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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영원한 위기의 정치경제
이성형 지음 / 역사비평사 / 2002년 9월
평점 :
1) “우리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보고, 보여주기 위해 왔습니다. 그대들이 우리를 보도록, 그대들이 스스로 자기를 바라보도록, 우리의 시선에서 다른 사람들도 보도록 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거울로서 여기 왔답니다.”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2)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언론들은 세계4위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몰락한 것은 페론주의 때문이었다느니 노조와 과도한 복지제도가 문제라느니 펜을 마구 놀려댄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 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르몽드, 알게마이네 차이퉁 같은 세계의 유수언론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위기가 IMF의 정책 미스와 태환법이라는 극단적인 통화정책, 잘못된 대외개방조치 때문이었음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태는 1976년 군정 시절부터 시작된 무모한 개방정책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남긴 종착역이다. 강성노조, 사회복지 제도, 개입주의 국가를 깨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군부와 메넴 정권이 단행한 경제개방과 그에 따른 탈산업화 및 외채누적이 아르헨티나를 국가부도 사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1990년대 내내 우리 언론들은 노동계의 지지를 받고 집권한 메넴 대통령이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량 해고와 감원을 단행했다고 그 리더십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메넴 정권 하에서 아르헨티나의 민영화, 탈규제, 대외개방은 전광석화로 이루어졌고, 노동입법, 사회복지 제도와 같은 페론 시대의 유산은 대부분 해체되었다. 그런데도 50년 전의 페론주의가 문제된다니? 세계화에 가장 뒤떨어진 곳은 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페론주의의 탓으로 돌리는 우리 신문들의 외신면이었다(반대로 시장개혁 모델의 성공작으로 불리는 칠레 경제기적의 배경에는 국가의 적절한 개입과 규제가 가미된 ‘개입주의 국가’적 요소가 있었다).
3) 남미 정세는 또 급변했고, 2002년에 나온 이 책이 다소 out of date한 감도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멕시코, 페루, 칠레, 베네수엘라를 훑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정세를 쉽게 풀어주는 이 책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이 지역에 접근하는 데는 충분한 마중물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었건) 세계화는 영토를 매개로 한 국경 개념을 약화시키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라틴아메리카 등에 대한 지역연구는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 머릿속의 반쪽짜리 세계지도를 새로이 채워나가는 노력이다. ‘우리’라는 것이 스스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접촉, 충돌, 대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 이상 그것은 결국 남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내겠다는 각오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작업하는 이런 학자가 한국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덧) 다른 흥미로운 꼭지가 많지만 열아홉 번째 글, 「세계화와 축구 : 세 개의 이야기」는 정말 기똥차게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