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영성

헨리 나우웬 / 두란노 / 2004-02


인간의 본질은 관계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인 사람 인()을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다. 사람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닌 서로 기대며 살 때 사람다워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람이 된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의 관계일 때 인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확립된다고 설파(說破)했다. 고대헬라 철학을 확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명언도 남겼다. 사람은 서로 맞대어 사는 상호적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

 

일상의 여백을 허무가 아닌 꽉 찬 의미임을 진실한 삶으로 드러낸 헨리 나우웬의 새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두란노에서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3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첫 책은 일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하루의 부제를 달고 삶의 영성으로 출간했고, 두 번째 책은 예수님을 나의 집으로 삼는 하루라는 부제로 귀향의 영성이다.

 

헨리 나우웬과 조우(遭遇)7년 전 탕자의 귀향에서 시작되었다. 지독한 개혁주의자란 이름으로 자르고 베고, 쪼개고 뒤집던 날카로운 교리적 환상의 한계(限界)를 벗어나지 못해 심정 고통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집어든 탕자의 귀향은 새로운 영성의 세계로 빠져드는 문이었다. 헨리 나우웬을 읽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렘브란트에 대한 그림 묵상을 위한 숙제의 참고도서로 구입한 책이었다. 렘브란트는 탕자의 귀향을 통해 렘브란트의 영적 순례를 내밀하게 천착(穿鑿)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렁증이 일어나 책을 손에서 몇 번이나 놓아야 했다. 렘브란트는 곧 나다는 생각에 적지 않는 손 떨림도 동반했다.

 

이 책은 돌봄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다지듯 잘게 잘라 낸다. 아니다. 물이 스펀지에 스미듯 살포시 적셔 준다. 아담이란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으면서 체득한 영적 깨달음을 풀어낸다. 마르틴 부버의 -의 관계, 즉 존재 대 존재로서의 만남을 깨닫는 것이며, 목적이 아닌 여정이라 알려 준다. 돌봄은 치료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너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함께 머무는 것이다. 돌봄은 긍휼로 엮어지는 서로의 언어는 배우는 과정이다. 인간의 가장 저변(低邊)에 침전되어있는 불쌍히 여김으로 시작 된다.

 

돌봄(care)이란 무엇인가? 이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24)

 

돌봄은 나도 너와 같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바울이 충고한 것처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이다. 나의 여분의 능력을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단 기간 안에 치료해내는 목적도 아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다. 더 큰 믿음으로 고난을 뛰어 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31)이란 선물을 더 가치 있게 보신다. 해결사가 아닌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긍휼이며 돌봄의 본질이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 하지 않았던가. 함께 하려는 마음, 고통을 함께 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돌봄은 가능하다.

 

돌봄을 받는 자는 돌보는 자의 스승이다. 목적과 성취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에게 천천히 가라고, 쉬어 가라고, 나는 따라갈 수 없으니 같이 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목적지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돌봄을 통해 치료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순간, 지치고 낙망한다. 만약 치료되지 않고 그의 아픔이 계속 된다면 어떻게 할까. 치료를 중단할까? 돌봄은 긍휼이기에 치료되지 않아도 함께 한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인내하며 참아내는 방법을 서로에게 알려 준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고 함께해주는 진실한 관계를 가꿀 수 있다.”(43)

 

일방적인 수여자가 아닌 자신이 수혜자(受惠者)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돌봄은 기쁨의 선물이 된다. 타인을 불쌍히 여김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받는다. 돕는 사람은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받는 사람이다. “슬픔의 잔과 기쁨의 잔은 분리될 수 없다.”(50)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 무례하다. 그들의 아픔을 간과한다. 급하게 가야하는데 초보 운전자가 앞을 가로막으면 욕이 나온다. 장애인은 그들이 아닌 건강한 사람에게 불편하다. 그래서 무례해 진다. 돌보는 이는 먼저 돌봄을 받는 이에게 배워야 한다. 그의 필요를, 그의 약함을, 그의 힘듦을. 학생이 되지 않으면 결코 돌볼 수 없다. 경청은 그를 위하여 듣기도 하지만, 바로 자신을 위하여 듣는 것이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려면 경청이 필요하다. 경청이란, 상대방의 학생이 되는 것이다. 교사는 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학습 내용을 학생들에게 제시할 때 오히려 가장 잘 배운다. 마찬가지로 고민이 있는 사람도 민감하게 들어주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깨닫게 된다.”(57)

 

이렇게 하여 돌봄은 돌보는 자의 일방적 헌신이 아닌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고 배워감으로 쌍방의 치유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72)이 된다. 돌봄은 관계의 필연적 욕구다. 돌봄이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보는 자는 돌봄을 받는 자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 그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행위는 존재보다 앞서지 못한다. 행위는 존재 다음이다. 우리는 먼저 상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 혼란, 외로움, 고립, 잊힌 존재가 된 심정에 공감’(81)해야 한다. 마태는 첫 번째 복을 애통하는 자로 규정한다. 천국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곳이고,

애통할 수 있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긍휼은 치료가 되지 않더라도 상대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돌봄은 당신의 고통이 보입니다. 내가 그 고통을 없애줄 수는 없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86)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돌봄을 통해 자기희생을 싫어하는 이기적 욕망을 발견하며, 내가 더 건강하기에 나의 도움을 너에게 준다는 우월의식도 버려야 한다. 그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보고 그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돌봄을 통해 연약한 형제자매와 함께 하면서 말을 들어주고 사랑으로 품으려는 노력’(93)을 하게 된다. 예수가 무의미한 우리의 삶에 함께 거하심으로 의미 있게 하였듯, 돌봄은 무가치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 노력이다.

 

 -두란노 헨리 나우웬의 일상의 예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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