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인문학 - 도시남녀의 괜찮은 삶을 위한 책 처방전
밥장 지음 / 앨리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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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피곤할 때가 있다.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지구 자전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울 때, 내 안의 일곱난쟁이가 자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할 때.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2바퀴 반 돈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든다. 그러면 이 피곤함을 삭제하기 위해 어떤 딜레트 키를 눌러야할까. 혹시 내 자판에는 딜레트 키가 없는 건 아닐까.

이럴 땐 인간을 믿어 본다. 타인을 믿어 보는 거다. 그리고 인간을 믿는 최적의 방법은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이다. 어려운 책도 좋고 쉬운 책도 좋다. 피곤한 눈을 돌렸을 때 왠지 눈에 들어오는 책을 고르면 된다. 내 몸이 그 책을 원하고 있다는 은연중의 신호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밤의 인문학]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신촌의 ‘더빠’라는 술집에서 저자가 읽은 책 소개도 하고 손님들의 얘기도 들으면서 삶을 나누었던‘수요밥장무대’를 글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첫 번째 밤의 ‘맥주’로 시작하여 열여섯 번째 밤인 ‘기괴함과 창조성’까지, 다양한 주제로 편하게 이야기를 들려 준다.

정말 ‘편하다’는 것이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군더더기 없이 자신의 생각을 부담 없이 종이에 담아낸다. 꾸미지않음이 독자를 어떻게 편하게 하는지 알게 된다. 피곤하고 지친 마음이 겨우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초봄 햇빛을 받고 한 방울씩 녹아내리듯 조금씩 조금씩 풀어진다. 심도 깊은 인문학전 사색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길지 않은 글들이다.

저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어려운 단어들로 풀어내는 인문학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가끔은 편안하게 글자를 눈으로 쫓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처방이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의 부제는 “도시남녀의 괜찮은 삶을 위한 책 처방전”이다. 챕터마다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책들이 소개되니 독서의 가지치기를 해도 좋겠다.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지구는 돈다. 그렇다면, 지구를 멈추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왠지, 이유 없이 눈에 들어오는 인문학 책을 펼치자. ‘사람을 위한 학문’아닌가. 글자들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두 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들꽃도 보고 시냇물도 보고 초가집도 보고 그러다 귀인을 만나 사랑도 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인문서적의 본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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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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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어려운 제목이다. 그런데 이 다섯글자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간다. 내가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였다면 ‘여생(앞으로 남은 생)’이라는 원제를 박수치며 포기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조합의 말을 만들어냈지? 도대체 이 한국제목은 누가 지었을까!. 찬양한다. 하지만 역시 쉬운 제목이 아니다.

모모는 여러 겹의 아이다. 10살이기도 하고, 14살이기도 하고, 유태인이기도 하고, 아랍인이기도 하다. 여러 개의 자기가 있는 존재의 생은 사실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생의 기쁨이나 고난이든 그 모든 걸 너무나 쉽게 초월해 버리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은 독자의 생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이 소설은 인간의 모든 감정들, 특히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아나가는 방식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미 로자 아줌마의 여생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세상에서 희미해져가는 걸 겪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피말리는 슬픔인지를. 그 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를.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모모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 모모는 그것을 사랑했다.

신약성경 코린토 13장 『사랑』.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져도, 죽음이 육신을 가져가고 슬픔만 남겨 놓더라도, 나는 모모는 괜찮을 거라는 걸 안다. 성경의 코린토 전서 『사랑』부분을 이다지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아이는 이 세상에 다시 없으니.

소설 내내 모모는 로자 아줌마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 헛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레 떠나게 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아줌마 옆에서 화장품과 향수로 그 생을 붙잡아 보려는 모모도 모모다. 그 갈피에 서서 여러 개의 자기를 보고 있는 모모가 나는 너무나 슬펐다. 모모가 온몸으로 슬픔을 알아가는 동안, 어른인 나는 슬픔을 다시 배웠다.

문장은 따뜻하지 않고 일견 냉소적으로까지 보이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읽어내면 상당히 감정적으로 만드는 소설이다. 겨울이 가기 전에 가슴을 따듯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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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의 살인 - 제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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킁킁킁. 뭐지. 이 달콤한 냄새는? 최근 제대로 된 본격을 읽지 못해 토라져서는 본격 King Sagol 김전일 애니메이션만 주구장창 돌려보던 여자에게 오랜만에 찾아 온 이 달콤한 본격의 냄새~ 아흥~

일본추리물에는 어린 혹은 젊은 탐정들이 많다. 워낙 재패니즈 이냥반들이 천재라든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든지 하는 극적인 코드를 좋아하는 때문일텐데, 사실 그건 읽는 이들에게도 쾌감이다.

이 소설의 명탐정도 오타쿠 괴짜 고등학생이다. 안 쓰는 부실을 아지트로 수업에도 잘 안 들어가고 탱자탱자하는 덴마는 선생님이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않으면 졸업할 수 있는 점수를 안 주겠다는 협박에 기냥 시험 900점 만점을 받아 버리는 천재.

이 소설의 장점은 이런 추리물의 클리셰들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린 천재 탐정. 학원물. 엘러리퀸을 떠올리게 하는 귀여운 소제목들. 작은 단서가 주는 의미. 마지막에 모든 등장인물을 모아 놓고 설명하는 방식. 너무나 촘촘하게 짜여진 논리적인 추리. 절정에 이르러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여기에다 마지막에 한 번 더 놀라움을 주는 에필로그(내용은 사악하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꽤 귀엽다).

사실 본격추리물에 클리셰가 많다는 건 당연한데다가 아주 칭찬이다. 본격이 가지는 매력은 역시나 정해진 틀 안에서 일목요연하게 진행되는 서술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천재 탐정이 한껏 회색뇌세포를 자랑하며 이러저러해서 네가 범인이다! 라고 마무리를 해 주면 금상첨화. 그래. 본격은 이런 맛에 읽는 거지 하는 만족감.

이 소설은 그 틀을 충실히 따랐다.

분위기야 뭐 여타 일본학원추리물들처럼 무겁지 않고 추리도 못 따라갈 만큼 어렵지 않다.

본격요소들이 촘촘히 박힌 이 소설, 반가웠다. 추운 겨울 금요일 밤에 수면양말 신고 초콜릿이 촘촘히 박힌 쿠키 먹으며 보는 거 추천(난 촉촉한 초코칩 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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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생활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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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형 최첨단 인공지능 자동차 김서늬. 모치즈키가의 초록 데미오와 친구다.

다음은 두 차가 정답게 나눈 대화다.

김서늬 - 여어~ 미도리군 잘 있었는가?

데미오 -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나? 난 데미오라니까. 미도리상은 대여배우야.

김서늬 - 어차피 초록색이니 미도리라고 불러도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안 그래도 모치즈키가 사람들이 우리 데미오~ 하면서 아껴주는구만. 어때, 장남 요시오는 이제 좀 운전에 익숙해졌나?

데미오 - 조심 조심 또 조심이지 뭐.

김서늬 - 그 집 똘똘한 열 살짜리 차남 도루군은 운전도 능숙하게 잘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데미오 - 두말하면 입 아프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자 다마다 겐고까지 어린애 취급을 안 하는데.

김서늬 - 겐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시오가 운전하던 차에 무턱대고 탔던 그 여배우는 어떻게 되었나?

데미오 - 아라키 미도리상 말이지? 사실은...그녀에겐 엄청난 비밀이 있어. 이 사실을 아는 건 겐고와 도루 뿐이지.

김서늬 - 내연남이었던 니와와 차로 도망치다 터널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뉴스 들었어. 다이애너비의 비극적 죽음과 닮았다고 매스컴에서도 시끄럽던데. 겐고 녀석이 무리하게 뒤쫓아 가서 전복되서 불타는 차 사진까지 찍었다며?

데미오 - 그러니까 그녀에겐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겐고까지 얽힌 비밀이 있다니깐!

김서늬 -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 뜸들이지 말고 말해봐!

데미오 - 그건 네가 책을 읽어봐(광고:이사카 고타로의 [가솔린 생활]입니다).

김서늬 - ............책 값은 얼만데.

데미오 - 14,800원입니다.

김서늬 - 네가 주인공이라고 한껏 들떴구나. 자동차가 화자라니, 뭐 제법 재밌는 구석이군. 거기다 너 같이 순진한 구석이 있는 차는 속여 먹기도 쉽...

데미오 - 시끄러웟! 나는 비싸거나 너 같이 똑똑한 차는 아니지만 어떤 차보다 성실한 차라구!

김서늬 - 어, 그래. 그건 내가 보장하지. 나 같이 게을러서 툭하면 퍼지고 멋대로 움직이다 끼이이익 급정차가 다반사인 나랑은 정말 다르지. 그래서 날 운전하는 건 엄마 밖에 없다니깐...어디 조지 클루니 같은 남정네가 날 운전하는 일은 없을라나.

데미오 - 내가 진짜 진심어린 충고를 하자면 넌 그 (더러운)성질만 고치면 승산이 있다. 잘 빠진 차체에 최첨단 하드웨어에 운전자를 재밌게 하는 사소한 기능들. 그러니까 그 좋은 성능으로 주구장창 야구장만 다니지 말고 어디 물 좋은 클럽에라도 가 보렴.

김서늬 - ......고맙다. 역시 넌 성실한 국산차야. 비록 네가 모치즈키가를 떠나더라도 언젠가 다시 10살짜리 도루가 대학생이 되어서 너를 운전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드는데.

데미오 - 오!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는 꿈같은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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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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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감정의 주름으로 짜여진 소설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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