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6

 

작품에서는 총22분의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소개되신 분들은 살아계실 동안 세상으로부터 높이 추앙받았던 분도 계시겠지만 거의가

그 분들이 살아계실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다가 역사에 관심 있는 일부 개념있는

후손(?)들이 그 분들의 숨겨졌던 업적들을 발굴하면서 추앙받을 만한 분들이라고 후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대부분이 저자의 주관적 평가에

의한 것이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 모두가 완전히 합의한 인재(?)’라고 평가되는 그런

인물들은 아니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소개한 인물 중 작품을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요즈음

우리나라 돌아가는 형국과 끝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사를 보면서 유독

세 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인물은 남명 조식 선생이다.

이 분은 여러 역사관련 서적을 접하게 되면 꼭 거론되는 인물이다.

조식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활개치던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지만

거주지 인근의 단성현감 자리를 명종이 제안하지만 이를 사양하고 오히려 작심하고 주군

명종을 향해 재야 인사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하는데 이것이 [단성소(丹城疏)]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가 올려진 배경은 중종의 대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농단하면서 민심이 흉흉해

지면서 급기야 임꺽정의 발호와 왜구의 침략 등으로 국내외의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로

그로 인한 가장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목격하게 되자 조식 선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일갈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

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기며 왕에게 충언을 올리고 있다.

그는 또 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하면서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두 번째 인물은 백헌(白軒) 이경석 선생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3(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 별시에 급제

했으나, 이듬해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만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크게 받는 등 나중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는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활약하는데 이 때에 선생이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 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후대에 크게 문제가 된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린 당사자이기도 하다.

삼전도 치욕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종하여 심양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가기도 했던 인물이다.

당시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 : 조사해 답변함.)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 : 영구

히 등용되지 못함.)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는데 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

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

(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653(효종 4) 겨우 풀려나 관직에 재 등용하게 되었으며 1668(현종 9)

신하로서는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는다.

 

정치적 생애는 인조·효종·현종의 3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비문의 찬술과정도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하는데,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상소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경석이 글을 썼다.(인조실록)

 

이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로 비판하지

못했는데 이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문제적 인물인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부터 비문 찬술을 이유로 수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게 된다.

 

세 번째 인물은 잠곡(潛谷) 김육 선생이다

1605(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가지만 광해군 1에 동료들과 함께

올린 문건이 문제가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한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한다.

주요 관직에서 자신의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초들의 어려움을 해소

시켜주기 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벽온방 辟瘟方등을 편찬, 간행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지만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 해 물러앉는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영의정에 재 임명되면서 대동법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서

시행하는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1654년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근세라는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키워드는 '상품화경제'로 조선 후기

상품화 경제를 논함에 있어서 대동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 잠곡은 다음과 같은 조선후기 상품경제발달의 세 가지 결정적인 과제 모두에 기여해

그 중 두 가지를 성공시켰다. 1)대동법 전국 실시, 2) 동전 유통, 3) 원격지 상업 활성화

이 중 대동법은 말 그대로 그의 정치 생명을 건 대역사였으며,

동전의 유통은 효종에게 10년간 추진할 것을 허가 받고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나, 결국

효종의 지시로 결국 좌절되었다. 그러나 개성과 평안도, 울산 등지에서는 동전이 계속해

사용되었고, 1678년 묵제 허적에 의해 동전 유통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육은 1658년 세상을 떴으나, 1677년 경상도에서 대동법 시행을 갈망한다는 상주가

올라와 마침내 경상도까지 확장된다. 

 

세 분의 인물들이 행한 업적과 행동을 요즘 우리의 정치, 경제사에 대비해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별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큰 공감으로 다가설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 우리가 차선책으로 뽑았던 리더의 일탈된 행동으로 모처럼 찾아온 호기를 만난

비집권 세력과 세칭 잠룡(?, 웃기는 짬뽕들이다. 용은 무슨 용인가 지렁이들이지)들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벌이고 있는 봉숭아학당 수준의 비열한 정치공세와 오직 입으로만 나불

거리며 촛불 민심에 어떻게든 올라 타 보려는 저급한 야심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진정

국민과 민생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자들인지가 정말 궁금했다.

 

이런 이들을 보면서 모후에게 고아과부라는 기개있는 직언으로 고언을

올리던 조식 선생이 살아오신다면 또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총대를 메고, 글 배운 것을

천추의 한으로 삼으며 삼전도 비문을 적어 나갔던 이경석 선생과 민심의 진정한

어려움을 풀려고 노력했던 잠곡 선생이 살아 돌아오신다면 내 후손들이 이지랄하는

꼴을 보려고 그리 노력했던가?“라는 한탄아닌 한탄을 하시지 않으셨을까?

아무튼 이 시점에 나는 위의 세 분은 지금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참다운 관료상이자 진정으로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그런 시간이었다.

일개 범부(凡夫)가 외칩니다.

촛불은 우리들이 들겠으니 정치인 그들은 촛불대신, 머리띠를 동여매고 길거리에서

목놓아 외치지만 말고 자신의 자리에서 시시각각 조여오는 외국의 경제적 파상 공세는

물론 북핵문제를 포함한 민생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리더의 헛발질로 공전만하고

있는 우리의 현 상황을 하루 빨리 타개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정말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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