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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몰랐던 한국사 비밀 32가지 - 숨어 있는 우리 역사 1cm 넓혀 보기 ㅣ 우리도 몰랐던 한국사 비밀 32가지 1
이수광 지음 / 북오션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9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으로 대개의 주제가 이런 저런 문학 및 역사적인
기록물 혹은 TV 드라마를 통해 접했기 때문에 누구나가 알고 있는 수준으로 그냥 저냥 비슷하다
고 생각되어 아무 부담감 없이 우리의 역사를 복습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했지만 일부 내용은
큰 충격으로 다가 왔다.
작품의 소제목을 보면서 4가지 역사적 사실에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왜 고구려는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평양으로의 천도를 감행했는가?
둘째 정말로 백제의 의자왕은 폭정으로 멸망하였을까?
셋째 대몽 항쟁의 시기에 삼별초와 같은 활약상이 있었음에도 왜 고려는 투항했나?
넷째 청의 침공시 왜 부녀자들이 강화도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을까?
이러한 항목에 의문의 포인트를 두어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이런 관심과는 별개로 얼마전 읽었던 작품을 통해 조선의 10대 군주였던 연산군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접하게 된 고려 28대 ‘충혜왕’에 관한 사항이 눈길을 사로 잡았는데,
충혜왕은 고려 역사상 가장 음란하고 잔인한 임금으로 부인만 126명을 둔 것은 물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각종 패륜을 저지른 왕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주목한 이유는 우리가 조선 최악의 군주로 일컫는 ‘연산군’에 대해서는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 통렬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데 반해, 고려의 ‘충혜왕’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날 선 비판의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점이 굉장한 의문으로 남고 있는데 아직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관련 사료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패망한 국가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사적 약점을 오늘에
활용해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워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작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문제적 인물이었던 ‘연산군’과 ‘충혜왕’ 모두는 즉위 초에는 국가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려고
노력했으나 권력 쟁탈을 일삼는 대신들 탓에 역사에 길이 남을 폭군으로 변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도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사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가 많은
검증을 통해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개인 차원이라도 좀 더 확실하게 알고 내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또한 나름대로 내가 선정한 주제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칫 오해나
편협한 역사관내지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해당 소 주제와 관련된
반대 혹은 유사자료까지 포함하여 정확한 결론 도출을 위해 성의를 갖고 인터넷과 여러 문헌
등에서 조사해 함께 실어 보았다. 나름 고생했다.
1. 고구려는 왜 대륙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였을까?
작품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지난 2003년 1월 중앙일보에 실린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님의 이야기를 옮겨 보면
“(중략)... 당시 고구려의 국가 발전 방향은 제국적 발전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의 확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족을 아우르며 국제무대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근거지로 찾아낸 곳이 평양이었다.
우선 평양은 비옥하고 너른 평야 지대를 끼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에서 국내성 일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간 지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구려인
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으리라. 당시 이 지역 생산물은 고구려 국가 경제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에서는 그러한 풍요를 한껏 누리기가 어려웠을
터이다. 게다가 이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고구려의 지배층은 그
위상에 걸맞은 왕도를 건설하고 화려한 영화를 누리려는 욕망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평양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둘째, 내륙 깊숙이 있는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새로이 고구려의
중요 기반으로 떠오른 한반도 서북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동이나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
할 때에도 거점과 배후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로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즉, 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폐쇄적
인 국내성과는 달리 훨씬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광개토대왕 대 정복 활동의 화려한 성공은 군사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연.백제.신라.왜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간 탁월한 국제적 감각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듯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독자적 천하관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해 깊이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의
입지도 국제무대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평양만한 후보지도 없었다.
셋째로 평양은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전통과 낙랑군 이후 중국 문화의 세례를 받은 우수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란 점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점이었다.
4세기 중반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은 북중국으로 남하해 5호 16국 시대를 열었다.
이는 바로 유목민족이 중국 문화에 수용되고 동화해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니, 이제는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의 국제적 문화 기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국제무대에 깊이 발을 내민
고구려도 이러한 조류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었다. 소수림왕대의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도
그러한 방향에 대응해가는 고구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의 문화도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화했다.
이처럼 평양이 국내성에 비해 여러 모로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지만, 좋은 곳이 있다고 금방
도읍지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 역시 오랜 정지작업 끝에 이뤄졌다.
사실 평양 천도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광개토왕으로 보인다.
그는 평양의 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사찰을 건립하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수시로 평양에
순시하였다. 평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평양을
한반도내 외교.군사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장수왕 대에 이뤄졌을지라도, 그 이전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천도가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략)
이렇게 평양 천도는 '도읍 옮기기'에 그치지 않고 '나라 바꾸기'를 시도한 하나의 '개혁’이었던
것이다. (구글 검색 사이트)
상기와 같은 학술적 주장도 있지만 작품에서는
- ‘외세의 잦은 침략에 대한 전략의 일환으로 천도’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또 고구려는 부족연맹
으로 연맹체인 ‘제가회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제가회의의 권력이 막강해 이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평양 천도 설을 제시하고 있다.
- 부족들의 연맹체인 ‘제가회의’는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왕도 추대했다고 하며 부족들에
게는 자치권이 있어서 종묘 및 군사도 자체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한다.
‘소수림왕’은 강력한 제가회의에 맞서기 위해 나름대로의 중앙집권 정부를 구성, 광개토대왕
대까지는 제가회의를 제어할 수 있었으나 ‘장수왕’이 집권하면서 제가회의 권력이 강해지자,
지역에 기반을 둔 부족들과 장수왕이 충돌하게 되는데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근거지인 대륙을 버리고 한반도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2. 백제의 의자왕은 폭정으로 멸망하였을까?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이야기하기 전에 독자로서 ‘의자왕의 실패 원인’에 대한 내용을 직접
인터넷(네이버 지식인)에서 검색해 본 결과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왕과 귀족들이 치열하게 맞섰던 나라로 삼국사기에 보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의자왕은 ‘해동증자’라고 불리고 있는데 말년에 갑자기 술과 여자에
빠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비밀은 바로 자식들인 ‘부여효’와 ‘부여융’간의 권력투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자왕으로서는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였는데 의자왕
은 이런 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하(좌평)들을 귀양을 보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 의자왕의 나이가 환갑 정도일 때 그 노쇠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게 되며 결국 의자왕의 편에 서서 강한 왕권을 부르짖었던 ‘부여융’은 귀족들 편에
섰던 ‘부여효’에게 패하게 되어 결국 부여효가 승리하게 되지만 그 시각 신라군과 당군은 백제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
결국 백제가 망한 이유는 왕권강화에 반대한 귀족들의 반목과 배신에 있었던 것으로 의자왕이
술과 여자로 인해 백제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이야기라 생각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만 백성이 통곡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의자왕이 평소 펼쳤던 자비로운 정치에 대한 진정한 백성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삼국사기 어디에서도 이런 의자왕의 자애로운 정치에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으며 오직
전쟁광이며 실패한 패망의 군주의 모습으로만 그려 놓고 있고 게다가 의자왕의 패륜된 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계백장군이 이끌고 출전한 황산벌 백제 특공대가 5천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궁녀가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도 심한비약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그냥 문필가들이 시나 지을 때 쓰던 소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의자왕은 실패한 군주이기는 하나 후손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수준의 군주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귀족층의 반목과 배신이었다. (네이버 지식인)
작품에 나타난 의자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저자의 주장은
- 의자왕은 즉위 초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형제들과의 우애는 물론 효심이 아주 깊었으며
백성을 잘 보살피는 왕이었다고 한다.
- 신라의 관리였던 ‘조미압’이란 인물이 백제로 잡혀가 의자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임자’라는
관리의 종이 되는데, 종으로 생활하던 그가 어느날 신라로 탈출해 자신이 잡혔간 백제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김유신에게 이야기하자 김유신은 계략을 세워 조미압을 백제로 되돌아가
‘간첩’활동을 지시하게 된다.
즉, 조미압은 의자왕이 총애하는 임자라는 인물과 결탁해 김유신의 사주를 받아 백제의 충신들
을 모함하고 간신들을 등용하게 하여 패망을 재촉하게 한다.
이의 증거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이해 수많은 유언비어가 등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백제인들의 민심을 혼란으로 빠트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있다.
- 백제가 패망한 또 하나의 원인으로 백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는 의자왕을
좋아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결정적으로 왕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3. 고려가 대몽 항쟁을 포기한 이유?
“최씨에 의한 무신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고려는 밖으로부터 몽고의 압박을 받게 되는데 고려가
몽고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219년에 거란족을 몽고와 함께 공략하면서부터다.
거란 토벌 후 몽고가 파견했던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한다.
몽고의 침입은 1231년에 처음 이루어졌는데 전쟁의 결과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나
그들의 과도한 조공 요구가 지속되고 마침내 고려에 파견된 몽고관리의 횡포가 심해져 고려의
분노가 고조되자 당시 무신 정권(최우)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항몽 태세에 돌입한다. 이에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단행하여 1259년인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게 된다.
하지만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 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한
반면,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갑작스런 최씨 정권의 붕괴로 변수가 발생한다.
1258년 무신 정권의 수장인 ‘최의’가 문신 유경, 무신 김인후 등에 의하여 제거되자 몽고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문신들에 따라 이듬해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되지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이 유경을 거세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고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하는데, 원종 9년인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 된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안록공 창’을 왕으로 세웠으나 1269년 몽고 압력으로
곧 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후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하여 1270년 국왕이 몽고의 세력을 업고
몽고에서 귀국하면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는데, 무신 정권은 이를 거부하고
재 항쟁을 결의하였지만 반대파에 의하여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이에 따라 오랜
항몽도 끝나게 된다.
대몽 항쟁기간이 길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몽고로 인질로 잡혀가는 등 민생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목격한 고려의 집권층은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아직 몽고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사병집단으로 무신 정권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역할만 했지 그들은 결코 대몽항쟁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려군과 싸운 일종의 반란군
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하에
넣었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에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인)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대몽 항쟁 내용과 연계시켜 읽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이런 모든 내용은 우리가 학창 시절 배운 내용과 달라도
너무나 달라 잠시잠깐 헷갈렸다.
작품에서는
- 문신들의 지속적인 무신 조롱에 의해 촉발되었던 무신정권을 끝내려는 고육책의 일환으로
몽고에 투항이 고려되었다.
즉, 무신 정권에 농락당하기 보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를 선택한 것으로 고려는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몽고에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왕에게 부여되는 시호에 ‘충(忠)’
자를 넣어야 했다.
- 왕들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왕보다 권세가 높았으며 25대 충렬왕은 왕인
남편을 지팡이로 때려서 왕이 구석으로 쫒겨가 슬피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4. 몽고군의 침공시 강화도에서 아녀자들이 자살한 이유?
- 청나라가 기마병을 앞세워 10일도 안 되어 순식간에 한양에 접근하자 조선은 인조의 장자인
봉림대군과 세자빈을 강화로 피신하지만 인조는 타이밍을 놓쳐 남한산성으로 진로를 바꾸고
40일 동안 항전을 한다.
- 도체찰사에 영의정 김류가 임명되고 강화도를 방어하는 검찰사에는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
임명되는데, 그는 피난가는 부녀자들을 배에 태워 건네줄 생각은 않고 자신의 친인척들만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 강화도로 건너온 김경징은 강화도를 방어하기는커녕 술에 쩔었다고 하며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면서 청군에게 잡히면 정조를 유린당할까봐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 부인과 첩에게 자살하라고 위협해 모두 자진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한 수많은 대신들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집집마다 목을 맨 여자들의 시체가 널렸었다고 한다.
내가 관심을 갖고 접한 부분은 학창시절 배웠던 내용과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주장하는
내용에 다소간의 괴리가 있어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으며 그 모든 것을 인터넷과 관련 자료를
찾으며 정답에 가까운 진실된 내용을 확인하였을 때 – 그것이 진정한 진실인지는 두 번째이고
내가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 찾아온 곤혹감으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아무튼 이런
저런 내용으로 인해 정말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독후감을 쓰면서 ‘나는 앞으로 현재를 부정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지만 본 작품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느낌이 들어 여기에
오늘의 상황을 빗대는 글 한 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방만한 경영의 결과로 초래된 IMF 당시 자기가 빌려준 돈 떼일까봐 제일 먼저 빌려준
돈 찾아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던 놈들이었지만 ‘내 탓이요를 외치며’ 대승적 차원에서 용서해
주었지만 그 때의 교훈을 잊고 또 방심하다 쥐색히 닮은 색히가 우리를 얕잡아보고 수출관리의
부실 운운하면서 경제적 조치로 우리를 능멸하고 있음에도 또 자기들은 우리 산하 곳곳을 겨누고
있으면서 우리 스스로 나라 한 번 제대로 지키겠다고 방어 시스템을 들여오겠다는 데 그렇게
못살게 구는 놈들에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제대로 된 본 때를 보일 전략이나 비전도 제시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우리의 리더들을 보면서 자신들의(무신정권과도 같은 정당) 기득권만
생각하는 또다른 삼별초들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한 핏줄 한 형제라 자부하고 아껴주었던 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바다 위로 지랄맞게 미사일인지
방사포인지를 쏴대도 한마디 안 하는 위정자들을 보면서 강화도로 도망갈 때 서민은 배에 태워
주지도 않고 자신의 식솔들만 태우고 떠났다는 놈과 한국전쟁 당시 수도 서울은 안전하다 속이고
정부를 지방으로 몰래 옮긴 놈들, 세월호의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거짓 방송으로 일관했던
색히들, 임진왜란 당시 신나게 도망가다 백성의 원성을 샀던 선조 임금의 모습과 아관파천으로
남의 나라 대사관저로 숨어든 고종의 모습이 책 읽는 동안 이리저리 어우러져 도대체 이 땅에는
진정한 리더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정녕 우리의 DNA에는 선천적으로 그런 자질이 부족한
국가이며 국민들인지를 고민에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도 그 답은 찾지를 못하겠다.
하여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유식이 출장가고 무식이 보초서는 그런 자신을 확인하는 시간
이었고, 우리의 정치인과 기득권층들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출장가고
이기주의, 외골수주의 그리고 파당주의가 보초를 서고 있다는 느낌을 왕창 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