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19회 시끄러운 도서관


도서관에 가면 조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왜 조용해야할까? 본시 우리나라의 공부는 시끄럽게 배운다. 서당에서도 그랬고, 과거 공부하는 것도 역시 입으로 낭송하며 읽고 외웠다. 이러한 전통적 배움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침묵과 묵독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도서관은 마치 경건한 성전이나 침울한 시골같다.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근대적 배움을 적용하면서 책은 조용히 읽어야한다는 관념이 우리나라 교육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벨상의 왕국, 유대인들의 도서관은 아직도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의자를 맞대도 토론하고 대화하고 이야기 한다. 도서관치고 너무 시끄럽다. 그런데도 그들은 탁월한 지적 업적을 쌓았고, 어느 민족도 따라오지 몰할 위대한 민족이 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결국 공부는 몸으로 해야한다는 원초적 결론에 되돌아간 것이다.


고미숙은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에서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공부는 입으로 하고 발로하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체력이 지력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은 잘 알고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도서관은 공부하는 곳이 아닌 노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반갑게도 영국에 이런 도서관이 들어서고 있다는 소식이다. 런던 타워햄릿츠 구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의 복합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가 그 주인공이다. 이 도서관은 시끄럽다.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논다. 심지어 바로 옆에 카페가 있어 차와 식사도 가능하다. 이뿐 아니다. 주변이 시장이라 시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책을 빌려가고 쉬었다 간다고 한다. 환경 친화형 도서관인 셈이다. 참으로 멋지지 않는가.





<동영상 링크>


낭독에 답이 있다. 공부는 몸으로 해야 한다. <유태인의 공부>에 보면 유태인들의 시끄러운 도서관 예시바를 소개한다. 서로 토론하고 이야기 함으로 논리를 체계화 시키고 더 깊은 사상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한다. 


"예시바는 유태인의 전통적인 학습기관이다. 우리로 따지면 일종의 도서관인 셈이다. .. 예시바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마치 술집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시끄러운 소음을 만났다. 도서관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눴다."(62쪽)



소리를 내는 것은 혼자 공부하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며, 소통하며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의도이다. 혼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함께 지식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통해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공부방식을 전승했다. 유태인 혼자가 아니라 '우리'의 공부를 한다. 세상과 소통하는 도서관, 자신만의 상아탑에 함몰되어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는 고집불통의 탁상공론을 일삼는 일반 공부와는 너무 다른 것이다. 


영어는 어떤가. 역시 낭독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진정한 공부가 이루어 진다. 김보경의 <낭독은 입문학이다>는 고전 낭독 클럽을 이끌면서 일어난 여러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들려 준다. 낭독은 생각보다 강하다. 소리내는 것은 함께 하는 공부는 우리의 몸은 혼자가 아닌 함께 할때 더 높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공부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세워야 할 때다. 오랫동안 관행으로 자리잡은 침묵의 도서관을 바꾸고, 입을 열어 말하는 도서관, 시끄러운 도서관, 놀이와 삶이 함께 하는 도서관이 되어야 한다. 시끄러운 도서관이 갖는 의미는 하나 더 있다. 공부만을 위한 이기적 공간이 아닌 소통의 공간으로서 전인격적인 공부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전에 장유에 있는 김해기적이 도서관에 방문했을 때의 생소함과 놀라움은 시끄러운 도서관이 답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적의 도서관의 철학을 담아 제목도 <기적의 도서관>으로 지었다. 이 책은 기적의 도서관이 갖는 소통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재미난 책이 하나 있다. 본 글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을 수 있으나 도서관 고양 <듀이>는 치료하고 소통하는 고양이의 삶을 통해 공부만이 아닌 치유의 의미로서의 공간도 절실함을 보여 준다.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히말라야 도서관>은 모두가 읽어야할 희망이 보루다. 작년 여름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샀던 <도서관 산책자>는 공공도서관 뿐만  아닌 소도서관과 개인 도서관에 관한 건축 이야기도 들려 준다. 사각형의 딱딱하고 막힌 도서관보다 소통이 가능한 공간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통을 갈망하다. 공부 역시 소통을 통하 공부가 참 공부다. 요즘 아이들은 학생시절도 없고, 학창시절의 친구도 없다. 모두가 적이고 경쟁자이다. 수업시간은 늘어가는데 함께 놀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사라지고 있다. 다음학기때는 손으로 만지고 넘기는 종이책도 사라진다고 한다. 전자책으로 공부한다고 한다. 이렇게 슬픈 일이 있나.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이 머릿 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참으로 답답하다. 그나마 시끄러운 도서관을 통해 삶을 나누고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다행이다. 많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장유에 있는 김해 기적의 도서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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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18

내 아이를 바보로 만들지 마라

 

아들은 성적 부진아다. 초등학교 3학년 쯤 되면서 시작된 ADHD는 천재적인 아이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산만하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론이다. 아직 검사를 하지 않았다. 하든 안 하든 결과는 뻔하다. '주의력결핍행동과잉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준 주의력결핍행동과잉장애'라고 판단할 것이 뻔하다. 선생님들은 입을 모았다. 이 아이는 성적이 낮아 우리 반의 평균을 깎아 먹는다는 것이다. 한 명 때문에 학급 전체가 수업에 방해를 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교육을 철저히 해달라고 한다. 교육?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집에서 할 수 없는 교육을 학교에 위탁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교육이라니. 생뚱맞은 말에 기분이 나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부모들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다행히 교사가 직업이 지인이 있어 아들 문제로 잠깐 대화를 했다. 그 분의 이야기는 그런 아이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성적위주와 책상에 앉아서 하는 주입식 공부만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현 교육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름 이유 있는 변명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가 바보가 된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입식 공부만을 지향하는 교육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아이 자랑 좀 해야겠다. 우리 아이는 조립과 만들기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학교 대표로 나간 적도 한두 번 있을 만큼 뛰어난다. 공부는 못해도 쪼그리고 앉아 레고나 조입 로봇을 만드는 데 한두 시간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아이지만 오로지 성적이란 놈 때문에 우리 아니는 늘 '성적 부진아''바보' 취급을 받는다. 운동은 얼마나 잘하는가. 두 번 줄넘기도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자기 좋아하는 곤충은 얼마나 잘 아는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이런데도 우리 아이는 평균을 깎아 먹는 문제아이다. 누가 우리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

 

답은 다중지능에 있다. 하워드는 다중지능 이론을 펼치면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즉 공부지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 춤 잘 추는 것, 노래 잘하는 것, 달리기 잘하는 것 등 저마다의 타고난 재능이 있다. 그런 재능을 십분 계발하여 저마다의 개성과 특성에 맞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시작이다. 말마따나 고등학교 수학이 졸업 후 필요나 한 것인가. 기껏해야 수학전문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99%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수학을 잘해야 공부 잘한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성장기의 아이와 특히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에게 현저한 산만함과 주의력 결핍 현상이 강하게 일어난다. 다음 네 권의 책을 추천한다. <퀀텀 교수법>은 다중지능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강의한 책을 엮은 것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은 다중지능에 대한 고전이자 가장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다중지능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아이의 성장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내 아이 다중지능의 비밀> 역시 아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다중지능 학급경영>은 다중 지능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를 배우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통해 학습의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교실만이 공부의 전부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봄이다. 아이들을 밖으로 보내는 것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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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가 떨어졌다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를 읽는 중이다. 이분이 누군지 정확하게 가늠하기 쉽지 않다. 훑어보기를 통해 대충 살펴보니 하버드대와 펜실베니아대를 나온 수재다. 학자겸 편집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태평양 전쟁 시 해군 소령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이 책 <작가는 왜 쓰는가>는 죽기 전 4년 전에 쓴,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책이자 가장 노년에 쓴 책이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쓴 책이리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작가가 왜 쓰는지 말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쯤 될 것이다. 많은 소설을 썼는데 몇 권만 번역되어 있다. 에세이 식으로 써내려간 글은 자신의 스토리와 더불어 작가들의 평을 예리하고 첨가했다. 이 분을 이해하려면 이왕주 교수의 추천의 글이 유효하다.

 

이 책을 서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나중에 다 읽고 생각해 볼 일이다. 굳이 중간에 펜을 든 이유는 눈에 들어오는 한 구절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 "읽을거리가 떨어져버렸다." 그렇다. 읽을거리가 없는 것이다. 활자중독자들에게 읽을거리의 부재는 두려움과 무료함과 지독한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탁월한 작가는 지독한 독서광이다. 미치너 역시 그랬다. 그는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소개하는 곳보다 여행 중이나 일하는 중에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늘어놓는다.

 

그는 젊은 시절 우연하게 만났던 여성 소설가 리빙스턴 힐의 문고집 소설을 발견하고 한 권 구입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작품은 아직도 호놀룰루 서점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운 문고본 속에 살아있다. 이미 64종이 재판되었고, 앞으로 40종이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것이 현학적인 학식보다는 솔직한 감정이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생각했다."(85) 솔직한 감정의 승리! 이보다는 멋진 표현은 없을 것 같다. 힐의 소설은 바로 그런 것이다.

 

활자중독자는 사냥꾼이다. 책을 찾아 종횡무진 활보하며 읽을거리가 없는지 눈에 독기를 품고 찾아다닌다. 미치너 역시 그런 사냥꾼이다. 심지어 폭식가이다. 식탁에 차려진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습에 기가 질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아주 어린 시절, 그의 말대로 하면 '알파벳을 암송하기 전에 디킨스, 새커리, 리드, 솅케비치 등의 작가들을 더 먼저 알게 되었다."(100)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감동적인 문장이다.

 

어떤 사기꾼 같은 세일즈맨에게 속은 이모 로라가 발자크 전집을 사게 되었는데 그에게 '그 전집은 천만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나의 어린 시절에 종종 이런 사기꾼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고 쫌 있어 보이는 집들은 그 책들을 월부로 구입했다. 불행히 우리 집은 똑똑한 아버지 덕에 사기꾼이 발도 들여 놓지 못했다. 나에겐 이처럼 큰 불행이 또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토지>를 읽고 난 후 10년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다시 집어 들었던 나와 비교하면 미치너의 독서량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먹으면 배설하는 것이 생리적 현상이니, 그가 탁월한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엄청난 독서에서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어쨌든 요즘은 돈이 궁해 읽을거리가 떨어져 간다. 책을 절대 빌려 읽지 않는 고질병 때문에 읽기는 곧 돈과 직결된다. 아내를 닦달한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내 돈이 나가는 것을. 이럴 때는 누군가 책 사라고 수표 한 장 주머니에 꽂아 주고가길 신에게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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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지사회 읽기



정지

진입금지

금연

철조망

빨간등


우리의 일상 속에서 보이지 않게 속박하는 것들이다. 자유를 위한 속박이다. 잘 지키면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있다고 꼬득인다. 하기야 길가에 꽁초가 버려진 것을 보고 누가 좋아하랴. 나 같은 금연가가 음식점에서 담배냄새 맡아가며 밥을 먹는 것이 어찌 반갑겠는가. 최소한의 배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고 할까. 하지 않으면 벌금이 나오고, 구속된다고 겁을 줄까. 이것이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굴욕적으로 만드는 이유이다. '당신의 지혜로운 선택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안 될까. '당신 자신의 건강을 위해 타인을 위해 금연을 부탁해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안될까. 왜, 이곳에서 흡연시 몇조 몇항에 의거 얼마의 벌금이 부과됩니다.라고 해야할까.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단속하고 금지당함으로 억압당하게 된다. 심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나고 모르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이유는  금지사회의 암울한 풍경이다. 서로 합의하여 만들어가는 '우리'의 거리가 아니가, 단속되고 금지함으로 만들어진 '억제된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남의 것이 되고, 숨어서 하는 것이 더 맛있는 것이다. 불법을 저지름으로 오는 쾌감을 즐기고 싶은 심리가 작동한다. 


금지사회의 치졸함은 단속을 통한 통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단속은 색출작업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밝히려는 의도다. 누군가의 잘함이 아닌 못함을 지적하는 가장 비열한 방식이다. 금지는 한계를 설정하고, 권한을 축소하고,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에 염장을 지른다. 어느 아파트는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탑승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기사) 기가 막힐 일이다. 놀라운 사실은 새벽기도회를 나가는 교인들이 민원을 많이 넣었다는 것. 새벽에도 배달하는 곳이 있나? 이 또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단속하회는 불가피하게 투명사회라는 가면을 쓴다. 투명하게 하자고 외친다. 그리고 그곳을 들여다보고 입을 막는다. 돈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 왜? 나의 경쟁자를 도와준 자를 살려 줄 수는 없는 일ㅇ다. 한병철은 '투명사회'를 '폭력'으로 단언한다. 숨어서 욕하는 재미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세상물적의 사회학>과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역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을 읽어냄으로 진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준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마치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원시용 안경과 근시용 안경이 있다. 선글라스도 있으니 여름에 쓰면 제격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읽고 사람을 읽는다. 네 권의 책이 이 시대를 읽은 중요한 혜안을 던져준다. 필독서에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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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영성

헨리 나우웬 / 두란노 / 2004-02


인간의 본질은 관계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을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다. 사람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닌 서로 기대며 살 때 사람다워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람이 된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의 관계일 때 인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확립된다고 설파(說破)했다. 고대헬라 철학을 확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언도 남겼다. 사람은 서로 맞대어 사는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

 

일상의 여백을 허무가 아닌 꽉 찬 의미임을 진실한 삶으로 드러낸 헨리 나우웬의 새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두란노에서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3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첫 책은 일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하루의 부제를 달고 삶의 영성으로 출간했고, 두 번째 책은 예수님을 나의 집으로 삼는 하루라는 부제로 귀향의 영성이다.

 

헨리 나우웬과 조우(遭遇)7년 전 탕자의 귀향에서 시작되었다. 지독한 개혁주의자란 이름으로 자르고 베고, 쪼개고 뒤집던 날카로운 교리적 환상의 한계(限界)를 벗어나지 못해 심정 고통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집어든 탕자의 귀향은 새로운 영성의 세계로 빠져드는 문이었다. 헨리 나우웬을 읽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렘브란트에 대한 그림 묵상을 위한 숙제의 참고도서로 구입한 책이었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귀향을 통해 렘브란트의 영적 순례를 내밀하게 천착(穿鑿)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렁증이 일어나 책을 손에서 몇 번이나 놓아야 했다. 렘브란트는 곧 나다는 생각에 적지 않는 손 떨림도 동반했다.

 

이 책은 돌봄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다지듯 잘게 잘라 낸다. 아니다. 물이 스펀지에 스미듯 살포시 적셔 준다. 아담이란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으면서 체득한 영적 깨달음을 풀어낸다. 마르틴 부버의 -의 관계, 즉 존재 대 존재로서의 만남을 깨닫는 것이며, 목적이 아닌 여정이라 알려 준다. 돌봄은 치료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너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함께 머무는 것이다. 돌봄은 긍휼로 엮어지는 서로의 언어는 배우는 과정이다. 인간의 가장 저변(低邊)에 침전되어있는 불쌍히 여김으로 시작 된다.

 

돌봄(care)이란 무엇인가? 이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24)

 

돌봄은 나도 너와 같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바울이 충고한 것처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이다. 나의 여분의 능력을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단 기간 안에 치료해내는 목적도 아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다. 더 큰 믿음으로 고난을 뛰어 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31)이란 선물을 더 가치 있게 보신다. 해결사가 아닌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긍휼이며 돌봄의 본질이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 않았던가. 함께 하려는 마음, 고통을 함께 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돌봄은 가능하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보는 자의 스승이다. 목적과 성취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쉬어 가라고,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 같이 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목적지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봄을 통해 치료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순간, 지치고 낙망한다. 만약 치료되지 않고 그의 아픔이 계속 된다면 어떻게 할까. 치료를 중단할까? 돌봄은 긍휼이기에 치료되지 않아도 함께 한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인내하며 참아내는 방법을 서로에게 알려 준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고 함께해주는 진실한 관계를 가꿀 수 있다.”(43)

 

일방적인 수여자가 아닌 자신이 수혜자(受惠者)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돌봄은 기쁨의 선물이 된다. 타인을 불쌍히 여김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받는다. 돕는 사람은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받는 사람이다. “슬픔의 잔과 기쁨의 잔은 분리될 수 없다.”(50)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 무례하다. 그들의 아픔을 간과한다. 급하게 가야하는데 초보 운전자가 앞을 가로막으면 욕이 나온다. 장애인은 그들이 아닌 건강한 사람에게 불편하다. 그래서 무례해 진다. 돌보는 이는 먼저 돌봄을 받는 이에게 배워야 한다. 그의 필요를, 그의 약함을, 그의 힘듦을. 학생이 되지 않으면 결코 돌볼 수 없다. 경청은 그를 위하여 듣기도 하지만, 바로 자신을 위하여 듣는 것이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경청이란, 상대방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교사는 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학습 내용을 학생들에게 제시할 때 오히려 가장 잘 배운다. 마찬가지로 고민이 있는 사람도 민감하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깨닫게 된다.”(57)

 

이렇게 하여 돌봄은 돌보는 자의 일방적 헌신이 아닌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고 배워감으로 쌍방의 치유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72)이 된다. 돌봄은 관계의 필연적 욕구다. 돌봄이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보는 자는 돌봄을 받는 자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그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행위는 존재보다 앞서지 못한다. 행위는 존재 다음이다. 우리는 먼저 상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 혼란, 외로움, 고립, 잊힌 존재가 된 심정에 공감’(81)해야 한다. 마태는 첫 번째 복을 애통하는 자로 규정한다. 천국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곳이고,

애통할 수 있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긍휼은 치료가 되지 않더라도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돌봄은 당신의 고통이 보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86)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돌봄을 통해 자기희생을 싫어하는 이기적 욕망을 발견하며, 내가 더 건강하기에 나의 도움을 너에게 준다는 우월의식도 버려야 한다. 그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보고 그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돌봄을 통해 연약한 형제자매와 함께 하면서 말을 들어주고 사랑으로 품으려는 노력’(93)을 하게 된다. 예수가 무의미한 우리의 삶에 함께 거하심으로 의미 있게 하였듯, 돌봄은 무가치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 노력이다.

 

 -두란노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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