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싱크탱크들
이저 윌로치 지음, 차재호 옮김 / 홍익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3

 

지난 1998나폴레옹(5, 막스갈로, 문학동네)’이라는 작품을 통해 군인으로서의 나폴레옹

이라는 인물을 처음 접해 본 후, 그의 어떤 점이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의

참모들은 무슨 역할을 했고,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를 생각하던 와중에 지난 2002년경 해당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작품을 읽기 전 나는 그와 그의 참모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속에

나는 평소 리더보다는 리더를 움직이게 하는 참모론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

 작품을 선정해 읽었으나, 당초에 내가 작품을 읽기 전에 가졌던 그같은 기대를 완전히 져버린

내용이 많아 솔직히 실망감에 실망감만 더한 상태에서 작품을 덮고 말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의혹 사건들과 권력형 비리 사건을 접하면서 여태껏

내가 읽어 온 작품 어딘가에서 많이 접해본 듯한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어 기억을 되짚던

중 갑자기 본 작품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읽게 되었다.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로 내가 받은 느낌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고 칭송되었던 박근혜 정부

에서 벌어졌던 어느 모자란 여인의 질낮은 언행으로 인해 벌어졌던 정권의 파국상과 그런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민중들이 들었던 촛불로 세워진 정권에서 벌어지는 모습들 중

특히, 권력자 및 권력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프랑스 혁명을 촉발시키며

보나파르트란 인물을 등극시키기 위해 벌였던 모습의 축소판과도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

아직 국가, 사회적인 논쟁적 화두의 실제 내용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밝혀지지 않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워 그 부분은 빼고서라도 그런 혼돈 속에 존재하는

권력자와 그를 둘러싼 참모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가끔 이상한

사람이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기가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정치는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그들이 과거에 행한 언행과 행적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는 힘은 없지만 그 힘보다 더 강력한 귀중한 한 표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과거

속의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위정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찌 되었던 간에 해당 작품은

1) 시대적, 정치적 혼란기에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는가를

2) 권좌에 오른 후에는 참모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직, 간접적으로 받았는지를

3) 참모들은 어떤 의도에서 권력자를 위해 큰 그림을 그렸는지를

4) 권력을 손에 쥔 권력자는 어떤 행동을 취했었는가를

기술한 작품이지만 기대만큼 내용적으로 완성된 작품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그런

작품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에서 눈에 띄는 몇가지 대목만 추려 본다면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체를 갖고 논한다는

자체는 프랑스 혁명사나폴레옹등극사를 논하는 방대한 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생략하고 모두가 알 수 있는 사건 위주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거사'로 불리는 쿠테타로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다.

이 시기는 프랑스가 혁명으로 표출된 국민들의 이상을 실현하고 공화국의 이상을 달성할

영웅을 갈망하던 시기로 각종 전쟁에서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리던 나폴레옹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무르익는데 보나파르트가 나타나자 그런 영웅을 기대하던 추종 세력들에 의해 아무런 저항 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다.

우리의 역사나 외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대체적으로 등극 과정이 올바르지 못한 권력자가

취하는 조치 중의 하나가 집권 초기 추방된 구세력을 통치권 안으로 포용하는 정책인데,

보나파르트 역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가혹한 보복이나 징벌 대신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영구적

으로 자기편으로 만드는 전략을 추진했는데,

반대파를 포용하는 정책이 나폴레옹의 경우 잔꾀에 가까운 전략이었음이 역사는 증거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권을 잡은 집단이 과거를 청산한다는 미명하에 구 시대 인력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치고 모욕을 주는 모습보다는 한결 아름다운 행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을 수 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둔 기득권 층을 향해 정권을 잡은 뒤 용서의 손길뻗으며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겠다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대통령의 아름다운 모습과 죽음의 문턱

까지 갔다 와 화해의 손길로 치유한 우리의 DJ선생께서 칭송되고 있는 이유를 정권을 잡은

권력자와 그의 주변부에 있는 참모들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역사를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

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확실한 대의 명분과 논리에 입각한 방식으로 내로남불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내로남불적그 폐해를 작금의 현실에서 확실히 보고 있지 않은가?

황제에 등극한 그는 수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럼에도 국내 문제도 확실히

챙길 수 있었던 이유는 나폴레옹 정권과 운명을 같이한 권력의 2인자, '캉바세레스때문이었는데,

그의 권력자에 대한 행동이나 처세는 단순히 비난하기에 앞서 참모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혹은

2인자를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연구해 볼 만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하며 본 작품의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었다면 오히려 이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설명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황제에 등극한 이후 그는 '국민 주권'이니 '의회 토론'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하며, 지도자

의 확고한 의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힘만 있으면 언제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는 타고난

'독재자'였다고 저자는 여러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밝히고 있다.

또 나폴레옹은 '선거 제도'를 국가 개혁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소모적인 제도로 보았는데, 이를 보완하고자 자신의 손으로 정치인을 임명하는 '지사단(知事團)‘운영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간에 보나파르트 체제를 명실상부하게 받든 싱크 탱크들은 입법을 담당한 '블레',

내무를 담당한 '르뇨', 재정을 담당했던 '드페르몽'에 의해서라고 한다. 2인자인 '캉바세레스'

역시 그들과 함께 큰 활약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언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다.

나폴레옹은 루이16세 보다 더 가혹하게 언론을 통제했는데, 그는 '언론의 자유'를 위험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정치적인 신문 기사를 단호하게 처단하는데 이를 간파한 측근들이 언론 '검열제도'

만드는데, 이 제도는 국가의 지식과 문화를 철저히 마비시켰고 후유증은 오래갔으며, 1811년에는

파리에 4개의 일간 신문사만이 남았다고 한다.

또한 보나파르트 측근들에 의해 자행된 국민들에 대한 처벌 남발이 보나파르트 정권의 정체성

과 신뢰도를 급속히 떨어트리는 결과로 연결되었는데, 정권의 싱크 탱크들 조차도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치 못하였다.

- 이 부분은 우리의 역대 정권들이 답습한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

보나파르트는 분명 군인으로서의 많은 업적과 황제로서 행한 행위가 국민들에게 커다란 자부심

으로 각인되게 하는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나 국민들에 의해 주도된 '혁명의 유산'더욱 긍정적

인 가치를 올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도구 내지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후세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나폴레옹'이라는 단어는 영웅으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닌 야망과

정복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다

 

어찌되었던 나폴레옹은 겉으로는 참모를 활용한 참 군주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면도 있으나

한거풀 걷어내고 자세히 살펴보면 참모들에 의해 농락당한 절대 군주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크게 들게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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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 지음 / 북오션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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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우리 역사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으로 대개의 주제가 이런 저런 문학 및 역사적인

기록물 혹은 TV 드라마를 통해 접했기 때문에 누구나가 알고 있는 수준으로 그냥 저냥 비슷하다

고 생각되어 아무 부담감 없이 우리의 역사를 복습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했지만 일부 내용은

큰 충격으로 다가 왔다.

 

작품의 소제목을 보면서 4가지 역사적 사실에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왜 고구려는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평양으로의 천도를 감행했는가?

둘째 정말로 백제의 의자왕은 폭정으로 멸망하였을까?

셋째 대몽 항쟁의 시기에 삼별초와 같은 활약상이 있었음에도 왜 고려는 투항했나?

넷째 청의 침공시 왜 부녀자들이 강화도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을까?

이러한 항목에 의문의 포인트를 두어 작품을 읽게 되었다.

  

이런 관심과는 별개로 얼마전 읽었던 작품을 통해 조선의 10대 군주였던 연산군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접하게 된 고려 28충혜왕에 관한 사항이 눈길을 사로 잡았는데,

충혜왕은 고려 역사상 가장 음란하고 잔인한 임금으로 부인만 126명을 둔 것은 물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각종 패륜을 저지른 왕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주목한 이유는 우리가 조선 최악의 군주로 일컫는 연산군에 대해서는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 통렬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데 반해, 고려의 충혜왕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날 선 비판의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점이 굉장한 의문으로 남고 있는데 아직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관련 사료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패망한 국가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사적 약점을 오늘에

활용해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워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작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문제적 인물이었던 연산군충혜왕모두는 즉위 초에는 국가를 대대적으로 혁신하려고

노력했으나 권력 쟁탈을 일삼는 대신들 탓에 역사에 길이 남을 폭군으로 변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도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사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가 많은

검증을 통해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개인 차원이라도 좀 더 확실하게 알고 내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또한 나름대로 내가 선정한 주제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칫 오해나

편협한 역사관내지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해당 소 주제와 관련된

반대 혹은 유사자료까지 포함하여 정확한 결론 도출을 위해 성의를 갖고 인터넷과 여러 문헌

등에서 조사해 함께 실어 보았다. 나름 고생했다.

 

   1. 고구려는 왜 대륙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였을까?

작품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지난 20031월 중앙일보에 실린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님의 이야기를 옮겨 보면

“(중략)... 당시 고구려의 국가 발전 방향은 제국적 발전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의  확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와 종족을 아우르며 국제무대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근거지로 찾아낸 곳이 평양이었다.

우선 평양은 비옥하고 너른 평야 지대를 끼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에서 국내성 일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간 지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구려인

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으리라. 당시 이 지역 생산물은 고구려 국가 경제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국내성에서는 그러한 풍요를 한껏 누리기가 어려웠을

터이다. 게다가 이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고구려의 지배층은 그

위상에 걸맞은 왕도를 건설하고 화려한 영화를 누리려는 욕망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평양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둘째, 내륙 깊숙이 있는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새로이 고구려의

중요 기반으로 떠오른 한반도 서북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동이나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

할 때에도 거점과 배후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바닷길로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폐쇄적

인 국내성과는 달리 훨씬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광개토대왕 대 정복 활동의 화려한 성공은 군사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연.백제.신라.왜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간 탁월한 국제적 감각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듯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독자적 천하관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대해 깊이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의

입지도 국제무대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평양만한 후보지도 없었다.

   

셋째로 평양은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전통과 낙랑군 이후 중국 문화의 세례를 받은 우수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란 점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점이었다.

4세기 중반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은 북중국으로 남하해 516국 시대를 열었다.

이는 바로 유목민족이 중국 문화에 수용되고 동화해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니, 이제는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의 국제적 문화 기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국제무대에 깊이 발을 내민

고구려도 이러한 조류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었다. 소수림왕대의 율령 반포와 불교 수용도

그러한 방향에 대응해가는 고구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의 문화도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화했다.

 

이처럼 평양이 국내성에 비해 여러 모로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지만, 좋은 곳이 있다고  금방

도읍지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 역시 오랜 정지작업 끝에 이뤄졌다.

사실 평양 천도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광개토왕으로 보인다.

그는 평양의 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사찰을 건립하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수시로 평양에

순시하였다. 평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 평양을

한반도내 외교.군사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장수왕 대에 이뤄졌을지라도, 그 이전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천도가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략)

 

이렇게 평양 천도는 '도읍 옮기기'에 그치지 않고 '나라 바꾸기'를 시도한 하나의 '개혁이었던

것이다. (구글 검색 사이트)

 

상기와 같은 학술적 주장도 있지만 작품에서는

- ‘외세의 잦은 침략에 대한 전략의 일환으로 천도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또 고구려는 부족연맹

  으로 연맹체인 제가회의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제가회의의 권력이 막강해 이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평양 천도 설을 제시하고 있다.

- 부족들의 연맹체인 제가회의는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왕도 추대했다고 하며 부족들에

  게는 자치권이 있어서 종묘 및 군사도 자체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한다.

  소수림왕은 강력한 제가회의에 맞서기 위해 나름대로의 중앙집권 정부를 구성, 광개토대왕

  대까지는 제가회의를 제어할 수 있었으나 장수왕이 집권하면서 제가회의 권력이 강해지자,

  지역에 기반을 둔 부족들과 장수왕이 충돌하게 되는데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근거지인 대륙을 버리고 한반도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2. 백제의 의자왕은 폭정으로 멸망하였을까?

저자의 주장을 그대로 이야기하기 전에 독자로서 의자왕의 실패 원인에 대한 내용을 직접

인터넷(네이버 지식인)에서 검색해 본 결과

백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왕과 귀족들이 치열하게 맞섰던 나라로 삼국사기에 보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의자왕은 해동증자라고 불리고 있는데 말년에 갑자기 술과 여자에

빠졌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비밀은 바로 자식들인 부여효부여융간의 권력투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자왕으로서는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였는데 의자왕

은 이런 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하(좌평)들을 귀양을 보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 의자왕의 나이가 환갑 정도일 때 그 노쇠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게 되며 결국 의자왕의 편에 서서 강한 왕권을 부르짖었던 부여융은 귀족들 편에

섰던 부여효에게 패하게 되어 결국 부여효가 승리하게 되지만 그 시각 신라군과 당군은 백제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

 

결국 백제가 망한 이유는 왕권강화에 반대한 귀족들의 반목과 배신에 있었던 것으로 의자왕이

술과 여자로 인해 백제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이야기라 생각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갈 때 만 백성이 통곡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의자왕이 평소 펼쳤던 자비로운 정치에 대한 진정한 백성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삼국사기 어디에서도 이런 의자왕의 자애로운 정치에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으며 오직

전쟁광이며 실패한 패망의 군주의 모습으로만 그려 놓고 있고 게다가 의자왕의 패륜된 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계백장군이 이끌고 출전한 황산벌 백제 특공대가 5천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궁녀가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너무도 심한비약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그냥 문필가들이 시나 지을 때 쓰던 소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의자왕은 실패한 군주이기는 하나 후손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수준의 군주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귀족층의 반목과 배신이었다.       (네이버 지식인)

  

작품에 나타난 의자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저자의 주장은

- 의자왕은 즉위 초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형제들과의 우애는 물론 효심이 아주 깊었으며

  백성을 잘 보살피는 왕이었다고 한다.

- 신라의 관리였던 조미압이란 인물이 백제로 잡혀가 의자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임자라는

  관리의 종이 되는데, 종으로 생활하던 그가 어느날 신라로 탈출해 자신이 잡혔간 백제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김유신에게 이야기하자 김유신은 계략을 세워 조미압을 백제로 되돌아가

  간첩활동을 지시하게 된다.

  , 조미압은 의자왕이 총애하는 임자라는 인물과 결탁해 김유신의 사주를 받아 백제의 충신들

  을 모함하고 간신들을 등용하게 하여 패망을 재촉하게 한다.

  이의 증거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이해 수많은 유언비어가 등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백제인들의 민심을 혼란으로 빠트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있다.

- 백제가 패망한 또 하나의 원인으로 백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는 의자왕을

  좋아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결정적으로 왕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3. 고려가 대몽 항쟁을 포기한 이유?


최씨에 의한 무신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고려는 밖으로부터 몽고의 압박을 받게 되는데 고려가

몽고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219년에 거란족을 몽고와 함께 공략하면서부터다.

거란 토벌 후 몽고가 파견했던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한다.

몽고의 침입은 1231년에 처음 이루어졌는데 전쟁의 결과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나

그들의 과도한 조공 요구가 지속되고 마침내 고려에 파견된 몽고관리의 횡포가 심해져 고려의

분노가 고조되자 당시 무신 정권(최우)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항몽 태세에 돌입한다. 이에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단행하여 1259년인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게 된다.

 

하지만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 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한

반면,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갑작스런 최씨 정권의 붕괴로 변수가 발생한다.    

1258년 무신 정권의 수장인 최의가 문신 유경, 무신 김인후 등에 의하여 제거되자 몽고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문신들에 따라 이듬해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되지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이 유경을 거세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고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하는데, 원종 9년인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 된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안록공 창왕으로 세웠으나 1269년 몽고 압력으로

곧 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후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하여 1270년 국왕이 몽고의 세력을 업고

몽고에서 귀국하면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는데, 무신 정권은 이를 거부하고

재 항쟁을 결의하였지만 반대파에 의하여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이에 따라 오랜

항몽도 끝나게 된다.

대몽 항쟁기간이 길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몽고로 인질로 잡혀가는 등 민생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목격한 고려의 집권층은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아직 몽고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사병집단으로 무신 정권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역할만 했지 그들은 결코 대몽항쟁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려군과 싸운 일종의 반란군

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하에

넣었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에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인)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대몽 항쟁 내용과 연계시켜 읽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이런 모든 내용은 우리가 학창 시절 배운 내용과 달라도

너무나 달라 잠시잠깐 헷갈렸다.

 

작품에서는

- 문신들의 지속적인 무신 조롱에 의해 촉발되었던 무신정권을 끝내려는 고육책의 일환으로

  몽고에 투항이 고려되었다.

  , 무신 정권에 농락당하기 보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를 선택한 것으로 고려는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몽고에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왕에게 부여되는 시호에 ()’

  자를 넣어야 했다.

- 왕들은 원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왕보다 권세가 높았으며 25대 충렬왕은 왕인

  남편을 지팡이로 때려서 왕이 구석으로 쫒겨가 슬피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4. 몽고군의 침공시 강화도에서 아녀자들이 자살한 이유?

- 청나라가 기마병을 앞세워 10일도 안 되어 순식간에 한양에 접근하자 조선은 인조의 장자인

  봉림대군과 세자빈을 강화로 피신하지만 인조는 타이밍을 놓쳐 남한산성으로 진로를 바꾸고

  40일 동안 항전을 한다.

- 도체찰사에 영의정 김류가 임명되고 강화도를 방어하는 검찰사에는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

  임명되는데, 그는 피난가는 부녀자들을 배에 태워 건네줄 생각은 않고 자신의 친인척들만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 강화도로 건너온 김경징은 강화도를 방어하기는커녕 술에 쩔었다고 하며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면서 청군에게 잡히면 정조를 유린당할까봐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 부인과 첩에게 자살하라고 위협해 모두 자진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한 수많은 대신들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집집마다 목을 맨 여자들의 시체가 널렸었다고 한다.

 

내가 관심을 갖고 접한 부분은 학창시절 배웠던 내용과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주장하는

내용에 다소간의 괴리가 있어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으며 그 모든 것을 인터넷과 관련 자료를

찾으며 정답에 가까운 진실된 내용을 확인하였을 때 그것이 진정한 진실인지는 두 번째이고

내가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 찾아온 곤혹감으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아무튼 이런

저런 내용으로 인해 정말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독후감을 쓰면서 나는 앞으로 현재를 부정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지만 본 작품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일부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느낌이 들어 여기에

오늘의 상황을 빗대는 글 한 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방만한 경영의 결과로 초래된 IMF 당시 자기가 빌려준 돈 떼일까봐 제일 먼저 빌려준

돈 찾아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던 놈들이었지만 내 탓이요를 외치며대승적 차원에서 용서해

주었지만 그 때의 교훈을 잊고 또 방심하다 쥐색히 닮은 색히가 우리를 얕잡아보고 수출관리의

부실 운운하면서 경제적 조치로 우리를 능멸하고 있음에도 또 자기들은 우리 산하 곳곳을 겨누고

있으면서 우리 스스로 나라 한 번 제대로 지키겠다고 방어 시스템을 들여오겠다는 데 그렇게

못살게 구는 놈들에게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제대로 된 본 때를 보일 전략이나 비전도 제시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우리의 리더들을 보면서 자신들의(무신정권과도 같은 정당) 기득권만

생각하는 또다른 삼별초들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한 핏줄 한 형제라 자부하고 아껴주었던 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바다 위로 지랄맞게 미사일인지

방사포인지를 쏴대도 한마디 안 하는 위정자들을 보면서 강화도로 도망갈 때 서민은 배에 태워

주지도 않고 자신의 식솔들만 태우고 떠났다는 놈과 한국전쟁 당시 수도 서울은 안전하다 속이고

정부를 지방으로 몰래 옮긴 놈들, 세월호의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거짓 방송으로 일관했던

색히들, 임진왜란 당시 신나게 도망가다 백성의 원성을 샀던 선조 임금의 모습과 아관파천으로

남의 나라 대사관저로 숨어든 고종의 모습이 책 읽는 동안 이리저리 어우러져 도대체 이 땅에는

진정한 리더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정녕 우리의 DNA에는 선천적으로 그런 자질이 부족한

국가이며 국민들인지를 고민에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도 그 답은 찾지를 못하겠다.

 

하여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유식이 출장가고 무식이 보초서는 그런 자신을 확인하는 시

이었고, 우리의 정치인과 기득권층들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출장가고

이기주의, 외골수주의 그리고 파당주의가 보초를 서고 있다는 느낌을 왕창 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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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1900년, 여기 사람이 있다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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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5

 

“Back To The Future"

작품을 읽는 내내 1980년대 중반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웃긴다고 해야 할지 아님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의

웃음과 애환 그리고 슬픔을 느낀 그런 작품이었는데 한마디로 웃펐다.

 

근대화 초기에 발간되었던 신문의 시사만평에서 작품의 소재를 가져 왔다고 하는데,

현대의 신문도 그러하지만 시사만평이라는 것이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와 민중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속살을 가감 없이 펼치는 장으로서 - 당시는 언론의

통제가 없었나 보다 -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상을 세밀히 알 수 있는 최고의 증거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 작품의 소재 발굴이라는 점에서는 선택을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시사만평은 19096월에 창간된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

실렸었다고 한다.

 

작품을 통해 느낀 단 하나의 명제를 이야기해 보라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권력자 주변의 측근비리 이야기, 경성 고아원 사건(고아를 이용한 비리), 도박(로또, 바다

이야기) 이야기와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악순환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여전히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그저

가슴만 답답한 시간이었다.

우선 작품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기본정보가 있어야 하겠다.

 

고종은 아관파천(1897) 이후 환구단(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곳)을 세우고 왕에서 황제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화를 꾀하는 데,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닌 세계관의 변화이자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걸맞는 국민 계몽도 시급한 문제로 판단하여 일부 선각자들은 매체를 통한 계몽

특히 독립신문등과 같은 매체들을 활용해 연일 진정한 대한제국이 되려면 모든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화계몽 사업에 매진하게 되는데 근대화 프로젝트의 당위성

을 저잣거리 인민에게 널리 알리는 소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서구식 교육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설, 웅변, 강연 및 토론 등이었다.

근대화 초기만해도 이런 것은 낯선 볼거리만 제공했지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던 시기

였으나 훗날 연설과 강연회가 인기를 끌면서 유료화를 해도 방청객 수는 1천여 명을 넘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며 1910년에 원각사에서 대규모 유료 강연회가 열릴 예정이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개최가 강제 무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일부 부정관료와 결탁을 하면서 대한 제국의 정국은 꼬여만 간다.

마침내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데 이는 요새말로 일종의 촛불 시위'였던 것인데 이를 거꾸로 이용해 버린

친일파에 의해 만민공동회는 흐지부지 되고 정국이 친일파로 넘어가는 결정적 단초가 되고

만다.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새 정치, 경제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집단이 있는데

그 집단들도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OOO을 바라보는 저잣거리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자기반성

보고서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겠지만....

아무튼 개화기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내용에 대해 언급한 말도 안 되는 사연을 살펴보면

 

[무당과 점쟁이]

- 혼란의 시기에 궁궐에 진출한 진령군(무녀)으로 인해 희대의 사기꾼 이유인이라는 작자까지

  설치면서 무당과 점쟁이가 국가의 주요 보직에 임명되는데 당시 임명된 ,차관급 인사 중

  8명이, 군수급 인사 중 18명이 무당과 점쟁이 출신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속인의 진출이 심각해

  이 문제를 공진회가 지적하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자 고종은 오히려 이들 편에 서서 공진회

  회원들을 박해까지 했다고 한다.

- 무녀인 진령군은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수련(무녀)은 고종과 명성왕후에 빙의하여 권세를

  얻으려 했으나 고종이 퇴위되어 힘을 잃게 되자 또 다른 방법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신주로

  모셔 권력을 탐하다 일제치하가 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 1909년은 전국적으로 전염병(콜레라)이 창궐해 종교의 힘이 평소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성 병]

- 대한제국 시기에 원각사, 연흥사 등과 같은 근대식 연극장이 세워졌는데 이는 계몽 지식인들이

  문명 개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든 이유는

  새로운 볼거리나 공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서구 문명의 활동 사진을 볼 수 있는 공간

  이라는 것과 그 곳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구습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이성과의 만남을

  가져도 별 문제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공연보다 잿밥에만 관심을 갖는 장소로 인식되면서 성매매 종사자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게 되면서 성병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통변(통역)]

- 대한제국 시대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통역의 희소성이 높아지면서 정동대감이라는 김홍륙이

  라는 자에 의해 농단 당한다.

  김홍륙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러시아어를 원어민 가깝게 익힌 인물로 운명적

  으로 고종과 만나며 국정 전반을 러시아 공사 배배르를 등에 업고 농단한다.

  당시 러시아어와 일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을 좌우하는 무기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헌병 보조원, 정탐꾼, 통변은 대한 제국을 좀 먹고 인민의 생활을 뜯어먹는 세 마귀라고

  불리웠는데 그 중 통변의 횡포가 가장 심했으며 당시의 신문 사설도 그들의 무지 막지한

  횡포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김홍륙의 권력 농단이 심해지자 고종은 김홍륙을 태형에 처하고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지만

  김홍륙은 자신의 심복인 공흥식을 동원해 고종을 독살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된다.

 

[만민공동회]

- 쇠약해져가는 대한제국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의 총집합체가 바로 만민

  공동회였다. 만민공동회 결과 정부와 만민공동회 측은 의회를 개하고 자주적 국정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친러 보수파가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색선전을 벌이게

  되는데,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의회를 설립하고 대통령으로 박정양을 부통령으로

  윤치호를 세워 공화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황제는 분개해 곧장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용역 깡패로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철저히 탄압해 수포로 돌린다.

 

[도박, 부정축재]

- 대한제국 시대의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한 이지용은 화투대신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이지용외에도 이완용, 이용규, 박의병 등은 집을 돌아가며 국사는 제쳐두고 애첩들과 함께

  큰 판돈을 걸고 도박에 빠졌었다고 한다.

- 여흥 민씨 척족인 민영휘(본명 민영준)는 황실내탕금은 물론 직위도 뇌물로 부여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러 당시 중국에 수 천만원의 예금은 물론 자산만 현재 가치로 1조 원대에 이르렀다

  고 한다

- 한성미술품제조공장 대표이사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이봉래라는 자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을사 오적 송병준과 짜고 황실 문화재를 몰래 내돌려 팔아먹은 파렴치한 놈이며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 이용익은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인민의 고혈을

  짜냈음은 물론 황실 재산을 관리하고 황실을 위한 세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혹독한 세금을

  징수해 자신의 배를 불렸다고 한다.

 

[생계형 일제 협력자들]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서 나인영(나철)과 오기호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결성해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망보는' 임무를 서창보라는 인물에게 맡기는 데 서청보가 구속이 되어 겁을

  먹고 을사오적 암살단에 대한 비밀을 실토한다.

  1년의 구속생활 중 친일 조직인 일진회의 논리에 감화 받은 서창보는 열렬한 한일합방 추종자

  로 변질되어 황국협회 회원이되어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기까지 한다.

  그는 일진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며 철저한 친일로 돌아선다. 나중에는 일본 내각과 통감부에

  직접 편지를 써서 꼭 한일합방을 이뤄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 서창보의 이런 행동이

  소문나자 시민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다반사였는데 그가 맞은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편지좀

  그만 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여러 친일단체가 있었지만 이용구의 일진회와 이완용의 국민연설회가 그 중 가장 막강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가 견제하는 단체였다. 그 이유는 일진회가 한일합방 청원서를 통감부에

  먼저 제출해 선수를 빼앗겼다고 느낀 이완용이 이인직을 앞세워 국민연설회를 만들어 일제

  협력 서열 제1위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개 소탕작전]

- 광견병에 대한 문제로 일어난 일로 생각되는 데 개 소탕 작전이 박중양이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이자 양아버지로 두고 활동했다고 한다.

  , 당시 개를 기르는 사람은 개의 모양, 색깔, 종류 등과 주인의 성명, 거주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경찰서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사람이 호패를 차듯 개 역시 개 목걸이를 차도록

  했는데 그런 표식이 없으면 바로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지위와 체면을 중시한 고위 관료들은 개목걸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을 여간 찝찝하고

  불쾌한 일이었는데 을사오적이나 탐관오리의 개들이 지나가면 그 개 주인의 이름을 개 뒤에

  붙여서 조롱하고는 했다고 한다.

 

[박람회]

-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에는 학술인류관이라는 것이 설치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관

  으로서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전시하기도 했다.

- 1907년 도쿄 박람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일제는 조선인이 야만의 표본으로 조선

  여인을 내세우려 했으나 정부가 나서서 이를 무산시킨 사실도 있다

- 1907년 경성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해에는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전국 의병 봉기 등 비상시국으로 일본은 불안한 시국을 잠재울 방안으로 박람회라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들과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연계해 보면 비슷해도

아주 비슷한 사건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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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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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근대가 탄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는데 작품은 그 중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결정적인 지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판단되는 르크레티우스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작품의 발견과 전파를 통해 파급된 영향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 작품의 부제목인 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미미한 수준에서 취급된다 -

 

작품을 읽고 독후감내지는 서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작품의 중심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해당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작품을 읽는 내내 저자가 저쪽

동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쪽 서북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등과 같은 기본적인 방향성을

모르고 덤벼들어 상당히 곤혹스러웠음을 고백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일부 언급되고 있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언급할 때 나의 철학적 수준이라는

게 거의 초등학생 수준에 가까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온 몸으로 저자가 펼치는 주의 주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스스로의 모습에 크나큰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기에 작품 읽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나마 작품 후반부에 문제의 작품요약분이 나와 있어 어느 정도 감을 가지고

독서에 임했으나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솔직히 한계가 있었고, 답답했다.

참고로 나는 이제까지 르네상스와 관련된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해 그나마 작품에서 특정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관련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해당 내용과 상황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그것이

작품을 읽는 내게 조금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의 작가 '르크레티우스'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자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

이라는 문구 이 문구말고도 그런 내용이 곳곳에 숨어 있다 -를 앞에 두고는 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를 놓고 고민할 때는 심히 마음이 복잡했고 마음이 심란했다.

그 아쉬움은 책을 덮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작품에서 중언 부언되는 부분을 수직적, 수평적으로 연계시켜 해석하기에는 나의 지적 수준의

한계로 인해 심도 있는 사유나 분석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주요 부분의 앞뒤를 나름대로 엮어서

지적 수준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라도 하라고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작품을 읽기는 읽었으나 뭔가를 남기지 못하면 나의 존재 가치가, 지적

수준의 초라함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 주인공인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로 활동하다 종교적인 사건으로 인해 교황이 실각하며

  비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책 사냥꾼'으로 활동하게 된다.

  (직업은 요리사, 세탁소, 장의업자 등이 있을 터인데 하고 많은 직업 중 그가 왜 책에 집착했는

   지는 뚜렷이 나와 있지를 않아 독자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작품 중간에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관점일

   뿐 그가 본격적인 책 사냥꾼이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오래된 유서 깊은 수도원 등을 찾아다니며 '양피지''파피루스' 등에 기록된 여러

  고문서를 발굴하는데, 수도원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문맹률이 70%에 달하고 있어 책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곳이 수도원일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도원이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에 관심을 가진 집단이라는 것은 수도원의 회칙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6세기에 작성된 '성 베네닉투스'의 수도원 회칙에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성 베테딕투스는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독서로 인해서 어떤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선의의 질문

  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까지 지냈음에도 불굴하고 당시의 수도사들을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고 수도사가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몽땅 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후원자인 '니콜라 니콜리'에게 쓴 편지에서 포조는

  "나는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좋은 품성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제의 길을 택한 후에 탐욕스럽고 나태해지며 방탕하게 타락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수도원을 드나들고 교황의 비서까지 역임했음에도 끝내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하며 그렇게 된 배경에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교황청

  사무국은 위험천만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고 끝내는 '부잘레(Bugiale)'

  , ‘거짓말 공작소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또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도원은 믿는 자들의 모임이나 종교인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작업장이고, 교황청 사무국은 인류의 사악함이 빨려 들어오는

  하수구'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당시 사회 분위기상 종교를 갖지 않고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교황의 비서로서 활동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끝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살면서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행동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손가락질 받고 있는

  많은 부도덕한 종교인들은 정말 이 대목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포조가 출세해 보겠다고 결심하며 발을 들여놓은 도시는 피렌체였으며 그가 출세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은 손글씨였다. 그는 당시 카롤링거 왕조풍의 필기체를 변형시켜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전역을 뒤흔든 강력한 문화적 흐름에 대한 창의적 반응의 하나였다.

  그의 글씨체는 '레테라 안티카(lettera antica), 즉 고대의 글씨체라 불렀다.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

 

- 수도사들은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을 것이다.

  '키케로''국가론'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어서 발굴된 글이다.

    

- '루크레티우스'란 누구인가?

  성 히에로니무스가 작성한 초기 기독교 연대기 기원전 94년 항목에 시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탄생, 그는 사랑의 미약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글을 썼고

  일부 작품들은 키케로에 의해 개작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이었다.

  기원전 167, 로마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를 패망시키고 많은 전쟁

  전리품을 갖고 돌아와 전부 국고에 귀속시켰으나 개인적으로 챙긴 것은 사로잡은 군주 소유의

  도서관 장서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후 아밀리우스의 뒤를 따라 부유한 로마인들 사이에 큰 개인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 점차 유행처럼 번졌다고 하며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첫 공공도서관이

  '아시니우스 폴리오'에 의해 건립되었고 4세기 무렵까지 로마에 총 28개의 공공도서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집에 조상의 가면을 보관하는데 특별히 기념할만한 행사가

  있을 경우 그 가면을 직접 쓰기도 했다고 한다. 도서관의 조각상 역시 죽은 자의 영혼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표시로서, 책을 통해서 독자가 떠올릴 수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은 지금껏 존재해온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가리켜 더 이상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원자(atom)'라고 불렀다.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

  혐오의 형태를 수반했다. 또한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의 전통을 버린 자들을 가리켜 아피코로스(apikoros), 즉 에피쿠로스 학파라

  불렀다.

 

-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헤르쿨라네움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과 이집트 옥시린쿠스의에서 발굴한

  파편들이 지금까지 실물로 전해지는 고대 책의 전부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은 모두 원본이 저술된 시대와 장소,

  문화와는 동떨어진 후대에 만들어진 사본이다.

 

- 책들이 물리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대부분 기후해충탓이었다.

  책벌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책장에 삼나무 기름을 바르는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데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책을 계속해서 읽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또 읽다가 닳으면 더 많은 사본을 만드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로마에서는 리브라이(libraii)’라는 복제 기술자와 스크리바이(scribae)’라는 필사가로 분화가

  일어났으며 부유한 로마인들은 친구들에게서 빌려온 책을 필사하기 위해 개인 사서와 서기를

  고용하는 일이 흔했다.

 

- 고대의 최대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어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과학자와 시인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고 전성기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최소 50만권 이상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물관(museum)은 유물의 수집과 전시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력에 의한 성취를 상징하는

  9명의 무사(mousa) 여신들에게 헌정된 일종의 신전이었다.

 

- ‘페트라르카는 평생 동안 열성적으로 진지하게 영적 성찰을 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는 파괴적인 무관심 속에 부서지고 사라져가는 고대 이교 문명이 남긴 문물의 표현력

  아름다움, 도전 정신을 거의 선교사 같은 열정으로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고대 문헌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집착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관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력한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른바 인문학(studia humanitatis)' ,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이들 언어로 된 문헌의 습득을

  강조하고 수사학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

 

- 페트라르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총리인 '콜루치오

  살루타티'였다.

  그 역시 페트라르카와 같이 파묻혀 있는 사라진 과거에서 응축된 힘을 느꼈고, 고대 문화의

  흔적을 찾기 위한 학문적인 연구를 했다.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진 인물이 또 있었으니 그는

  '니콜로 니콜리'였다.

  니콜리는 인문주의자 스승인 살루타티나 친구들 이상으로 고대 로마의 유산에 빠져 있었으며

  고대 유물을 예술품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니콜리가 고대 조각상보다 더 열광한 것은 이었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소제목 없이 6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다양한 주제가 얽혀 있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데 15세기에 만들어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필사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50권이 넘는데 활자 인쇄술이 상용화되자 인쇄본의 서문에는

  보통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 신의 섭리와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두 개의 기둥으로 유토피아의

  저자 '토모스 모어''포조'에 의해 100여 년 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된 이래 가장

  일관되고 지적으로 이 시를 수용했으나 동시에 시의 기둥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세심하게 그

  핵심을 제거한 셈이다.

  모어는 자신이 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우연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은 체포해서

  노예로 만들었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처음 발표된 이래 무신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정통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스러움 그 자체로 생각

  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나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그의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2)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3)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4)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5)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6) 사물은 일탈의 결과로 태어난다

  7)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8)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9)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10)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11) 인간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12) 영혼은 죽는다

 13) 사후세계는 없다

 14)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15)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16)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17)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18)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19)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20)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 '조르다노 브루노'가 출현하여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대해 '그의 지각과 이성의 빛은 저 진실의

  회랑의 문을 열어젖히게 했다. 이제 지극히 성실한 탐구라는 열쇠로 그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해

  졌으니 그는 덮이고 가려져 있던 자연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두더지에게는 눈을, 눈먼 자에게

  는 빛을 주었으며....복잡한 속내를 감히 표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벙어리의 혀를 풀어

  주었다'등으로 그의 시를 옹호하다 화형당한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자 인간의 경험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글귀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있던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쿠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었다.

  특히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악몽을 통해서 도덕성을 강제하려

  는 태도를 경멸했다. 또한 그에게 종교의 공포에 대항하고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집중

  하며 종교적 광신주의를 경멸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몽테뉴에게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고 쾌락과 함께하는 삶을 살며 존엄 속에서

  죽음을 맞도록 이끌어주는 가장 확실한 지침서였다.

 

  고대의 철학적 사색은 현대 원자론은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나올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토머스 제퍼슨도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 세상은 오직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일

  뿐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했으며 특히 무지와 공포가 인간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데 도음을 받았다.

      

 

   [책에서 얻은 지식]

- 수도사들이 필사하던 작업 공간을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 했다.

  

- 고대의 책은 대부분 두루마리 형태로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예배를 드릴 때 고대부터 이어진

  두루마리 형태의 '토라(Torah)'를 사용한다. 그러나 4세기경 기독교인은 새로운 형태인

  코덱스(codex)라는 책자 형태로 돌아서게 된다.

  

- 최고급 양피지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벨룸(vellum)이라 불렀다.

  

- '다시 긁어낸'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팔림프세스트'라고 부른다.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책 한 권을 일컬을 때 흔희 스이는 '볼륨(volume, 약어 vol.)은 원가 말려 있거나 감겨있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볼루멘(volumen)에서 나왔다.

  

- 고대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막대를 움빌리쿠스(umbilicus)라고 불렀으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움빌리쿠스까지

  펼친다'라고 말했다

  

- 이교도라는 단어는 4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어원적으로는 '농민(peasant)'관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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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답하다 - 사마천의 인간 탐구
김영수 지음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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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사마천(司馬遷]은 기원전 145년 사람으로 조상 대대로 사관(士官)을 가업으로 해 온 사마 씨

(司馬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관인 아버지 '사마 담'으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20대 초반

에는 전 중국을 돌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이 때의 경험이 '사기'라는 역작을 만드는 풍부한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후세의 학자들은 분석

하고 있다.

한참 활동하던 시기인 49세 때, 흉노에게 패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한 무제의 심기를 거슬러

남성의 상징인 성기를 절단 당하는 최악의 치욕인 '궁형'을 받게 된다.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인격과 명예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사마 천은 궁형의 치욕을 딛고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史記130526,500자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이자 사마천이 상고 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갈무리한 세계사이다. 또 당시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역사 기술 방법

, 연대기, 연표, 인물, 주제별 논문을 종합한 중국 정사 서술의 표준인 '기전체(紀傳)'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집필한 사기史記는 단순히 왕과 권력자들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저잣거리

인심에서부터 광대, 동성애자, 자객, 장사꾼에 이르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그려 낸 문학적 성과도

대단한 작품이며 살아 있는 역사 교과였던 것이다. 아무튼 굉장한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다 읽고 작품이 던져 주는 메시지를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저자께서 드문드문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씩 추천한 것을 읽고 [사기]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인양 독후감을 정리

하려 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고 코끼리가 어떻다고 이야기한

것과도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답답하고 힘들다.

[사기]속에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인물이 있다.

저자께서도 서평 아닌 서평에서 말씀하시고 있듯이 작품이 전해주고자 한 '난세(亂世)()'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이 점은 나도 동의한다)

첫째는 "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살아남았고, 개혁에 실패한 나라는 사라졌다"

둘째는 "인재의 발굴, 양성, 활용"에 관한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사마천의 [사기]는 여러 인물과 사건 사고 분석을 통해 변화 및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을 읽으며 위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사기]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꼭 짚고 넘어 가고 싶은 인물이 있어 여기에 다시 한 번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인물들은 '제 환공' 시절에 활동했던 '환관 3인 방'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이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을 사는 직장 곳곳에 이런 이들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조직과 구성원을 힘들게 하고 나아가서는 회사를 도탄에 빠트리는 모습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춘추오패 중의 하나였던 제 환공의 충실한 신하 '관중'은 제 환공에게 총애하는 환관 무리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다. 그가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였던 환관 3인은 

  

"역아, 수조, 개방

    

이라는 인간들로서, 제 환공은 혜안과 능력으로 국가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충신과 간신을 분별치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3인 방이 제 환공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행했던 기기묘묘한 행동을 살펴 보면,

  

우선 [역아]는 요리사로 제 환공의 애첩 장위희가 이유도 없이 음식을 잘 먹지 못하자 별미

요리를 진상하여 애첩의 입맛이 돌게 하였는데, 애첩이 역아라는 요리사가 해 준 음식을 먹고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제 환공이 듣고 역아를 불러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

'사람 음식'이라는 헛소리에 필이 꽂혀 자신의 삼 개월된 아들을 삶아서 진상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수조'라는 인물은 권력자 측근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성의 상징인 생식기를 잘라 스스로 환관이

된 인물이며,

'개방'은 오로지 나라와 왕만을 위한 충성심에 개인적인 일 특히 가정까지도 포기해 가면서 집과

가정을 완전히 내 팽개친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삼인의 환관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관중'은 제 환공에게 말도 안 되는 방법과 이유로

요리사와 환관이 된 이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어떤 짓을 할지를 모르니 이들을 멀리 할 것을

간곡히 간청하나, 제 환공은 이를 무시하고 끝내 이들을 곁에 두었다가 말년에는 이들에 의해

궁궐 내에 유폐되다 시피하여 갇혀 지내다 굶어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이들은 끝내 제 환공의 죽음도 알리지 않다가 시체가 썩으면서 냄새와 벌레가 궁궐에 꼬이면서

제 환공이 죽은 게 들통나게 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 환공의 우매한 판단이 스스로를 옮아 매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사기]라는 작품은

이야기해 주고 있다.

나는 이들 삼 인 방을 보면서(작품에서는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조직

(회사) 내에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없는지 혹여나 내가 욕을 하며 있지만 그런 인간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 해 보게 된다. 사람의 일이라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지금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어느 순간 나 역시 망각의 동물인지라 어느 위치, 높은 자리에

오르는 순간 눈이 헷가닥 뒤집혀 작품 속 환관들처럼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부단히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내가 욕했던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둘째고 내가 그런 자리에나 오를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사기]라는 작품 전체를 다 읽을 수도 있겠으나 - 아무 것도 안 하고 생업을 포기하고 작품

읽기에 몰두한다면 -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 방대한 작품을 무슨 전문 연구가도

아니고......

아무튼 시간을 내서 전체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기본에 관한 것''대인 관계''인화'관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면 꼭 섭렵해 볼 것을 다짐해 본다.

 

작품을 통해 본 지식들

- 사기는 130, 글자 수는 526,500자에 이르고 이를 세분하면 본기(本紀), (), (),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런 역사서 체제를 기전체(紀傳體)라고 부른다.

  · 본기(本紀)는 황제에 관한 기록, · ()는 연표

  · ()는 국가제도와 문물에 관한 전문적인 논문 · 세가(世家)는 황제를 보필했던 인물

  · 열전(列傳)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 ()자에 나무 목()자를 붙이면 억울할 왕자가 된다.

  무엇인가 잘못 적용시켰다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 '사마천'은 죄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변신시켜 존재해 왔는데 '()'자에

  작대기를 하나만 그으면 '()'씨가 되고, ()자에 이수 변()하나만 붙이면 '()'씨가

  되어 오늘날 이 두 성은 사마천의 후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주나라 포왕이 '포사'에 빠져 나라가 망하는 데 여기서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춘추오패라 함은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나라 목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 제 환공의 인사정책을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정료지광(庭療之光)'으로 이는 인재를 끌어

  들이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 즉 궁정 뜰에 횃불을 환히 밝히고 24시간 개방했다는 이야기다.

- 춘추시대의 정치와 외교를 아우르는 명분은 '존왕양이'로서 이는 주나라의 천자를 떠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 진 문공과 개자추로 인해 '단오'라는 날이 생겼다.

- ‘오자서의 일가를 무참히 짓밟은 초나라 평왕 시절의 '비무기'는 증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사건을 획책한 희대의 간신이다,

- ()나라 헌공이 괵나라를 정벌하러 갈 때 우나라에게 길을 내어 달라고 한다.(가도벌괵)

  그러나 우나라 대부 '백리해'는 이를 결사코 반대한다. 그런 '백리해'초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는 데, 진나라 목공이 '공손지'라는 참모의 건의를 받아 들여 숫양 가죽 5장과 교환하여 그를

  진나라로 데려 오면서 번성기를 누린다.

- 초나라 장왕은 말을 무척 좋아했다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있었다.

- 중국의 식객 문화는 문인을 시스템적으로 양성하는 데 일조를 하였는데, 전국 시대의 4대 식객

  은 맹상군, 평원군, 위공자, 충신공이다.

- 기원전 522년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한 기원전 473년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햇수로 50년을

  이 기간을 오월춘추의 역사라 한다.

- 진시황릉은 평지에다 흙을 날라 봉분을 쌓았다. 진시황릉 이전의 제후나 주나라 왕은 평지에

  묻었다. ,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진시황 때부터 봉분을 만들었는데 평지에 흙을

  쌓아 산처럼 만들었는데 이를 '이릉위산(以陵爲山)'이라 한다.

- 진승은 중국 최초의 농민 봉기군 수령으로 진나라가 멸망하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

  그가 한 말 중 명언 "황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이다

- '사기'에는 동중서에 관한 이야기가 한 줄도 실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몸 보신에만

  급급해 인격적으로 높이 칠 것이 없으며 문장 또한 황제에게 아부하는 가식 투성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 정나라의 '자산'이라는 대부는 공자보다 30년 연상으로 공자가 존경하던 인물이다.

  그는 세발 달린 솥인 정()에 제정한 법을 새겨 주조했으며 이것을 관청 문 앞에 세우고 누구나

  법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하며 왕족 집안 출신으로 개혁 정치를 밀어 부쳤다고 하며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여론과도 소통의 길을 열어 두었던 열린 가슴의 정치인이었다

- 외거불피구 내거불피친(外擧不避仇 內擧不避親) 이라는 말이 있는 데 이는 외부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되 원수라 해서 피하지 말고 친한 내부의 인사를 추천하되 친척이라고 해서 피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인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말이다. (진나라 도공 때 '기해'라는 사람의 말)

- ()란 옛날 군대가 보통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인 30리를 말한다.

- '운명(運命)'은 움직일 운()자를 쓰는 운명이기에 즉, 바꿀 수가 '있는'것이나 본디 '(宿)'자를

  쓰는 숙명(宿命)은 바꿀 수가 없다.

- 중국은 동서로는 시차가 4시간, 남북으로 기온차가 70도 정도 난다.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100년을 살려거든 덕행을 베풀라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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