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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 2004 공쿠르 단편문학상 수상작
올리비에 아당 지음, 함유선 옮김 / 샘터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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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겨울도 그리 추울 것 같진 않다. 항상 겨울 초입에 우두커니 서면, 내가 기다리는 매서운 추위는 올해도 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으로 두리번거린다. 길에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보면 내 텅 빈 가슴이 공명하여 부르르 떤다. 그럴 때마다 까칠까칠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세게 누른다.

올리비에 아당의 소설집 <겨울나기>는 이런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 같은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막상 추위가 닥치면 얼굴이 빨갛게 되어 어쩔 줄 모르면서, 올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죽을 것 같이 매서운 추위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렇게 무서운 겨울을 나고 나면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기대감이 그런 기다림을 품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도록 매서운,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겨울을 나도 봄, 여름, 가을이 꿈결같이 지나고 나면 다시, 우리에게는 겨울이 찾아 온다. 당연한 것처럼. 아니 당연하게도.

아직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 회사에 가는 버스 안에서, 두통이 지독한 머리를 차가운 바닥에 대고 누워서, 늦은 아침밥을 먹는 일요일 식탁 앞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이 모두 힘겹게 한밤중의 눈 쌓인 터널 같은 겨울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들은 영원히 소설 속에서 걸어 나오지 못한 채 그렇게 계속 터벅터벅 걸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에도 입구가 없고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카프카의 소설에선 밖으로 나가려는 자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입구를 찾지 못한단다. 그래서 벌레가 되어 말라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이유 없이 체포된다. <겨울나기>의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오히려 더 숨막힐 듯 거북하다. 그들은 카프카의 사람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처럼 같은 쳇바퀴를 돌리고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회전하며 터벅터벅 걷는다. 어디가 처음이고 끝이며 어디고 입구이고 출구인지 도무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하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머리 위 하늘이 전부였다. 그 한 조각의 하늘 외에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하늘이 모든 것이다. 세계는 언제나 그것뿐인 것이고 변화라고는 그저 해가 떠 파란 하늘이 되었다가 해가 지고 검은 하늘이 되는 게 전부다. <겨울나기>의 사람들은 모두들 각자 그 한 조각의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사람이 희망임을, 나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이들이 남편에게, 아내에게, 직장상사에게, 아이들에게, 모든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지금은 비록 무섭도록 쓸쓸해도, 그 쓸쓸함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애정에서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말의 감정도 없으면 아무런 번민도 하지 않을 테니까. 다 미워해서 그러는 거다. 다 사랑해서 그러는 거다. 다 속상해서 그러는 거다. 다 그리워서 그러는 거다. 그렇게 작고 소소한 감정들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둥둥 떠다니는 걸 상상하면 나는 그만 <겨울나기>의 이 숫기 없는 사람들을 몽땅 끌어안고 싶어진다.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던 소년은 이런 시를 쓰지 않았던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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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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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나의 히스클리프.

내가 캐서린이었다면 당신을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외로움. 고독. 절망. 매일밤 그 어둠의 감탕에 스스로 몸을 누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아니 사랑...이야기.

나는 버려두고 내가 당신이 되는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를 읽는 건 고통이다.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무서우리만치 한 사람만 보고 무서우리만치 자신을 버린다. 내가. 내가 캐서린이었다면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 같은 거 안 할텐데. 당신을 그리 잔인하고 괴팍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어쨌거나 당신은 오로지 거울 속의 또 다른 당신처럼 야생의 성미를 가진 캐서린을 사랑할테지.

다른 이의 불행은 내 알바 아니고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며 오직 캐서린만을 생각하는 당신이 나는 부럽다. 나는 아직 다른 이가 불행해지는 것이 불안하고, 내가 나서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더더욱 못 하겠다. 당신의 사랑을 완성형이라고는 빈말이라도 할 수 없지만, 다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는 자신있게 말해 주겠다.

창 밖의 나무에서, 가파른 언덕에서, 거센 바람에서, 오래된 습지에서, 모든 것에서, 모든 것에서 캐서린을 보았던 당신인데, 캐서린이 없는 그 긴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의 히스클리프. 그런데 히스클리프, 나는 당신이 너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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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그림책은 내 친구 2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논장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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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는 앤서니 브라운의 <터널>이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이 작가의 그림과 글을 좋아해서,특히 이 작품을 좋아해서 서점에 가서 사 왔던 기억이 난다.

앤서니 브라운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그림책들을 사 모아 책꽃이에 꽂아 두었었다.

그런데 어느날 언제인지도 모르는 날에

내 그림책들이 몽땅 사라져 버린 걸 알았다.

'아니, 내 그림책들이 터널로 들어가 석상이라도 된건가.'

만만치 않은 가격대 그림책들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기도 해서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된걸까.'

그리고 며칠전 7살, 4살 짜리 딸 둘을 둔 언니네 놀러갔다가 나는 발견했다.

내가 아껴 마지 않던 내 그림책들을.

꼬맹이 조카들이 내 그림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언니!!!! 이거 왜 말도없이 가져갔어!!!!"

"어? 너 이제 안 보는 줄 알고. 그림책이잖아."

나는 언니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싶어지만 왠지 그럴수가 없었다.

7살짜리 조카 태희가 이 책, <터널>을 들고와서 내 옆에 앉아 책을 들추며 말했다.

"이모! 나는 그림책 중에서 이 책이 제일 좋아."

사실, 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내심 어른들의 그림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희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에 대해

나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나는 참, 바보로구나, 이건 원래 내 책이 아니었어.

내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책은 사실 우리 꼬맹이들 것이었다.

"이모. 애 오빠는 터널에 들어가서 돌이 된다~"

나는 태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터널>을 좋아하는 조카가 괜히 대견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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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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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다. 서울 한복판에 그 무거운 검을 들고 언제까지나 직립하고 계시는 위대한 장군의 무서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참으로 난감하다. 거칠고 무거운 슬픔에 쓸려 마음이 다 닮아 버렸다. 시나브로 장군의 마음을 잡아 먹고 있는 무서움이 아니다. 살이 베일 듯 생생하게 시시각각 내달려 오는 무서움.

장군은 언제나 무서웠다. 그를 한 발 짝씩 뒷걸음질 치게 해 사지로 몰아넣는 현실이 나는 무서웠고 적의 살의와 권력의 무능이 무서웠고 식은땀이 마를 날 없음에도 전장의 선두에 곧은 눈을 시퍼렇게 떠야 하는 장군이 무서웠고 내내 고독하게 울고 있는 장군의 무서움이 무서웠다.

사는 게 너무 무서워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컴컴한 데서 울어본 적이 있다. 한밤중의 어두움은 그렇게 울기 좋은 공간이었다.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목에서 쉰소리가 날 때까지 울고 나니 세상은 흘려버린 눈물만큼 딱 그만큼 덜 무거웠다. 내일 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어나 출근을 준비 할 딱 고만큼의 무게. 사는 게 너무 무서워 밤중 새카만 어둠에 흘려보낸 눈물의 무게.

장군처럼 울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장군이 운다는 건 차고 있는 칼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장군은 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때에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의 무게로 장군의 영혼은 21g보다 훨씬 무거웠을 것이다.
그때의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나는 장군만큼 삶이 무섭고 무서워 떨리는 가슴으로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같은 세상에 띄워 놓은 뱃머리에 우뚝 서서 둘러본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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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1-24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중에 두려움과 외로움에 식은땀을 흘리던 장군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것 같네요.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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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소설은 많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소설은 흔치 않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은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눈의 소설이다. 이 소설의 페이지마다, 사이에 꽂아 둔 책갈피에, 살짝 귀퉁이를 접어 둔 책장 위에, 읽다가 잠시 책상 위에 둔 책표지 위에 소복이 소복이 눈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눈에서는 아스라이 검은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작은 몸집의 여자의 향기가 나고, 여자를 보듬어 안는 남자의 허무함이 묻어난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소설을 읽다가 이런 표현을 보면 나는 가슴이 벅차다. 이 소설은 특히나 묘사가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책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노라니 내 가슴을 울렸던 표현들이 마음의 수면으로 하나씩 하나씩 가만히 떠올랐다가, 이 소설 속의 별처럼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나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런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 그것 하나다.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겨울이 되니 피부가 버석버석 마른다. 옷 속으로 한껏 움츠러들면서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최대한 빨리들 걸으려고 움직임이 재다. 그 재빠른 걸음 뒤로 나는 그림자보다 길게 늘어진 그리움을 본다.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한 타인에 대한 그리움. 어디로 가는지 목적 없이 걷는 내 뒤로도 길게, 다른 사람 못지않은 그리움이 서먹하게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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