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 유대 기업은 현대 중국의 탄생에 어떻게 기여했나
조너선 카우프만 지음, 최파일 옮김 / 생각의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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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미국과 패권 전쟁 중이다.

중국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분야 중 하나가 유대 금융 세력의 중국 금융 시장과 외환

시장 공격이다그럼에도 중국은 금융 시장 개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이다.

 

중국은 금융 시장 개방을 위해 2020년 적격 외국인 기관 투자자에게 파생 상품 거래를 허용했다. 뒤이어 원자재, 곡물, 지수옵션 등 41개 파생상품을 추가로 개방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국은 외국인 기관 투자자에게 주요 주식 지수 관련 파생 상품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이유는 유대 금융 세력이 1990년 초 파생 상품으로 일본 주식

시장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 기관 투자자들은 닛케이 지수에 터무니없는 버블이 끼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일본에서는 닛케이 지수 상승에 베팅하는 파생 상품을 주로 판 반면,

뉴욕과 런던에서는 하락에 베팅하는 파생 상품을 많이 팔아 일거에 일본 주식시장을

폭락시켰다물론 자산 시장의 버블이 폭락의 주원인이지만 폭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유대 금융 세력이었다.

이후 닛케이 지수는 20년 간 하염 없이 추락했다. 1989년 말 38915에서 200937054까지 주저앉았다.

미국의 대외정책, 중국과의 패권전쟁을 주도하는 국무장관과 국가정보국장, 재무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중국이 미국 유대인의 동향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국 상하이에 몰려온 유대인들

 

중국인과 유대인 간에는 애증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많이 기여했다.

반면에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당시 유대 기업을 이끈 대표적인 가문이 사순(Sassoon)가와 커두리(Kadoorie)가였다.

---> 해당 작품은 두 가문이 대륙에서 중국 공산당이 완성되는 단계에서 중국을 대상

       으로 펼친 밝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활약상 그리고 그 양 가문이 어떻게 중국

       으로부터 용도 폐기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즉, 중국 애증의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 ‘커두리가와 서순가는 중국 공산당에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하자,

   커두리가는 중국 남단의 영국 식민지 홍콩으로, 서순가는 런던과 바하마 제도

   심지어 텍사스주 댈러스까지 도망치지만 그들은 상하이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서순가는 세계가 불황에 빠져들고 있던 1930년대 중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했으며 중국인 한 세대를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 육성하며 오늘날 중국의 

  놀라운 성공을 위한 길을 닦았다.

  커두리가는 홍콩을 중심으로 지역을 변모시켜 21세기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주역이다하지만 1949년 공산당이 승리했을 때 양 가문 모두 거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 중국에 커두리가와 서순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상하이의 과거는 중국의 미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물론 두 가문은 제국과 식민주의의 수혜자였다. 서순가가 부를 축적한 토대였던

  아편 무역은 수 백 만의 삶을 망가트렸다

  서순가와 커두리가가 얻은 막대한 재산을 저임금과 불공정 경쟁 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대두와 승리를 부채질했다. 양 가문은 상하이를 착취

  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지인을 활용해 경제 호황에 불을 붙였다. 중국이 경화된 봉건

  사회를 탈피하고 현대적인 산업 사회로 진입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도시에서 과감한 사업의 꿈을 추구할 곳을 찾아냈다.

  상하이를 그리고 중국을 탈바꿈시킨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양 가문은 퓨즈에 불을 

  붙이는 일조를 했다.


 이후 1895년부터 10년간 러시아 유대인들이 대 박해(포그롬)와 공산혁명을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30년대 말 상하이 유대인 수는 4천 명을 넘어섰고 

유대 회당이 7곳이나 되었다.

* 중국과 유대인 사이에는 애증의 역사가 존재한다. 1842년 상하이 개항 때 인도에 

  살면서 중국과 거래하던 유대인 700여 명이 상하이로 건너 왔다. 이들이 영국, 인도,

  중국 사이의 삼각무역을 주도해 상하이의 국제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인도산 

  아편을 수입해 중국을 해롭게도 했다.

  1930년대 말에는 상하이의 유대인 수가 4천 명명을 넘어섰다.

 

중국에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1842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까지 

107년간이 외세에 시달린 치욕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일본도 대륙 침략에 가세했다.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했고 

1905년 러일전쟁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유대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거의 패전 상황에서 군비 마련이 시급할 때, 뉴욕의 유대인 금융가 야곱 시프가 거액의 전쟁채권 판매를 선뜻 주도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일왕이 야곱 시프를 초청해 최고 훈장을 수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1930년대에 유대 국가를 만주에 건설하자는 국제적 제의를 했다.

일본은 유대 자본을 활용해 만주를 개발하고 이들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사실 그즈음 만주에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만주 이주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00년대 초 러시아는 뤼순항을 점령하고, 만주 개발을 위해 러시아인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했다

그러자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와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만주로 이주해 왔다. 이후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피해 온 유대인들이 

합세했다그 뒤 철도 건설 붐과 은행 개설로 유대인 숫자는 더 불어났다.

그 무렵 하얼빈이 대표적인 유대인 도시였다. 상업 지역의 80%가 유대인 소유였다고 한다하얼빈은 20세기 초 동북아의 대표적인 국제도시였다. 19국의 영사관이 

하얼빈에 들어와 있을 정도로 인종 용광로였다

당시 하얼빈의 외국인 인구는 도시 인구의 절반이 넘는 19만 명이었다이 중 2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 가문이 하얼빈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 더 많은 유대인이 몰려온 건 히틀러 등장 이후이다

193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극심한 사회 혼란을 불러왔다. 이 틈을 타 1933년 

나치 정권이 탄생했다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열등한 

인종을 청소해야 한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 차별이 가해졌다.

1938년에는 반유대 폭력이 시작되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을 가두는 게토가 다시 만들어지고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유대인의 탈출을 도운 동양 영사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유대인들은 탄압이 거세지자 탈출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갈 곳 잃은 유대인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자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

19387월 프랑스 에비앙에 32국 대표들이 모여 유대인 난민 문제 처리를 협의했다. 유대인들의 딱한 사정에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2차 대전 직전 각국의 민감한 국제관계와 국익 앞에 어느 나라도 선뜻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회의는 소득 없이 끝났다히틀러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유대인 탄압이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며 고무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유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 오히려 동양 외교관들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주재 중화민국(현재 대만) 영사관의 허펑산 영사는 도움을 청한 

유대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가장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상하이로 2~3개월 만에 거의 4000명을 도피

시켰고 1940년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 영사관 스기하라 지우네영사도 이웃 폴란드에서 피신해 온 유대인들에게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해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렸다.

이렇게 해서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피란 온 2만여 명 등 25000명의 유대인들이 상하이 일대에 거주했다. 어느 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난민들을 중국은 받아들인 것이다.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그제야 이들을 받아들여 중국 내 유대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으로 떠났다. 지금 상하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2000명 남짓이라 한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1969년 일본 영사에게 훈장을 수여해 고마움을 표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상하이시에 감사를 표하고 2000년에 야드바샴(이스라엘을 도운 의인의 전당)’에 허펑산을 동양인 최초로 등록시켰다. 대만 정부도 2015년 이미 고인이 된 허펑산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출처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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