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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는 자 - 익숙함에서 탁월함으로 얽매임에서 벗어남으로
최진석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평점 :
추천 권유도 6
나이가 들면서 가벼운 문학 작품이나 대중적인 주제를 갖고 이야기하는 작품보다는
인생과 삶의 깊이를 더하는 작품을 자주 접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문학이나 대중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나름 읽었다고 느꼈기 때문이기
보다는 그 외의 부분을 너무 도외시하는 독서를 해왔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형성된 나의 사고방식 스타일이 너무 편협되고,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듯한 느낌이 들어 변신 차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인데 내가 무슨 사회운동가이거나 시사평론가라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분석하고 준비해 보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고는 있지만 하루하루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신념 속에서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인데..... 힘들다.
내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 백편의 칼럼과 한 방면의 대가들께서 기고하신 신문의 주요 기사를 스크랩 해 놓은 자료가 있는데 아런 자료를 묵히는 게 너무 아까워 최근 개인적인
비용을 들여 이 글들을 모아 작은 글 모음집을 제작 지인들과 후배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데 해당 작품 속에 반드시 들어가 있는 저자 중 한 분이 바로 ‘최진식 교수’다.
학창 시절 ‘철학’을 유독 어려워했던 나이든 내게 방과후 나머지 공부를 시켜 주는듯한 교수님의 말씀이 항상 새로워 가까이하려 노력하고 있던 중 저자의 해당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구매했다.
해당 작품을 구매해 읽고 있는데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지인이 내게
‘당신은 나름 착실한 기독교도로 알고 있는데 불교에 관한 그 작품을 왜 읽느냐?’
라는 수준 낮은 질문을 듣는 순간, 냄새나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난장치는 인터넷 방송에 나와 자기가 회의 도중에 상대방이 자기 말을 잘 안 들어 퇴장 명령을 내렸다는
무용담하는 모습과 어느 마약 중독으로 구속되는 야구선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속으로 아주 크게 이야기했다.
‘지랄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이다.
● 본 작품은 ‘반야심경’의 지혜를 탐독하는 불교의 경전이면서 만물의 형성 원리를
다루는 동시에 삶의 태도에 관한 철학서이다.
즉, ‘익숙한 이곳에서 새로운 저곳으로 건너가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건너가기입니다. 건너가기를 행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건너
가기를 부단히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무엇도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성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그러한 성질인 것은 없다’라는 말이다. 즉 본무자성(本無自性)
이라는 말을 기호로 나타낸 것이 공이다.
무엇도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성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없는 것에서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관계를 맺고 얽혀 있을 뿐.
다시 말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은 없고, 오로지 관계 맺고 엮이는 방식에 따라
잠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이를 불교의 용어로 인연생기(因緣生起)라 한다.
‘인연생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고, 무언가에 미치는 영향이 관계에 따라
다른 것들에도 영향을 끼친다.
작품을 통해 뭔가를 느끼고 대오각성하여 책을 덮는 순간부터 변신을 꾀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작품에서 언급된 여러 사항을 금과옥조로 여겨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고 점검해 보려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할 것이다.
나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약해 맨 후자의 이야기가 나를 지칭한다 할 것이다.
하여간 불교에 관한 것이든 기독교에 관한 것이든 나아가 천주교에 관한 것이든 간에 해당 종교의 기본 교리에 관한 것은 아무리 읽어도 어렵고,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체력과 신체적 능력이 보통 수준인 평범한 인간이 죽어라 백 미터 달리기 열심히 뛰고 와서 편히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철학자(종교연구가)가 나타나 자신의 종교에 관한 설명을 갑자기 펼쳐도 이를 듣는 사람이 해당 종교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는 모든 종교 이야기는 너무 어렵다.
[1장 인간의 소명을 깨닫고, 세상의 진실을 마주한다]
- ‘경전’이란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한다.
- 중국 고전을 보면 어떤 책은 ‘순자’, ‘한비자’ 등과 같이 경을 붙이지 않는데,
어떤 책은 ‘도덕경’, ‘시경’ ‘역경’처럼 끝에 ‘경’이라는 글자를 붙여 부른다.
‘경(經)’이라는 글자에는 당대의 모든 이가 숙지하고 따르면 좋겠다는 의미가 함축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경’에는 시대적 비전, 이데올로기의 기준점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자’의 경우 ‘도교’가 당나라의 제일 이데올로기 즉, 통치 이데올로기로 지정되면서 그 위상이 달라지는 데 그 명칭이 당나라 당시 ‘남화진경(南華眞經)’으로 바뀌게 된다.
- ‘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어 중 대표적인 단어가 ‘경영’으로 영어로
‘management’라 하는데, ‘man~~’의 의미는 ‘손으로 무언가를 다루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manage의 의미가 점차 함축성을 지녀서, 나중에는 비유적으로 말고삐를
잡고 말을 타는 것, 고삐를 잡고 말을 부리는 행위를 뜻하게 된다.
즉, 경영(manage)이라는 단어 근원은 ‘고삐를 잡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 하는데,
고삐는 ‘철학(philosophy)’ 혹은 이상(vision)’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영은 비전과 꿈을 실현하기 위한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에 따라 비전과
꿈을 세상에 펼치는 일을 뜻한다.
---> ‘반야심경’을 읽고 고삐를 잡지 않고 현실만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며 내가 내 삶의 주체자로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나의 경은 무엇
인지, 나의 고삐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불교에서 깨달음의 가장 높은 단계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한다.
- 삶 속에서 각자의 나 자신을 찾고 지켜야 하는데, 내가 나의 신이요 붓다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이다.
- 게으른 채로 쉬운 길을 가면 결국 타인의 행복을 거들 뿐, 자신의 행복을 쟁취할 수
없다.
-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또 우리의 삶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소명을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소명은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소명은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
그것을 이루지 않고는 찝찝해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소명을 아는 자는 자신을 아는 것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이다.
- 무엇을 진실로 안다면, 그 앎을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 진실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 변화로 말미암아 달라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 앎이 지식으로 멈추지 않고,
내 삶과 자신에게 변화까지 일으킬 수 있는 ‘나’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가깝다.
-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기를 ‘해탈’이라 하고, 고통의 순환 고리에서 돌고 돌아 고통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 하며, 끝없는 생사의 순환을 끊는 것이 깨달음이며
‘열반’이다. 윤회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업’을 쌓기 때문이다.
- 차유고피유 차유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有故彼生 此無故彼無
此無故彼滅)
즉,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서 저것 또한 생겨난다.
이것이 없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실상을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의 축약이다.
-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형식은 본질이 아니라, 관계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본질적인 성질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기들의 관계로
존재한다. 세계의 실상을 아는 것이 해탈의 출발점인데, 세계의 실상을 한마디로 축약
해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인연이고 관계인 것이다.
- 소승(小乘)이라는 말은 종교개혁을 감행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개혁가 자신들의
이론을 대승(大乘)이라 칭하고,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기존의 이론을 소승이라
칭한 것이다. 대승 운동의 핵심은 소승에서 선명하게 구분한 불국과 속세 사이의
단절을 해소하는 것.
- 대승에서 수행자의 최고 경지는 보살의 경지이다. 보살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
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것으로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사트바(sattva)’는
‘대중’을 일컫는다.
- 붓다가 바라보는 실상은 세상이 ‘인연’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인연’은 다양한 계기들이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의자도 여러 조건의 연합으로 존재
한다는 뜻이다. 인연에 따라 다양한 계기들이 잠시 연합하거나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유(假有)’라 한다.
--->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특정한 성질이 없다.
대신 연합하고 관계 맺는 형태, 즉 인연에 따라 잠시 그것으로 있을 뿐이다.
- 공이라는 개념은 실제 있는 어떤 것의 상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논리적 개념일 뿐.
붓다가 보는 세계의 실상은 한마디로 공인 것이다.
---> 공이라는 글자가 불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것처럼, 다른 동양의 경전들에도
핵심적인 개념이 있는데, 바로 도(道)라는 글자이자, 기호이다.
- ‘노자’에서 중심적인 지위가 유무상생에 있고, 그것을 기호화한 것이 도(道)이듯이
‘주역’에서는 중심적인 지위가 일음일양에 있고, 그것을 기호화한 것이 도(道)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중심적인 지위가 본무자성에 있고, 그것을 기호화한 것이 공(空)인
것과 같은 구조다.
[2장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니, 반야의 지혜를 딛고 저쪽으로 건너간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에서 ’마하‘는 ’크다‘라는 뜻이고,
’반야‘는 지혜라는 뜻이다.
정확한 해석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게 돕는, 반야의 지혜를 담은 핵심 경전‘
---> 산스크리스트어의 ’마하‘는 ’현상을 넘어 추상적인 의미를 포함한, 우주적 차원의
의식까지도 전부 포괄하는 차원에서 크다‘라는 의미이다.
---> 심경이란 핵심적인 경전이라는 의미
- ’반야‘의 지혜란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해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을 넘어,
’가장 높은 차원에서 세계 자체를 통찰하고 관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의미
- 건너가는 태도 자체가 ‘바라밀다’이다.
- 인간은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면서 얻어진 능력을 지적능력이라 부르고
이것이 쌓여서 더 나은 인간이 된다.
- 계율이나 규칙을 지키는 일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깨달음에 이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으로 좀 더 진일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규칙을 정해서 부단히
반복해야 한다.
- ‘반야바라밀’은 세계가 본래부터 본질을 근거로 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연으로 연합된
무본질의 공(空) 이라는 것을 깨닫는 지혜이다.
[3장 더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정확히 보기 위해 상을 짓지 않는다]
-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어떤 특정한 관점, 창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거나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인간은 세계를 소유하거나 지녀야 힘이 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설명하고 해석해야 힘이 나는 존재이다.
- 본질이란 우리가 철학적인 높이에서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할 때 사용하는 약속된
개념.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며 ‘본질적인 대화를 해 보자’라고 할 때의
‘본질’과 철학적인 전문 용어로 ‘본질’을 사용할 때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일상에서의 ‘본질’은 근본적인 의미나 진실이라는 맥락이지만 철학에서의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게 해 주는 성질’을 뜻한다.
- 모든 명상이나 마음 비우기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둘 수 있게 하기 위한 단련이다.
- 절에서 많이 듣는 말이 아마 ‘상을 짓지 마세요’와 ‘성불하십시오’일 것인데,
이는 자신을 지배하는 틀이나 이념이나 정해진 관념을 짓지 말라는 의미로 ‘비운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을 짓지 않고 바라본다는 의미로
이는 상에 갇히지 말자고 하는 이유는 상에 갇히면 멈춰 서서 굳어가며 쉽게 진부해
지기 때문이다.
- 흔히들 ‘무소유적인 청빈한 삶’이라고 하면서, 무소유의 삶을 바로 청빈한 삶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그런데 ‘청빈’과 ‘무소유’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없다.
‘무소유’는 갖지 말라, 쌓지 말라는 뜻의 ‘존재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고, ‘소유’는
세계를 자기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소유적 태도’이다.
- 계율을 벗어나 계율에서 정한 것과는 다른 행위도 하면서 수행의 외연을 넓히는 것을
‘만행(萬行)’이라 한다.
-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서기 67년, 한나라 때로 외래 종교인 불교는 중국에
들어와 중국 본토의 종교인 도교와 장기간의 격한 이론 투쟁을 거친다.
불교는 이론 수준이 낮다고 도교를 공격하고, 도교는 불교를 본토의 것이 아니라 공격.
불교는 중국화에 성공하여 화엄종이나 선종 등과 같은 중국적 종파를 형성하고,
도교는 이론화에 성공해 중현학(重玄學)을 완성한다.
--->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인 리(理), 기(氣), 태극(太極), 성(性)
등은 모두 도교의 것이다. 중현학의 체계를 유학에서 수용한 형태가 바로 주자학
이고 성리학이다.
---> 도교가 불교 이론을 대폭 수용해 이론의 고도화를 이뤄 중현학을 정립하고,
유학은 도교의 중현학을 그대로 덧입혀 신유학을 정립하였다.
[4장 뒤집힌 생각을 바로 잡아, 가장 탁월한 길을 선택한다]
- 인간은 이론이나 진리를 통해서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통해서 진리와 이론을 건축하는 존재다.
-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상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이 새상의 그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데
이는 모두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은 고통도 집착도 의미 없음을 깨닫고 깡그리 소멸시켜서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 ‘열반’은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인데, 원래 의미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불을
끈다는 뜻으로 ‘탐진치’로 일어나는 번뇌와 고통을 잠재우고 도달한 이상적인
상태인데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적정(寂靜)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열반적정에 도달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론이나 진리를 통해서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통해서 이론과
진리를 만드는 존재
-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만 무언가와 접촉할 수 있다.
- ‘선한 영향력’이란 말은 분명 아름답지만, 이 관념이 사람의 시야를 매우 제한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 경쟁이 없는 세계는 없습니다. 경쟁이 좋냐, 나쁘냐 정도의 촌스러운 논의가 아니다.
경쟁 구도에서 도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5장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뿐이다]
- 당신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기준에 갇혀 있는 한, 당신은 힘듦을 벗어날 수 없다.
- 세계를 대립적으로 보도록 형성된 인식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며 대립적인 틀
자체를 건너가면, 한 차원 높은 단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나’가 있다. 이를 무아(無我)
라 한다. 무아는 ‘나’를 부정하는 문장이다. ‘나’를 부정하는 까닭은 나를 허무와 부정성
속에 담그기 위함이 아니라, 자아와 주체가 가진 상을 철저하게 부정하여 진아(眞我)
즉, 참된 나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 진리를 어떤 개념에 묶은 채로 진리라고 떠받드는 순간, 인식은 그 개념의 틀에
갇히고 만다.
- ‘보리살타’를 줄여서 보살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대승 운동이 일어난 후, 공의 논리를
체현한 이상적인 형상의 대승적 구도자이다.
- 두려움은 대개 마음속에 상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정해진 마음이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 즉, 상을 지으면 걱정과 두려움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형성될 때의 세계와 그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적용할 때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인데, 과거의 이론과 이데올로기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것들을 고집하는 형국이 전도몽상이다.
-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살아내려는 태도 그 자체가 반야의 지혜다.
- 신채호 선생은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희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희가 되지 않고 주희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의미는
’아제‘란 ’건너간다‘라는 의미이고,
’바라아제‘는 ’저길 건너간다‘는 뜻이며,
’바라승아제‘는 다 함께 건너가세이다.
즉, 건너가기를 말하는 경전이지 건너가서 도달한 그곳을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