 않음으로써 작품 또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별로 주워 가질만 한 문장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곁에 두고 읽고 싶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아, 이 문장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아, 좋은 대화. 세상에 그것만 한 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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