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진동에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수시로 정지동작을 하고는 진동이 느껴지는지 신경을 초집중하고, 갑자기 뭔가 울렁이는 기분이 들면 생수병의 물이 찰랑거리는지 살펴본다. 내 몸에서 나는 약간의 근육경련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지난 7월 울산 앞바다 지진 때도 엄청 공포였는데 이번엔 연속으로 두 번 겪으니 정말 심장이 쪼그라들고 눈물까지 났다. 당일엔 잠도 안 올 것 같아서 새벽까지 내내 폰으로 계속 뉴스 검색하면서 불안해했는데 어느 새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그 때의 기분이 아직도 잘 잊혀지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고 잠시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았는데, 기분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묘했다. 거짓말처럼 돌아온 일상의 편안함.

 

그 날 저녁 7시 반쯤 첫 진동이 왔을 때 나는 방에서 막 운동을 하려고 사이클에 올라 페달을 몇 번 구르던 참이었다. 갑자기 양쪽 벽에 죽 늘어선 책장들이 한꺼번에 쓰러질 것처럼 마구마구 흔들렸고, 잠시 공포에 휩싸여 사이클에 엎드린 채 얼음이 되었다가 얼른 정신 차리고 사이클에서 내려왔다. 세상 편하게 코 골면서 자고 있는-_- 다롱이를 깨워 안아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진동이 멈췄다.

 

운동할 생각이 싹 사라져 뉴스 틀어놓고는 카톡도 안 돼서 문자하면서 또 계속 뉴스만 검색해서 봤다. 다시 진동이 오더라도 이거보다는 약하겠지 싶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두 번째는 완전 더 세게 와서 집 전체가 말 그대로 요동을 쳤다. 거의 패닉상태 비스무리하게 된 채로 당장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이 기우뚱하게 흔들리는 책장 하나만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책장이 넘어지면 다롱이가 깔려버릴 위치에 있었어서 아까처럼 데리고 나가야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겁에 질린 채 책장을 온 몸으로 받치고 있을 때도 다롱이는 여전히 고운 자태로 코골며 꿈나라... 어휴 그 모습 진짜. 저 눔 시키의 안위가 내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나의 본능임을 서글프게 깨달으며 진동이 멈추기만을 빌었다.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찍. 공포의 순간은 아무리 짧아도 길고 길었다.

 

이거보다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니 무섭고 불안하다. 양산단층이네 무슨 단층이네 하는 것들이 부산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영남에 다른 단층들도 많이 몰려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 단층밀집에다 원전밀집까지 아주 환상이네? 영도에는 땅이 갈라진 곳도 있다는데 마음을 완전히 놓고 살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 이러다 잊고, 지진이 오면 공포에 떨었다가, 또 잊고, 그렇게 살 게 될런지. 차라리 공포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을 일본이 부럽다. 익숙하다고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나마 전국이 거의 완벽하게 내진설계가 되어있으니 마음 놓고 익숙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번 7월 지진 때 책장 흔들리는 거 보고, 좋아라 산 책들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저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압사하기도 전에 책 모서리에 맞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아. 그래서 책을 줄이거나 책장을 낮은 걸로 바꿔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게 또 낮은 걸로 바꾸자니 각이 안 나오고 쉽지가 않아서 미루다가 또 지진이 왔다. 책장 바꾸는 게 힘들면 책장을 벽에 고정이라도 해놔야할 것 같다. 책 가득한 책장 막막 흔들리는 거 진짜 무서움 ㅜㅜ

 

자기 전에는 책장 칸칸이 앞쪽 공간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다 치우고, 유난히 심하게 흔들렸던 책장 앞을 사이클로 막아 놓고, 중요한 물건들을 대충 가방에 넣어 방문 옆에 두었다. 그러는 내가 참 웃겼지만 웃겨도 웃을 수 없는 상황 ㅜ 일본이 괜히 매사에 미니멀한 게 아니구나 싶고.

 

추석 때 보기 싫은 사람이 온다고 해서 혼자 조용히 보내려고 호텔을 예약해두었는데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설마 호텔이 무너질 리 있을까마는... 이미 세게 여러 번 터뜨렸고 여진도 300회-_- 넘게 발생하고 있다니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단층에 쌓였다는 응력인지 뭔지 에너지가 많이 해소된 상태일테니, 싶고, 집이나 호텔이나 지진 앞에서 다를 것도 없어 그냥 왔다. 어쨌거나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무지하게 컸으니까.

 

비상구부터 살펴봐야할 것 같아서(앞으로는 습관이 될 듯ㅡㅡ) 편의점 가면서 계단으로 내려가봤는데, 돌아와서 보니 호텔방 문에 붙은 대피도에 계단은 표시가 안 돼있고 완강기로 내려갈 수 있는 출구만 안내가 되어있었다. 계단을 이용해야할 때는 몰라서 우왕좌왕할 게 뻔하고, 계단 말고 완강기를 이용해야할 경우에도 복도에는 두 방향 모두 비상구표시등이 있어서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계단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홀로 추석

 

어제 추석 전날이라 식당이 문 닫은 데가 많아서 먹고 싶은 건 못 먹고, 떡볶이랑 충무김밥이랑 샌드위치 대충 사들고 들어와 샤워하고 에어컨 빵빵 틀어놓고 빈둥대다가 자고 일어나 오늘도 열심히 빈둥대고 빈둥대고 빈둥대고 있다. 곁에 누군가 있다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극강의 행복감이 있어서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연휴 내내 머리 텅 비우고 티비를 볼까 아님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책 없이 왔다.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있으려니 무섭게 진동하던 잔상이 남은 건지 어지러운 느낌도 들고, 그 탓인지 딱히 땡기는 책도 없고, 노트북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워서 책까지 싸오기도 싫고. 드라마나 하나 몰아서 볼까, 송재정이 W 대본을 풀었다던데 그것도 한 번 꼼꼼하게 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지금까지는 계속 티비 틀어놓고 그냥 뒹굴모드. 설레며 계획하는 시간은 늘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무한하게 느껴지는데 정작 실제로 하는 일은 별 게 없다. 사실 뭘 할지 생각하면서도 진짜 속마음은 별 거 없이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싶은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컴퓨터가 고장나서 AS를 맡기려다 그냥 노트북을 샀었다. 맥북을 사려다,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기계처럼 맥북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엄청 저렴하면서 사양도 괜찮은 엘지 노트북이 있었다. 두 개 중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엘지 노트북을 선택. 스펙 차이라고 해봐야 속도나 소음 문제일텐데 나는 좀 느려도(그래봐야 별 차이도 아닐) 아무 상관없고 저장용량은 엘지 쪽이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쓰기에는 훨씬 적당해보였다. 거의 영화를 보거나 쇼핑할 때만 쓰니까 모니터도 더 큰 게 좋고. 맥북이 참 예쁘고 매력터지긴 하지만 저 사과로고 하나를 위해 70만원을 더 지출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짓인가..를 생각하니 답은 쉽게 나왔다. 실제로 받아보니 더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만족하면서 잘 쓰고 있었는데

 

호텔에 갖고 오려니 모니터가 큰 게 정말 짜증이었다. 가지고 다닐 일도 별로 없고 그럴 일이 있어도 그럭저럭 들고 다닐 만할 것 같았는데 막상 노트북 가방에 넣으니 완전 짐덩어리 ㅜ 그냥 노트북만 가져가려고 해도 내 백에 넣기엔 너무 크고, 그래서 달랑 하나 있는 커다란 백팩을 찾아 꺼냈는데 이건 또 같이 두었던 까만 가죽가방에 이염이 돼서 카멜색 가죽이 얼룩덜룩해져있네... 아 스트레스...... 보기 싫은 사람을 피하는 것도 이렇게 스트레스라면 그냥 보는 것보다 나을 게 뭔가 했지만.

 

추석에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척들 없이 오롯하게 혼자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너무 좋다. 제사문화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고, 나의 부모, 부모의 부모,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의 부모를 1년에 몇 번쯤 생각하고 예를 갖추는 것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의무적으로 한 자리에 온 친척 일가가 모일 필요도, 또 굳이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릴 필요도 없이 어느 곳에서든 간소하게 애도/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충분한 거 아닌가 싶고, 지금처럼 제사를 위한 모든 노동을 특정인이 짊어지는 것도 몹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피똥을 싸는 일은 정말 좀 바보같다는 생각. 제사 안 지내서 조상이 노해 후손이 벌을 받는다면 명절 연휴 때마다 외국으로 여행떠나는 사람들 다 폭삭 망하것네... 먹지도 못 할 음식 안 바친다고 후손들 저주하는 심뽀의 조상이라면 대접할 이유가 없고.

 

하... 그나저나 시간이 흐르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정말 좋다 좋아. 영혼이 평화로움... 나이 먹을수록 조금이라도 번잡스러운 걸 더 못 참게 되고, 이런 고요함을 점점 더 절실히 원하게 되는 듯하다. 앞으로 명절 때마다 이렇게 혼자 나와 버릴까. 어차피 방콕에 의미를 두는 시간이므로 외국까지 갈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외국으로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고,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루종일 어제 사온 떡볶이와 샌드위치를 깨작대고 있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천국이다. 다음엔 먹을 거나 좀 충실하게 준비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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