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조 (양장) - 이문열 중단편전집 2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 7.

 

본 작품 읽기에 다시 도전해 보았다.

과거 아무런 의미없이 저자의 지명도만을 믿고 작품을 선정해 읽었고, 단순히 책장을

넘기는 수준에서 작품을 접했었는데, 어느날부터 나의 서가 한모퉁이에서 자신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 줄 것을 요구하는 끊임없는 무언의 항의가 몇 년씩 계속되다 보니 손이

안 갈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읜 서예가 '고죽'석담 선생에게 맡겨진다.

석담은 '()'보다 '()'를 우선시 하는데, '()보다 '()'가 더 센 고죽의 작품

세계를 못마땅해 한다. 고죽은 스승과는 달리 보편적 원리로서의 를 인정하지 않고,

한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서예 역시 독특하게 추구되어야 할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서예가 다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스승과

다른 독자적 서예관을 추구해 간다.

중년의 나이에 스승과 대립하기도 했던 고죽은 스승이 죽은 후에 스승이 자기를 총애

했음을 알게 되고, 죽음에 임박하여 고죽은 자신의 작품을 회수해 불태운다.

그 불꽃은 자기 부정의 예술혼인 '금시조'를 확인하며 죽음을 맞는 작품으로 예술에서의

'보편주의''상대주의' 논쟁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위의 글은 공감하는 어느 평론을 그냥 옮겨 보았다)

 

붓 글씨를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이외에 배워 보지도 않은 내가 이 작품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작품을 읽으며 일전에 유사한 작품을 읽으며 서예가 , ‘냐 하는 점을 놓고 많은

번민 끝에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는 서로 통한다'는 결론을 얻었었는데,

본 작품에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확인하였다.

또 하나는 던 그것이 어떤 부류에 속하든 서예 그 자체를 놓고 가슴 깊은 곳으로

이해해야지, '이래서 , 저래서 '라는 논법은 문제가 있는 시각이라 생각한다.

서예를 놓고 를 논한다는 것은 마치 설탕을 놓고 당분이 몇%, 수분이 몇 %라는

식으로 분석해 설탕을 먹은 후 '나는 설탕을 먹었다'라는 이야기대신

'!, 나는 지금 수분 몇%와 당분 몇% 먹었다'라는 소리와 동일하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특정 사안을 놓고 분석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볼

때 본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밀히 접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것이

바로 절제된 '를 가르치는 것이요, 수분과 당분의 절묘한 만남을, 미각만으로 이해

시키려는 것이 바로 ''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어느 끝단만을 부여잡고 마치 전체를 본 듯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벗어난 저급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위의 글은 내가 지난 2007년 본 작품을 읽고 옮긴 독서일기의 한 부분이다.

지금 당시의 글을 읽으며 생각해봐도 아주 잘 쓴 내용은 아니지만 작품을 어느 정도 잘

이해한 부분이 있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십년이 흐른 지금 다시 작품을 접한 이유는 나의 책장에서 항시 나를 노려보며 뭔가를

내게 전하려는 작품으로 다가왔기 때문인데, 가장 큰 이유는 솔직히 아직도 '금시조

던져주는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당시 읽었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를

않아 -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는 하나 - 억울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서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 외국 출장길 내내 좋은 시간을 내게 마련해 준 작품이었다고 자평

하고 싶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별도의 색깔을 입혀 해석하느냐로 상당한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읽는 사람 마음이 아니겠는가?

 

작품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극단의 이념적 상흔과 관련된 아픔을 그리고 있는 사과와 다섯 병정이라는 작품은

나도 어린 시절 주위에서 한번 쯤 들었음직한 전설(?)같은 으스스한 이야기로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작품이었고,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고립감과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된 현대인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달팽이의 외출’, ‘제쳐논 노래’, ‘충적세 그 후그리고 이 황량한

역에서는 작품을 읽는 나를 잠시 잠깐씩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 작품이었다.

 

분호난장기’(선거관련)어둠의 그늘’(교도소 수용자들의 이면)은 단순히 웃어넘기기에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나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둠의 그늘속 또 다른 주인공인 권기진이라는 인간은 교도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그런 암적인 존재 - 작품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죄명만 갖고 예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기는 하나 - 로서 그런 인간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처단하지 못한다면 작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좌절만을 안겨 줄 것이고 이 사회와 나라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야기하는 우리나라를

헬 조선으로 부르게 하는 한 요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머지 작품(폐원, 제쳐논 노래)에 대해서는 다른 소회를 기록하기 보다는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여 별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을까 한다.

반면, 두 번째 작품인 방황하는 넋은 작품이 던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품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농악과 관련된 여러 용어들은 생경하여 여기에 정리해 보았다

- 삭자리 : ‘돗자리(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재료로 하여 만든 자리)’의 방언(경북).

- 봉당 : 주택 내부에 있으면서 마루나 온돌을 놓지 않고 바닥면을 흙이나 강회·백토 등을

            깔아 만든 공간.

- 걸궁굿(乞窮-) 일명 마당밟기굿·매귀굿·걸궁농악.

마당밟기굿의 하나로 걸궁농악이라고도 하는 걸궁굿은 정초부터 한 달 동안 동네집집을

   돌며 쌀과 돈을 얻어 동네 공동사업에 쓰기 위해 놀던 농악(네이버 지식백과)

- 판굿 : 걸립패(동네의 경비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식을 얻기 위하여 풍악을 연주했던

   무리)와 남사당패(떠돌며 노래와 춤, 풍물 연주, 재주 등을 연행하였던 집단)가 연행하던

   음악과 놀이의 종합예술

- 반삼채 : 경남농악(慶南農樂)에 쓰인 쇠가락의 하나. 일명 반삼차

- 강마진 : 농악십이차(農樂十二次)에 나오는 쇠가락의 하나로 신장(神將)을 부르는

                ()에서 연주되는 가락

- 금쇄진 : 농악십이차(農樂十二次)의 하나로 나오는 금쇄진은 원진(圓陣)을 치는 법

- 문굿 : 농악 연주의 한 절차로 한 집을 중심으로 연주되는 정내(庭內)굿의 한 절차.

- 상쇠(上釗) 농악대(農樂隊)의 한 구성원. 일명 상공운이라고도 하며 꽹과리 연주자 중

                   우두머리인 상쇠는 꽹과리 연주자 중 기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 고방굿(庫房-) 농악 공연 때 마당밟기굿의 한 순서로 어느 한 집을 중심으로 연주되는

                        정(庭內)굿의 한 절차다. 농악 공연 때 마당밟기굿의 한 순서.

- 뒤안굿 : 농악을 연주하는 걸립패(乞粒牌)의 고사굿. 일명 천룡굿어느 한 집의 행운을

                빌기 위해 걸립패가 농악을 연주하는 고사굿이 뒤안굿이다.

- 우조(羽調) : 판소리의 조에는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평조(平調)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중 우조와 계면조가 판소리의 양대 악조에 속하고 우조와 계면조의 중간

                     에 평조가 존재한다.

                     우조(羽調)는 서양 계이름으로 치자면 솔----미의 음계로 구성되며

                                         웅장하고 호탕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호기 넘치는 장면에서

                                         사용

- 도드리 : 국악에 쓰이는 장단

- 보허자 : 궁중 연례악으로 쓰이던 관악합주곡

 

작품을 읽으며 다가 온 문구들

 

[‘달팽이의 외출’]

- 결국 인간들은 모두가 이라는 각자의 껍데기를 지닌 한 마리의 달팽이다.

- 자기의 조그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담을 쌓지만 사실은 외부의 더 큰 세계를 잃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 황량한 역에서’]

- 그런 그에게 있어서 철로와 역은 전 생애를 일관한 근거 없는 애착의 대상인 동시에

   항상 열려 있는 영혼의 창이기도 했다.

 

- 우리가 감정의 과장에서 벗어나 그 본질 자체를 응시할 수 없다면 고독이란 죽음 그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슬픔이나 고통의 이유는 될 수 없는 것이다

 

- 사실 추억이란 우리들 기억의 광맥에서 떼어낸 한 덩이의 자연석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련과 가공을 거치는 동안에 엄청난 감상과 상상력이 끼어들어 실제와는 전혀 다른

   모조품이 만들어지고 또 원래의 것과는 엉뚱한 빛을 우리에게 던진다.

 

[‘어둠의 그늘’]

- 재판을 맡는 정의의 여신의 눈을 가린 것은 희랍인의 예지였을 뿐 땅 위의 법은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재판당할 자의 색깔부터 살폈다.

 

- 언론 스스로가 제4부를 자처하고 특권을 행사하려 들지만 도대체 누구로부터 수권을

   했는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나왔고 법관은 시험을 쳐서 자격을

   얻었지만 언론은 자임(自任)에 불과하다.(339)

 

- 어떠한 고통도 그것을 당하고 있는 순간은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언제나 그것이 지나간

  후에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 고통은 맞지 않은 구두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일단 우리의 발이 들어가기만 하면 점차로 그 괴로움은 잊혀

  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 괴로움을 다시 과장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언제나 이미

  그것을 벗어 던진 후의 일이다.

   엄청나게 제한된 자유도, 거친 음식도, 불편한 주거 환경도 그리고 무엇보다 격리의

   고독도 순간순간 사소한 불편 정도일 뿐 아무런 고통의 그림자를 동반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그곳을 끔찍한 곳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순간순간의 사소한 불편들이

   극단으로 과장되어 결합되기 때문일 뿐이다.

 

 

작품의 소회를 마무리하기 전, 작품 제목인 금시조(金翅鳥)’가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여기에 정리해 보았다.

금시조가루라라고도 불린다. 금시조의 깃털은 장엄한 보광(寶光)을 발하며 머리 위에 하나의 커다란 혹이 있는데 이 혹이 바로 여의주(如意珠)이다.

이 새의 울음소리는 슬프고 처량하다. 금시조는 매 끼니마다 한 마리의 용왕(龍王)500마리의 새끼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금시조는 죽을 때 허공을 아래 위로 7~8회 몸을 뒤집으며 날다가 금강륜산(金剛輪山)정상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금시조는 용(毒蛇)을 먹었기 때문에 몸 속에 독기가 많이 축적되면 그 독기로 자신의 몸을 태워버린다고 한다. 육신이 불타고 남은 자리에는 '가루라'의 심장만이 남는다.

그 심장은 파란 색이며 유리처럼 투명하다고 한다.

가루라 전설에서 금시조가 몸에 독기가 쌓여 그 독기로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자신의

'심장'만을 남겨 죽는 것은 소설 속에서 '고죽'이 그간 자신의 분신과 같은 자신의

'서화더미'를 태우는 장면과 깊은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금시조''영원한 예술의 본질'을 표상하는 전설의 신으로 '자신의 몸'을 독기로

스스로 태우면서 '심장'만을 남기는 것은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예술성을 추구와

획득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동안 자신이 이루었던 예술성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 블로그 참조)

 

금시조는 묘시조(妙翅鳥)라고도 한다. 사는 곳은 수미산 사해(四海)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탱화에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 형태는 독수리와 같고 용을 게걸스럽게

씹어먹고 있거나 손에 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대개 사찰 벽화에 많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석굴암 전실에 있는 가루라상인데 이 상은 왼손에 삼지창 들고 있고

날개가 달려 있는 투구를 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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