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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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조선일보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실상 사고는 조선일보의 논조를 그대로 따르고 판단하는 자"들의 위험성, 그것은 바로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나의 사회적 의식이란, 그저 논술문제가 나오면 정치인과 공무원의 부패와 비리, 대기업의 횡포, 물질만능주의적 사고 등등과 같은 흔하고 막연한 어구들을 나열하여 답안지를 쓰는 정도에 불과한, 그러한 것들이 실제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긴 하나 스스로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는 추상적인 것일 뿐이었다. 답안지를 쓰고 나면 돌아서서 금세 잊어버릴 정도의.

나이 20대하고도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조금씩 시작하게된 나는 내 안에서 막연하게 자리 잡던 어떤 문제의식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면서도 논술답안지를 쓰던 그 어설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티조선에 동의하면서도 조선일보를 구독했고,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시끄럽고 불편한 건 사실이라는 생각을 했고, 친일파사전 모금운동에 참여하면서도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는 그들의 변명에 고개를 끄덕였고, 빈부격차의 심각성에 절감하면서도 사회보장제도의 문제점을 떠들어대는 언론에 이해'당'했다.

사고의 구심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급기야는 어떤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하는지조차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쪽으로 가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저 쪽으로 가고, 극과 극의 개념과 의미들 사이에서 그것이 극과 극인지도 모른 채 겉으로는 진보를 주장하는 얼치기로 살았다. 조선일보를 보는 안티조선의 모순된 위험성을 안고서 말이다.

이제 30대 초반으로 접어 든 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그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더군다나 옳은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을 스스로 느낀다는 것, 나아가 행동으로 실천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던가를 생각하면, 진보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와 시민단체들이 지겹도록 똑같은 소리만을 해오는 것이 이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그들이 그렇게도 한결같이 똑같은 소리를 하는 이유는 나같은 얼치기가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이며, 얼치기들이 변화하는데 나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임을... 내가 얼마나 멍청이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는 그 순간의 지독한 수치심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수치스러움 덕분에 또 한 편의 깊고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얼치기들이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그 변화들이 모여 비로소 세상을 진일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야말로 세상을 세상답게 지탱해줄 구심점임을 뼈아프게 실감한다.

얼치기가 너무 많다. 홍세화가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건 알아도 똘레랑스의 가치에는 무관심하고, 학벌없는사회의 대표로 나오는 홍세화의 말보다는 그의 학력에 주목한다. 박노자의 방대하고도 예리한 지식과 정확한 언어구사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 의미는 곱씹지 못한다. 진중권이 내뱉는 독설이 진짜 독설이 아님을 알지 못한 채 그의 비행조종일기가 담긴 소중한 공간으로 쳐들어가 개판을 친다. 심상정의 눈물겨운 정의는 부자들한테 돈이나 뜯어내려는 거지근성쯤으로 취급된다. 영화 [실미도]나 [화려한 휴가]를 보고 대한민국의 굴절된 현대사에 분개하면서도 그 분개가 영화감상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현대사는 계속해서 돈벌이 소재로 애용되고, 상업영화의 적절한 환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수록 역사로서의 역사는 점점 우리의 의식에서 사라져가게된다.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에서, 결국 현재의 우리에게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흐트러진 역사의식을 올곧게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일임을 새삼 느낀다. 한국인은 친미가 아니라 그 자체가 완전히 미국인이라고 꼬집는 박노자나 공화국의 소중한 의미가 더럽혀지는 데에 끊임없이 분개하고 그 참뜻을 설파하는 홍세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가하며 역사청산 작업을 통해 직접 겪은 경험들을 아프게 토로하는 한홍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1948년 대한민국의 왜곡된 탄생에 대한 한으로 다가온다.

역사청산은 부질없는 과거에의 집착이 아니다. 청산이라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 역시 역사는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데에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에 여전히 존재하며 아울러 미래를 존재케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청산의 의미는 단순한 과거 들추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의 정의를 무너뜨렸던 행위에 대한 단죄를 통해 다시는 그런 해악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부도덕, 비윤리, 비상식, 정의롭지 못했던 사고양식과 행동들이 여전히 현재에 반복되며 사회를 좀먹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취약해질대로 취약해진 역사의식을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만 사회의식, 시민의식이 올바르게 자라나 조금이라도 더 진보된 미래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 나라를 죽여 남의 나라를 배불리고 그 밑에 엎드려 부스러기나 주워먹는 삶,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핍된 자존감, 자아성찰의 부재가 우리 모두를 배부른 노예로 양산하고만 비극을 똑바로 보아야한다. 일본을 거쳐 미국을 상대로 고착화된 그들의 비굴한 습성,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 비열한 기회주의적 속성이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처럼 용인되어온 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친일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소송을 하는 괴상한 일이 일어나는 사회, 미국의 이익을 위해 먼저 나서서 자국민을 짓밟는 이런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의식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역사가 바로 서야 의식이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내려는 노력은 과거를 향한 보복따위가 아니라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명확히 규정짓고, 도장 꽝 찍고, 깨끗이 마무리 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미래를 향한 최소한의 희망인 것이다.

오래 전 홍세화의 말을 기억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 아니라 옷을 아주 뒤집어 입은 것이라던 한탄. 민족주의적 신념을 상실한 초대 대통령과 미군정의 이해관계 속에 친일관료들이 고스란히 자리를 채웠던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은 의미도 모르는 민주공화국 속에서 뒤집힌 채 반세기를 넘게 굴러왔다. 그 뒤집힌 틀 속에 정치과 경제가 어긋나게 맞물리고 교육, 문화, 종교, 언론의 모든 프레임이 거꾸로 형성된 채 뒤죽박죽 얽히면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공적 이성', '사회적 합의', 말 그대로 상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개인적인 이해득실만 득실거리고, 이해관계를 따져 쟁취해야할 개인의 권리는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착취당하고 내팽겨쳐지면서, 20%의 그들이 이 나라의 80을 넘어 90을 차지해오는 동안 80%의 우리는 20안에서도 서로를 줄이고, 끝내는 죽이고, 한없이 압사당해 10으로 찌그러들었다. 이런 사회, 스스로가 상위 20%, 10%, 1% 진입을 위한 가미가제가 될수록 나는 망가지고 그 진입장벽은 높아질 뿐, 내가 속한 80의 변화로 그들 20을 변화시킬 궁리를 하는 것이 내가 사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중요성을 끊임없이 설파해온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대표들이, 위로만 고개를 쳐들고 사는 데 정신이 팔린 우리를 다시 한 번 혹독하게 각성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대담집이다.

변해야 할 것은 결코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변하는 이 거꾸로된 사회에 조금이라도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 회의를 계속 생각하고, 느끼고, 또 생각해서 구심점을 찾아가야한다. 그 구심점을 찾아가는 데 이정표로 삼으면 좋은 지성들이 이 책속에서 따뜻하게 빛을 발하고 있고, 곁에서 손발을 쬐다보면 마음속까지 불꽃이 옮겨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 하나쯤이야”가 “나 하나라도”로 바뀌고, 그런 내가 모여 이 사람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세상이 비로소, 조금쯤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꽃.

박노자는 조금 더 차갑고 날카로워진 것 같다. 도대체가 아무리 지껄여봐야 알아먹질 않아 글 쓸 의욕이 없다고 할 땐 내 가슴도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날 선 비판을 서슴지않는 그에게서 배울 점은 역시 그 날카로움, 그가 한국인이 아니기에 가질 수 있는 냉정한 객관성이다.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이 사정 봐주고 저 사정 봐주다가 정작 본질을 놓쳐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인정사정 볼 이유가 없는 그는 칼을 댈 부분들을 가차없이 찌르고 그어버린다. 귀화한 그를 한국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그 외부적 시각, 얄짤없는 칼부림은 오히려 우리에겐 고마운 것이며, 그에게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자기합리화의 포근한 솜이불을 더욱 단호하게 걷어치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매우 원론적이고도 한민족의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는 차디찬 한마디가 가슴팍에 꽂힐 때 한편으로는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이유, 그 가차없는 비판만큼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또한 가차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뒤틀린 의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 그래서 요즘엔 교사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에 전력을 다한다는 그 열정이 새삼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가차없음의 미덕이랄까.

홍세화는 실제로도 아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하는데, 지승호 역시 그가 필요한 장소, 필요한 역할 이외에는 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지성인임을 칭송하고 있다. 어설픈 의식으로 살아오면서도 홍세화의 저작물만은 꾸준히 보아온 나 역시 그 변함없음에 한없는 존경을 느낀다. 그는 격정적인 칼럼을 쓰거나 열변을 토하며 강의를 하진 않지만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마주치는 그의 말은 내 안의 어떤 한 부분을 단번에 결정지어버리는 힘이 있는데, 진정한 권위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인터뷰 중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우리의 정치적 사고방식의 고질적인 병폐를 지적한 부분이다. 엄격한 논리가 있어야 할 곳에 황당한 유연성이 있고, 유연하게 대처해야할 곳에는 엄한 아집만이 버티고 있는 현실. A를 주장하면서 B의 논리를 끌어다 맞추고, B를 주장하면서 C의 논리를 갖다 붙이고, C를 주장하다 결국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며 마무리되는 한 편의 개그란 어제 오늘 보는 것이 아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존재하는 국회의원과 그 방계혈족들은 가끔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해주기도 하지만, 그런 건 제발 노땡큐인 거다. 사회적 공공에 대한 인식과 기반을 넓히고 그 토대 위에서, 좀 우기더라도 상식적으로 우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강할수록, “자기 생각과 주장에 따른 논거의 천박과 빈약”의 거대한 벽을 실감하곤 절망을 느끼고, 그런 국회를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국민이라는 자명한 사실에 더할 수 없는 자괴, 좌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홍세화 역시 교육문제를 주시한다.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린 어른들은 힘들더라도, 최소한 아이들의 생각이 옥토에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민주공화국을 물려주는 것이 현 기성세대의 절대적 책무이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인 것이다.

김규항의 존경스러움은 역시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대한 열정에 있다. 그도 어른들의 고착화된 의식을 바꾸는 것보다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해온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아이들은 바깥에서 뛰어 놀았는데, 민주화된 지금은 오히려 아이들이 감옥의 수인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비수처럼 가슴팍에 와 꽂힌다. 부모들의 무한이기주의 속에 압사당하는 아이들의 유년기, 청소년기가 애처롭고, 자신이 얼마나 애처로운 지도 모른 채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이 삶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더 애처롭다. “인생은 매 순간이 중요하고 그 순간마다 세계와 나의 소통이 있는 것”인데,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부재했던 아이들이 타인과의 소통에도 무감해진다면 그것은 참 무서운 일일 것이다. 아이들의 사고를 존중하는 대화만이 비극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애들이 뭘 알아, 식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파시즘적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많은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에 대해 스스로 맞서는 자존감, 정당한 권력에 대해 당당한 지지를 보내는 용기, 나의 자존감에 비춰 타인의 자존감도 지킬 줄 아는 시민의식은 아직도 요원한 것일까.

한홍구의 인터뷰는 분량상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웃음으로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마치 단숨에 읽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2004년부터 국정원 과거사위의 민간위원으로 참여하며 겪은 경험과 복잡한 심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과거를 벌하자는 게 아니라 화해하자는 거다? 애초부터 접근이 잘못되었다고, 처벌이 있어야 화해가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그저 분에 찬 푸념으로 끝나버리는 현실이 갑갑하다. 그나마 역사청산의 부분에서 노무현정부의 공을 높이 사는 한홍구의 작업들 중에, 정말 동감하며 존경을 느끼는 것이 평화박물관 건립이다. 사람이 어떠한 개념에 관해 알게 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추구함으로써가 아닌, 매사에 부정하고 금기시킴으로써 가치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온 우리에겐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부터 고쳐야하는 커다란 숙제가 주어져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전쟁기념관 대신 평화박물관이라는 문을 통해 개념을 사고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베트남전에 이상한 자부심을 갖거나 이라크 파병에 대해 그토록 무덤덤할 수는 없었을 것인데. 평화란, 대한민국의 현실을 운운할 여지 따윈 없을 만큼 절대적으로 지켜내야 할 가치임에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인데.

심상정, 그녀의 한결같은 어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한다. 그녀는 어디서나 관념적인 이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건, 현실적인 업무에 관해 이야기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인터뷰 역시 그녀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로 현장감이 생생하다. 삼성비자금의 거대한 지하 네트워크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칩이 내장된 사원증을 통해 인터넷 사용시간, 화장실 출입 시간까지 체크당한다는 삼성맨의 실상이 알려질수록 삼성 제국에 대한 그녀의 끈질긴 비판은 이 땅의 진짜 사회정의를 위한 첩경임을 실감한다. 그런 그녀에게 힘이 실려야하는 것이 정상인데도, 오히려 삼성비자금 특검수사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반대하는 경제5단체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슬픔을 넘어 절망이고 무기력이다. 한미FTA가 어떤 내용인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나 고찰도 없이, 조국을 팔아 남의 나라를 배불리고 그 밑에서 자기 한 입 풀칠하면 그만인 천박한 속성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그들, 20% 그들만의 경제논리에 쉽게 세뇌당하는 우리 80%는 어째서 우리의 이익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지, 그 또한 슬픔을 넘어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하고 슬프다. 현장을 직접 겪는 그녀만큼 막막한 사람도 없을 것이거니와, 그 모든 격분을 삼켜내며 그녀만큼 열정적으로 그 문제에 매달리는 사람도 없기에 그녀는 진짜 국회의원이다. 故김선일의 운구행렬에 참가하여 붉은 흙빛의 얼굴로 눈물을 쏟고, 소녀가장 여중생의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노회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붉은 분노가 그녀의 담담한 얼굴에 오버랩되어 비치고, 그녀의 붉은 속내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 붉은 기운이 퍼지고 퍼져 우리가 제대로 두 발 딛고 일어설 수 있을 날을 다시 한 번 꿈꿔본다.

진중권에 대해서는 늘 좀 복잡한 기분이다. 그 자신의 말대로, 한없이 신랄한 사회비평가의 모습을 걷어낸 그는 매우 조용하고 소심한(섬세한) 학구파, 순수학문을 좋아하는 우등생이자 모범생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막말에는 막말로 기꺼이 대응하는 그 시니컬한 태도조차도, 자신의 내부에 명확하게 규정되어있는 어떤 기준으로부터 심각하게 벗어난 대상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는 없을 만큼 예민한 촉수를 가진 탓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성질대로 해봤자 돌아오는 건 무시무시한 언어폭력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조롱을 퍼부어대는 것은 그가 적당히 무디지 못한 탓이다.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하는’ 얘기를 해야한다고 인터뷰의 첫 문을 여는 것처럼, 도대체 왜 그러냐, 그건 아니다, 이게 맞다, 제발 좀 들어처먹으라는 그의 외침 역시, 그가 자신의 신념에 쉽게 물을 타거나 대충 이미지관리나 하는 논객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일이다. 그는 인터넷 댓글을 즐겨온 면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즐거움 따위는 없는 세상을 소망한다는 것도 알기에, 그가 싸늘한 공격을 퍼부을수록 그를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은 아프다. 그저 상식이면 충분한 논리구조가 제 위치에 프로그래밍되어있고, 어떠한 개념이나 가치, 의미같은 것들을 다양하게 구별짓는 사고방식이 이미 체화된 예민한 사람이 살기에 이 사회는 너무 단순하고, 무식하다. 좀 여기저기 쪼개지고, 다양한 영역이 형성되고, 다양한 캐릭터들의 다양한 시각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더라도 잘 어우러지는 사회, 그러나 사회의 공통분모, 상식에서 벗어난 어처구니들은 여지없이 칼날세례를 받는 사회를 바라보지만, 상식이 상식이 아니고 상식이 아닌 것이 상식인 우리 현실은 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암담하다. 결국, 손질하지 못한 과거의 해악을 또 한 번 곱씹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석춘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모 여대에 다녔던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흥미를 느껴 수강했던 국제법 전공수업 첫시간, 겸임교수로 초빙되어온 모 교수는 한 학기동안 공부할 교재는 없으며 주요쟁점이 되는 파트를 뽑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여대에서는 국제학 전공으로 계속 공부해봤자 별 소용없으니 그 시간에 영어나 컴퓨터를 배워 좋은 데 취직하라고 수업부담을 줄여주는 거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강의실은 조용했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후 한참동안 Economic animal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하던 그 교수는 70년대에 부인이 강남에 아파트를 사놓자고 한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그 때까지 후회하고 있었고, 딸이 더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탈북자를 돕는 단체를 정신 나간 놈쯤으로 취급하던 그가 가정까지 내팽개치고 뭐하는 짓이냐고 한심해할 땐 나도 서서히 좀 그렇긴 하네, 했다. 효순이미선이 장갑차사고가 났을 때, 심정적으로 너무 안된 일이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나는 급기야 촛불시위에도 별다른 공감을 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의식이 왜곡되어있었고, 소파협정의 부당함도 그게 현실인데 어쩌겠느냐, 했다. 어설프게 자리를 잡아가던 사회의식따위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듯 했다. 대학생들의 보수화 이전에 교수들의 빈곤한 의식과 보수화가 더 문제라는 손석춘의 말이 어떤 말보다 가슴 서늘했던 이유는 내가 직접 겪은 그 끔찍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수화되는 젊은 세대에 희망이 있는 것 같냐는 지승호의 질문에 "희망이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희망이 있죠"라고 단언하는 손석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이유 역시, 당시엔 내 머리가 "액세서리"인 줄 몰랐던 얼치기가 이제는 그 액세서리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나를 알게될 정도나마 변화라는 것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나마 이 책속 7인의 지성들의 말에 끊임없이 귀기울이려 한 노력으로 드디어 마음까지 기울이게 된 이 변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절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 귀에서 마음까지 오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던가.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돈다.

지승호도 그런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만이 날카롭다가 공로에 대한 평가가 한 두 마디씩 나오고, 왜곡된 의식이 고착화되는 비극에 몸서리를 치다가도 마지막엔 희망이 있죠, 라며 따뜻한 웃음을 살며시 흘려준다. 곳곳에서 발하고 있는 그의 인간미가 끝까지 지켜지는 모습이 참 포근하고 힘이 난다.

우리가 잠시라도 삶의 중심을 놓치거나 잃어버린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된다. 대한민국 1%가 산다는 아파트 광고를 치욕으로 느끼지 못하고, 도망치는 펭귄의 뒤로 빙하를 박살내며 유유히 전진하는 선박을 장엄하게도 그린 조선회사 광고의 극악함을 모르는 순간부터 나의 고귀한 정신이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타인과 더불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함께 사는 삶 속에서 내 존재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나아가 내 존재가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한다. 따뜻한 7인의 옆에서 곁불이라도 쬐고, 그 온기를 내 옆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이다. 나의 부모와 나의 자식, 나의 스승과 나의 친구, 나의 모든 소중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소중한 가치를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는 세상이란 그 온기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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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2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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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5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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