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쯤, 9월 25일 오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과 연락을 부탁드린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날 새벽까지 공부하고 잠든 상태라 점심 때 겨우 일어나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사실 9월 초에 공모전에 글을 제출했었고, 그 공모전의 주최기관 전화번호였기 때문에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000님, 최우수상에 당선되셨습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흘렀다.

10년동안 참가했던 수많은 글쓰기 공모전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해왔고, 그래서 글쓰기 대회에도 부지런히 나갔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꼈지만, 그것과 무언가를 써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의 간극은 내가 절대로 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과목에서 전교 1등을 하고 국어 선생님께서 문제집을 선물로 주셨던 기억이 있다.

국어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고 쓰고 이해하는 즐거움을 그때도 나는 알고 있었나보다.

그러던 어느날, 시를 써서 그림과 함께 시화 전시회를 하는 행사가 있었고 그 국어 선생님께서 내가 쓴 시를 읽고서는,

"너는 국어는 잘 하는데 시는 참 못 쓰는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시를 너무 좋아하고, 정말 열심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못 쓴 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때 마음의 상처를 조금 받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시를 읽어보니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글 잘 쓴다는 친구들이 몇 있었고, 그들의 시는 나 또한 감동받을 정도로 마음을 움직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이것은 '작가' 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쓴 책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다.

네이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등 각종 플랫폼에 어떤 이름 모를 이가 쓴 개인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감동에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의 진실한 생각과 그 안에 들어있는 아픔, 불안, 걱정, 희망, 사랑 등에서 책을 읽는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 인간의 생생한 기록을 포착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이름 모를 이들의 글이 왜 그렇게 좋은지.

오늘 살아있었다는, 잘 살아내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듯한 하루의 기록과 글.

그래서 나는 유독 수필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건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이 글로 표현될 때의 반짝반짝함.


색을 특정할 수 없는 찬란한 빛깔을 평범한 사람들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일상을 포착하는 글을 혼자만 알 수 있는 곳에 오랫동안 써 왔다.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글이 된다는 건, 내게 있어 그 어떤 상보다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대단한 글도 아니고, 그저 일하면서의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것들을 글로 써낸 것인데.

공모전에 제출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난 지금은, 이 공모전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주신 춘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의 직원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공모전의 작품을 발표하는 소통 콘서트를 준비하는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저마다의 글을 무대 위에서 발표하는 것이 마냥 떨리기만 한 일인 줄만 알았는데,

각자의 삶 속에서 진심으로 대하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무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매년 있는 학교 축제 때 무대 위에서 각자의 매력과 재능을 한껏 펼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무한한 동경을 가졌었다.

그때의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라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하고, 멋진 춤을 추고, 화려한 공연과 연극을 선보여주는 친구들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공부 잘 하는 것보다 그렇게 자신만의 다채로운 꿈들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친구들이 훨씬 더 멋져보였다.

그랬던 내가 서른이 넘어 무대 위에서 내가 쓴 글을 발표하는 것은, 중학생 때의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비록 지방의 작은 공모전이고, 작은 행사였지만 무대 위에서 각자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시간 동안,

나는 감동이 흘러넘쳐서 '언젠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 순간을 여전히 기억할 것만 같아' 라고 생각했다.


10명의 공모전 수상자분들과 함께 무대에서의 발표를 준비하면서, 중학생 때의 학교 축제날이 계속 떠올랐다.

다같이 하나의 무대를 구성하기 위해 떨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발표 대본을 가다듬고 리허설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 삶에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긴장되고 이 무대가 처음이지만 그 떨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모든 순간들이 아름다워보였다.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의 발표 때마다 넋 놓고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

인간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그 대상이 '글'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나의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듣고 느끼고 나누는 것이 된다는 것.

줄곧 혼자서의 꿈과 역량을 키우고 품어온 내게 이런 소중한 경험을 선물해준 10명의 수상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소통 콘서트에서의 발표가 끝나고, 집에 와서 수상 작품집을 읽었다.

다른 분들의 글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수필이 바로 여기에 있잖아.


자신만이 살아낼 수 있는 삶에서 포착한 생생한 감동과 진실한 마음.

자신의 삶을 공동체 속에서 예쁘게 가꾸어나가는 용기와 따뜻함.

세상과 연결되려는 강한 의지와 발걸음.

살아있다는, 살아내려는 무한한 생명력.

세상 모든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모두 수상자분들의 글에 담겨있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들의 힘찬 날갯짓이 계속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날의 감동을 가슴 깊이 새긴다.


*소통 콘서트를 진행하셨던 이용석 아나운서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10명의 수상자들의 글과 그림을 현장에서 처음 접하시는 것일텐데도, 모든 분들의 발표가 정말 토크쇼처럼 편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질문 하나하나 세심하게 꺼내주셨다. 수상자분들의 나이대가 정말 다양해서 초등학생도 있었는데 아이가 부끄러워 하면서 발표를 머뭇거려도 민망하지 않게 아이를 기다려주시고 아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시는 등 정말 베테랑 아나운서이셨다.

사실 나는 심장이 터질 정도로 무대 위에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 떨렸는데, 이용석 아나운서님께서 정말 꽃보다 더 활짝 웃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응해주셔서 그래도 발표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발표자들의 발표내용을 현장에서 즉각 듣고 적절한 질문을 바로 생각해서 말하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

진행을 정말 잘 해주셔서 소통 콘서트가 더욱 빛이 났다. 좋은 곳에서 활약하시길 응원합니다!



->이 작품집에는 수상하신 분들의 작품 뿐만 아니라, 수상하진 못했지만 참가하신 분들의 작품도 실려있다.

"당사자, 가족, 이웃으로 더불어 살아가는/살아가기 위한 이야기" 라는 이번 장애인식 공모전의 취지에 정말 걸맞는 것 같아서, 참가한 모두의 이야기를 실어주신 배려에 참 따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다 간직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ㅠㅠ 



->공모전 수상자분들의 작품을 이렇게 2025년 달력으로 제작해주셨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2025년을 시작할 수 있음에 정말 감사드린다. 단순히 공모전에 참가한 것의 의미를 넘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셨다. 2025 달력은 안 사도 될 것 같다. 여기에 실린 모두의 이야기를 2025년에 두고두고 새겨야지!



->모든 글과 그림이 감동이었지만 이 그림이 하고 있는 말은, 정말 그림만으로도 깊숙히 와 닿았다. 똑같은 사과인데 비장애인이 건네는 것과 장애인이 건넬 때의 차이와 편견. 그것이 너무 아프게 느껴진다. 편견은 언제나 시시각각 깨부수어야 할 것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온전히 그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애인식개선을 주제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고, 이번 공모전도 그러한 취지의 일환이다. 나에게는 별 일 아닌 것이 장애인에게는 세상 전부인 것임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이 부정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그것은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중받는 것, 존중하는 것. 



->공모전 시상식에서 준비해주신 꽃다발. 너무 예뻤고, 꽃다발까지 주실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

곧 시들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ㅠㅠ



->오전에 리허설이 끝나고 행사 시작 전 점심 식사 때, 강대 정문에 새로 생긴 '단편'이라는 카페에 갔다.

단편이라는 이름이 너무 시적이고 예뻤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을 맞이하며 엄마랑 함께 발표할 대본을 연습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행사가 있었던 강원대학교 백령아트홀 주변의 꽃집 앞에 이렇게 낙엽을 하트로 모아 놓았다.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하면서 사진을 찍고선 바로 꽃집에 들어가 주황색 카네이션 3송이를 포장해왔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구매하게 된 주황색 카네이션 꽃다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주는 꽃을 산 것이라서 기분이 참 신기했다. 그러나 더욱 신기했던 사실은 이 다음날, 알라딘 어플에서 이진명 시인의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라는 시가 오늘의 시로 소개되었다는 것.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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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4-10-31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야제 님! 장애인식개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통 콘서트 이야기도 너무나 의미 있고 마음의 공명을 울립니다. 노란 은행잎 하트도 너무 좋구요~
저는 29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이태원 참사 2주기 추모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사람과 사람들 마음이 이어지는 시간.
‘그래서 춘천에 삽니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이진명 시인의 ‘젠장 이런식으로 꽃을 사나‘~ 저도 그래서 오늘 꾸까에서 꽃이 옵니다.ㅋㅋ
10월의 마지막 날이, 전야제 님 글로 등불처럼 환해졌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전야제 2024-10-31 12: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참가한 공모전 중에 처음으로 받은 상이라서 너무 얼떨떨하고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ㅠㅠ 맞아요. 저도 29일 소통 콘서트였는데 그날이 마침 이태원 참사 2주기라서 전국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함께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라는 걸 이번에 처음 경험했습니다. 상 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들을 수 있는 경험이 너무 좋았어요! 꽃으로 행복해지는 시간ㅎㅎ 10월의 마지막 날을 꽃으로 마무리하신다니 정말 멋집니다^^ 이진명 시인의 시 넘 유쾌해요. 행복한 11월 보내시길 바래요ㅎㅎ

2024-11-07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07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4-11-07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전야제 2024-11-07 21: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알라딘 서재에서 글쓴지 얼마 안되서 낯설지만 멋진 글 올려주시는 페넬로페님 서재를 알고는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친구신청했습니다ㅎㅎ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방문할게요^^

그레이스 2024-11-07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닉네임도 멋지신 전야제님!
공모전 당선 축하드려요!

전야제 2024-11-07 21: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ㅎㅎ 그레이스님 서재는 박물관 같아요. 그레이스님의 멋진 여행과 고전 리뷰들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읽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친구신청했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레이스 2024-11-08 15:05   좋아요 1 | URL
친구신청 감사합니다.
넘 반갑구요
 
매거진 피치 magazine Peach 04호
피치마켓 편집부 지음 / 피치마켓 / 2024년 6월
평점 :
품절


*이 리뷰는 출판사의 홍보가 아닌, 제 개인적 호기심과 구매로 쓴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의 언어 학습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잡지인데, 많은 분들이 교육 자료로 활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언어와 사람 사이의 틈을 메꾸는 노력, 느린학습자를 위한 매거진 <피치 Peach>


혹시 '읽기 쉬운 책'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읽기 쉬운 책이란, 발달장애인의 문해력 성장을 위해 쉽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기존의 책을 다시 재구성해서 만든 책입니다.

기존의 일반 도서들은 문장이 길고, 단어가 어렵고, 발달장애인의 문해력 수준에 따라 접근하기에 어려운 도서들이 대부분이라서 다시 문장을 간결하고 쉽게 가다듬고, 어려운 단어를 쉬운 단어로 바꾸어서 재구성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요.

2023년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읽기 쉬운 책을 출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국 공공도서관에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도서관에 근무할 때 저희 시립도서관에도 읽기 쉬운 책이 어린이 도서관에 비치되었는데요,

발달장애인을 포함해서 언어를 통한 이해와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을 '느린학습자'라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책을 읽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누구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따로 제작해야 할 만큼, 느린학습자들의 언어 이해는 그들에게 얼마나 어렵게 다가오는 것인지를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제가 어렵지 않게 읽었던 책들이 발달장애인에게는 얼마나 힘겨웠던 것일지, 또 벽이라고 느낄만큼 넘을 수 없던 것일지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제 독서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 반성하게 될 만큼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에게는 당연하게 이해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언어를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모든 관계의 시작점인 것 같아요.

발달장애인에게는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학습하고, 생활에 적용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보다 굉장히 많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고나서, 그럼 '어떻게 언어와 책을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행복함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고, 내가 스스로 나의 일들을 결정해나가고,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바로 책을 읽고, 그 속의 언어와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이 독서 문화 생활을 어떻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면서, 그들을 위한 교육 컨텐츠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역시나 저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책에서 답을 찾는 사람이기에, 다양한 책을 검색하다가 느린학습자를 위한 잡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 잡지를 너무 좋아해서 어렸을 때 잡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답니다.ㅎㅎ

너무나도 예쁘고 멋있는 사진들과 심장에 확 꽂히게 만드는 칼럼들...

잡지에도 다양한 주제의 분야가 존재합니다. 제가 주로 읽었던 잡지는 패션지와 문학 관련 잡지들.

하지만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느린학습자를 위한 잡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저에게는 감동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글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잡지가 있다니.

이런 혁명적이고 따스한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매거진 피치 Peach는 '피치마켓'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느린학습자를 위한 교육 잡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문장이 간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글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든지 글을 읽고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각종 정보와 지식을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장점입니다.


제가 구매한 매거진 피치 4호는 주제가 '여행'입니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요?'라는 질문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바닷가에 놀러가서 수영하기 전에는 어떤 것을 준비해야 되는지, 여행 중에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행계획표는 어떻게 짜는지, 여행 경비는 어떻게 계산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필요한 돈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여행이 끝난 후에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등 다양한 상황과 삽화를 제시하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답해보는 과정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행을 하는 이유와 '나는 언제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을 함께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형식적인 여행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또 그것으로 어떻게 행복을 느낄지 읽는 사람에게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책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게 가슴 깊이 느껴집니다.

단순하게 정답과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주요 독자인 느린학습자들이 함께 이 책에 참여하고 현실에서 적용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학교 밖에서의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행이 다르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여행하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언급하면서, '나는 어떤 취미가 있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는 부분도 정말 좋네요. 


그리고 혹시라도 어려울 수 있는 단어가 나오면 쉽게 풀어서 그 뜻을 알려주는 부분들이 정말 세심합니다.

당일치기 여행이라면 '당일치기'의 뜻은 무엇인지, 1박 2일 여행에서 '1박 2일'의 뜻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줍니다.

실제 여행 후기를 소개하면서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쉽게 풀어내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이 함께 제시됩니다.

이렇게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언어를 이해하고, 학습하고, 현실에 적용하고, 세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의 방법인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깐요.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부분인데, 이번 4호의 주제인 여행과 관련지어서 시 한 편을 소개하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소개하고, 그것에 대한 질문들이 역시 등장합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글에 참여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문해력 성장의 본질이 담겨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언어를 단순히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나만의 답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계속 유도하고 있어서 매거진 피치가 교육용 컨텐츠로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읽고 실제로 다른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여줌으로써, '나는 이렇게 생각해' 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단순히 질문만 제시하면 독자들이 질문만 읽고 끝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를 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더 용기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세심하게 구성된 내용들에 감동합니다.



대안학교 선생님의 자전거 국토종주 후기를 소개하는 과정도 역시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흘러갑니다.

마지막에 '힘들었지만 고개를 잘 넘은 것처럼 앞으로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라는 선생님의 느낀 점을 제시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겨서 힘들었던 적이 있나요?' 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함께 답해보면서 서로의 힘든 기억을 나누고 이해하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이 책은 혼자 읽어도 좋겠지만, 또래 친구들과 함께 읽거나 집단에서 독서가 행해지면 학습 효과가 훨씬 올라갈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것은 '잡지'라는 매체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서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라따뚜이는 먹어본 적도 없고, 그것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QR코드가 있어서 라따뚜이를 만드는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심한 배려 진짜 최고입니다!



피치 4호는 여행이 주제이기에 여행지를 소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단순히 소개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장소의 특징인 '보라색' 을 주제로 다양한 생각을 해보게 한다는 점이 잡지로서의 매력과 교육 컨텐츠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네요. 구성이 정말 알찹니다.


그리고 책의 끝에는 여행에 앞서 무엇을 챙겨야 할지, 짐은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하나하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유용합니다. 

여행을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짐을 챙기는 것인데, 보호자가 알아서 다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필요한 것들을 직접 생각하면서 스스로 짐을 챙길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매거진 피치가 교육 컨텐츠로서 얼마나 훌륭한지 감동하면서 읽느라 벌써 새벽이 다가오네요.ㅎㅎ


언젠가 국립장애인도서관을 소개하는 글을 보았는데, 이런 문구가 있더라구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책과 도서관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국립장애인도서관"


똑같은 내용의 글과 책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느린학습자에게는 언어를 읽고 이해하는 것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긴 시간과 다양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모두가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들이 그들에게는 벽으로, 두려움으로 느껴질 거에요.

이처럼 언어와 사람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메꾸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동안은 이 틈이 무시되어져 왔을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깐요. 부끄럽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부터 느린학습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매거진 피치를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이 책으로 인해 앞으로의 구체적 진로도 결정할 수 있었으니깐요.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될 거에요.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주체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피치마켓에서 운영하시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쉬운 글이 있는 도서관이라니. 언어와 사람 사이의 간격이 이렇게 차곡차곡 메꾸어지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서울가면 꼭 방문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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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4-10-26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의미하고 멋진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피치마켓에서 운영하시는 공간, 저도 시간 날 때 방문해 봐야겠어요~
라이브러리 피치, 대학로에 있어서 더욱 반갑네요~^^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전야제 2024-10-26 09:29   좋아요 1 | URL
오늘도 이렇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양한 독서 문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서울 사시는 분들은 부럽습니다.ㅎㅎ 저는 춘천에 살아서요. 다음에 서울 여행으로 라이브러리 피치 꼭 들리려고 합니다. 혜화역 대학로는 예전에 연극보러 자주 갔었는데 이런 도서관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어요. 아마 최근에 생긴 것 같아요! appletreeje님의 노랑무늬영원 리뷰 읽었는데 댓글다는 곳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 같아서 좋아요만 눌렀어요.ㅎㅎ 저도 얼마전에 구입해서 아직 읽기 전인데 다음 리뷰는 노랑무늬영원을 읽고 써보려구요. appletreeje님이 올려주신 시에 대한 글들 하루 한 편씩 잘 읽고 있어요. 수필집 내셔도 좋을만큼 너무 담백하고 좋은 글들이라서 읽을 때마다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appletreeje 2024-10-26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춘천 사세요?^^ 저 춘천 너무 좋아하는 곳인데요~옛날에 카페 이디오피아에서 해질 때까지 만화 그리며 놀았던.ㅎ
춘천에는 ‘망고‘님도 사시는 곳이라 춘천이 더욱 좋아집니다! 제 글들은 그냥 낙엽 한 장일 뿐입니다.ㅋ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굿데이!!!

전야제 2024-10-26 15:04   좋아요 1 | URL
우와 만화 그리세요?ㅎㅎ 저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 정말 좋아해서 많이 읽었어요. 춘천에도 역시 서재 운영자님들이 살고 계시는군요ㅎㅎ 낙엽 한 장이라니, 아니에요. 푸르른 나무같은 글이에요!^^

appletreeje 2024-10-26 15:24   좋아요 1 | URL
아주 옛날에요.ㅋㅋ 낙엽 쓰는 사람을 고운 눈빛으로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야제 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서재 주소(도메인) 변경을 하고나서 그동안 제가 써온 리뷰들이 외부에서 접속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https://blog.aladin.co.kr/Noir_Moon 이게 바뀐 제 서재 주소입니다. 도메인이 원래 알라딘 계정 만들 때 자동으로 만들어진 숫자들이라서 뭔가 의미있는 나만의 도메인으로 바꿔야지 했는데 이렇게 제 서재가 접속이 안되는 사태가 되어버렸습니다ㅠㅠ)

제 리뷰들 클릭하시면 아마 삭제된 서재라는 에러 페이지가 뜰 거에요.

제가 절대로 리뷰들을 삭제한 것이 아니니 혹시 제 서재에 자주 방문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조차도 핸드폰 알라딘 어플에서 제 서재의 글에 접속이 되다 안되다 하네요ㅠㅠ

각 책 페이지마다 리뷰란에서 제 글이 보이긴 하는데 서재 접속은 또 안됩니다.

아마 도메인 변경하고나서 완전히 적용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나 봅니다.

알라딘 서재에 접속이 안되는 며칠간 느꼈던 '단절감'이 정말 장난 아니게 크더라구요.

이 공간에서 책을 읽고 느꼈던 점들을 글로 기록했던 날들이 제게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소중했다는 걸 이제서야 느낍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글을 정성스럽게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셨던 감사한 분들 덕분에 항상 힘낼 수 있었습니다.

제 글 읽어주시고, 서재에 방문해주셨던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썼던 리뷰들에 접속이 안되니,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느낌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더라구요.

문득 한강 작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혼자 걸어가는 과정이 고립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쨌든 저는 언어로 작업하는 사람이고, 언어는 결국 우리를 연결해 주는 실이다.'

'아무리 내면적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해도 언어를 사용하는 한, 그 사람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쓰는 글이 사람과 또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의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배우게 되네요.

혼자만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 서재가 없어진 공간이 되어버리니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봅니다.

언어가 한 사람에게 날아가 닿는 감동과 행복함이 무언가 시작해볼 수 있다는 의지도 불어넣는다는 걸.

또 새롭게 깨닫습니다.

제 서재는 언젠가 다시 정상화가 되겠죠.

그렇게 믿고 열심히 공부하고 독서하며 기다려보겠습니다.

걱정해주시고 지켜봐주신 appletreeje님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혼자서 아둥바둥 정신없이 해결해보려고 하는 와중에 외부에서 제 글이 접속 되는지도 확인해주시고, 넘 감사합니다ㅠㅠ

요즘 컴퓨터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강사님께서 알려주신 Copilot에 도메인 변경 후 웹사이트에 접속이 안되는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해보았더니, 굉장히 자세하게 알려주더라구요. 물론 제가 알라딘 서버에 손댈 수는 없으니 해결할 수는 없지만, AI에게라도 이 답답함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저는 챗GPT도 한번도 사용 안해봤는데, Copilot 써보니 왜 다들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에 열광하는지 알겠더라구요.

컴퓨터 강사님께서 모르는게 있으면 Copilot에 물어보라고 하실 정도에요ㅎㅎ

어쨌든 제 알라딘 서재가 제대로 접속이 될 때까지 당분간은 열공하고, 독서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모두 즐거운 독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재미로, 수학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냐고 Copilot에 물었더니 정석같은 답변이지만 역시나 '요령껏'이 아닌, '정도'의 길을 걸어야하는 건 AI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가봅니다ㅎㅎ

매일 꾸준히 연습하는 것, 그것이 정석!)



+++힘들게 영어로 번역해서 질문했더니 이게 웬걸, 다시 해보니 한글로도 질문이 가능하네요ㅠㅠ

Copilot에 한글로 질문 가능하고 완벽하게 잘 번역된 한글로 친절하게 답변해주니 저처럼 바보같이 영어로 번역해서 질문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최근에 너무 많은 걸 배우게 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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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4-10-2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야제 님! 서재나 북플에서는 접속이 되는데, 상품페이지에서 서재 클릭을 하면 에러가 나네요. 그래도 서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서재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글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날씨도 쌀쌀하고 추워지는데 예기치 않은 일로 마음 고생 많이 하시네요.ㅠㅠ
원래 새 집을 지을 때는 이런 저런 변수가 생긴다 여기시고요, 얼마 남지 않은 가을 잘 누리시길요.^^
요즘 읽은 <빛과 멜로디>의 사람들이 자꾸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전야제 2024-10-23 17:16   좋아요 1 | URL
세심하게 확인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접속이 되다 안되다 하지만 덕분에 조급한 마음 버리고 기다려보려구요ㅎㅎ 알라딘 서재라는 공간에서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언어가 사람과 세상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정말 좋아서 앞으로 서재에서 계속 글 써보려고 도메인 주소도 새롭게 바꾼건데,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그래도 이런 에피소드도 생기고 덕분에 알라딘 서재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주신 appletreeje님도 알게 되고, 좋은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ㅎㅎ 새 집을 짓는다는 표현에 빗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글이 좋다는 초심을 지키면서 앞으로 서재를 잘 가꾸어보겠습니다^^ 응원 넘 감사드리고, 추천해주신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곧 다가올 연말까지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appletreeje 2024-10-23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더 감사합니다! 참 삶이란 이런 저런 일이 발생하여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새로운 문이 열리기도 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中 ‘괜찮아‘를 함께 읽고 싶은 저녁 무렵입니다. 굿데이!^^

전야제 2024-10-23 17:56   좋아요 1 | URL
방금 찾아 읽고 왔습니다. ‘왜그래가 아니라, 이제 괜찮아‘ 라는 어머니의 위로가 참 아프면서도 따뜻합니다ㅠㅠ 시 한편의 위로 감사합니다^^ 즐거운 저녁되세요!!
 
[eBook] 채식주의자(개정판)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폭력, 욕망,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


현실과 타인의 시선에서 영혜는 정신분열증과 신경성 거식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서 영혜를 바꾸려고, 고치려고 한다.

역시나 그들이 생각하는 정답은 정신질환의 완치, 육식의 식생활, 사회와 가정 내의 역할에 충실함 등...

한 인간이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 따윈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타인의 관점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거짓과 위선'의 것들이다.

우리들은 과연 훌륭한 연극의 구성원이 되어 역할 놀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면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타인을 정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조차도 점점 자라면서 결국은 인간과 세상을 '정의'내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 그가 욕망하는 것,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타인과 세상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폭력의 본모습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그것의 겉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잘 보여야 굉장히 거창한 것이 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허점을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었다.

아버지의 가정에서의 폭력적 행위들은 이 소설 속에서 겨우 몇 문장 내로 설명된다.

자녀들 중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했던 영혜가 가장 많이 맞고 자랐고, 그녀는 온 몸으로 그 폭력의 기억들을 전부 흡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영혜의 언니가 마지막 장 <나무불꽃>에서 말한다.

아버지가 영혜에게 가한 폭력은 그렇게 자세히 그려지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때린 것 외에 언어적 폭력,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의 강요, 영혜의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 등등 겉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은 단순히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영혜의 정신착란과도 같은 이상 행위들에서 폭력의 잔재를 짐작해봄으로써 폭력의 형체는 점점 큰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인간 내부로 모조리 흡수되어버리는 폭력의 얼굴.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개인에 만연한 저마다의 폭력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혜의 채식 행위와 정신분열증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아버지의 폭력때문이었을까?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이 육체와 정신으로 스며든다는 점에서 인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사이에는 인간 정신의 근원에 자리잡힌 '욕망'과 '구원'의 영역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온 정신과 육체에 걸쳐 강렬하게 원하는 것.

무슨 일을 겪는다해도 나를 지켜내고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 정신 내부의 어떤 강한 힘.

어떤 소설이든, 영화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반드시 인간들의 욕망이 있고, 각자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른 삶의 방식이 정해지고,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스러지고, 무너진 인생 앞에서 구원의 방식을 달리하며 인간은 생의 끝까지 나아가게 된다.


영혜에게도 왜 그것들이 없었으랴.

폭력이 인간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의지 또한 꺾어버리지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인간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폭력에 대해 강렬히 저항하는 사람, 자신이 겪은 폭력을 또 다른 이에게 가하면서 고통을 치유하는 사람, 살기 위해 자신이 겪은 폭력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 그리고 영혜처럼 폭력을 정신과 육체로 모두 흡수하여 그 고통에 결국 잠식당하는 사람 등등.

폭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영혜를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 장본인이며, '악'으로 상징되는 인간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폭력을 행하는 '인간' 자체는 그저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폭력은 형체를 가지지 않고, 한 인간의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다른 인간 내부로 끊임없이 전달되고, 깊숙히 파고든다. 

끝없이 생명이 탄생하고 죽고, 다시 탄생하는 우주의 섭리 속에서 폭력은 유전처럼 전해지고 가해진다. 생명이 창조되고 탄생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은 잠시, 생명은 폭력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다시 일어서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을 외면하고 부정해야만 오늘을,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폭력과 고통에 무감각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고 파고들어가는 순간, 영혜처럼 인간 근원의 죄의식에 잠식되어버리니깐.


영혜가 갑자기 채식 행위를 시작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나? 

'꿈을 꿨어'라고 말하는 영혜의 대사들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꿈 속 해괴하고 잔인한 내용들.

처음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과 핏덩이 고기들이 등장하지만, 영혜가 가족들 앞에서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과 함께 그 모든 정신착란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영혜의 어린시절 기억이 등장하게 된다. 아마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의 묘사가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폭력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홉살의 영혜는 키우던 흰둥이 개에게 다리를 물린다. 아버지는 흰둥이를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나, 두들겨패지는 않는다. 대신 오토바이에 매달아 동네를 몇바퀴 째 계속해서 달린다. 흰둥이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눈에는 핏물이 고이고. 그렇게 개는 잔인하게 죽는다. 죽어가는 모습을 어린아이였던 영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아버지의 학대가 다 끝나자, 흰둥이는 분해되어 음식으로 등장한다. 이웃들과 아버지는 그걸 먹는다. 개에 물린 상처는 개를 먹어야 낫는다면서 영혜도 먹게한다. 들깨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누린내를 맡으면서 영혜는 한그릇을 다 비워낸다.


이 장면이 영혜가 자해를 시도한 장면과 함께 등장하면서, 영혜의 채식 행위의 원인은 결국 어린시절 흰둥이에게 가한 영혜 자신의 폭력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키우던 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먹게 만든 건 아버지이지만, 그 모든 과정을 영혜는 지켜보기만 했다. 아홉살짜리 어린아이가 과연 아버지의 행동을 말릴 수 있겠냐마는, 영혜를 미치게 만든 기이한 꿈들의 근원에는 결국 영혜 자신이 행한 폭력에 대한 '죄의식'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한 생명을 죽인 방관자임을 깨달으면서 영혜는 채식을 하게 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그 공포스러운 꿈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혜의 죄의식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반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혜는 분명 자신이 행한 폭력과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속에서도 삶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채식을 하면서 영혜는 그렇게 살면 되었다.

한 인간의 죄의식과 반성, 그것에 대한 개선의 의지는 분명 살아서 꿈틀거렸다. 영혜는 그때까지만해도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렵게 찾아낸 삶의 방식을, 생의 의지를 부숴버린 건 가족들의 새로운 폭력이었다.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언니, 남동생 모두들.

그녀의 뺨을 때리고, 강제로 입을 벌려 고기를 먹이는 잔인한 폭력 속에서 아마 영혜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어린시절, 바로 그 '흰둥이'같은 존재라는 걸. 자신도 목이 매달려 그렇게 피가 솟구치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혜는 그때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가진 참된 인간이었던 영혜는 그렇게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부정되고, 버려진다.

영혜가 원하는 삶의 방식, 영혜의 욕망, 영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영혜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아직 그 실체도 없었던 정신분열증의 병까지 그녀에게 씌워진다. 세상이 바라보는 방식대로 그녀는 정의되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폭력이 바로 이것이다.


영혜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스럽게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속에서 삶의 방법을 찾아내었다.

채식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영혜의 강렬한 의지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왜 아무도 영혜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읽어내지 못하는거야?

그 연둣빛의 꿈틀거리는 눈부신 의지와 욕망을 어째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거야?


아무리 고통스러운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삶에서 밀어낼만큼 강력한 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것은 한 인간을 살게 만드는 근원이다.

'욕망'

언젠가부터 욕망이라는 단어는 밖으로 꺼내자마자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욕망이란 인간이 강렬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욕망이란 한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태양보다도 더 반짝이게 할 수도 있는 것임을.

그것의 긍정적 속성까지도 외면하는 것이 욕망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왜 현대사회는 한 개인의 욕망을 세상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타인에게 비호감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걸까?

겉으로 꺼내져서는 안되며 인간의 깊숙한 곳에서만 간직되어야만 하는 것이 마치 도덕법칙인 것 마냥, 욕망은 그렇게 아주 더럽고 은밀한 것으로 정의되어버렸다.

변질된 욕망의 뜻에서 순수한 욕망을 구분해내는 작업을 먼저 하지 않으면 이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왜곡될 것 같아서 앞으로 '순수한 욕망'이라고 언급할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을 추구하고 실현시키려 했던 두 사람이 바로 '영혜'와 그녀의 '형부'였다.

온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을 그리고 그것이 결합하는 행위였던, 그들의 정사 장면이 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정상인 걸까? 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어야 할 만큼. 이것을 글로 써내고 눈 앞에 그려볼 수 있게 해준 작가에게 무한히 감사하면서.


형부, 그는 영혜의 생에 대한 의지와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만든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이렇게 느꼈다.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영혜의 남편도, 아버지도, 언니도 영혜를 '말수가 적은'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지만 이토록 영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게 원통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영혜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대신 자신의 언어를 온 몸 속으로 흡수하고 품어온 것이다.

형부는 그녀의 육체에서 그녀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변태 성욕자로 보일 수 있겠으나, 영혜의 삶에 대한 욕망을 유일하게 알아본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비디오 영상 작가이다. "광고,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는 것"이 그가 해온 작업들이다. 그는 그것에서 환멸을 느끼며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거짓과 위선의 작업들을 하느라 밤새도록 시달렸던 순간들이 '폭력'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가 지향한 건 상업 쪽이 아니라 예술임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도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쭉 상업 작가로서의 일을 해온 것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폭력'이라고 직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영혜의 자해 시도였다. 영혜가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칠 때, 가장 먼저 지혈하고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건 바로 형부였다.

줄곧 방관자였던 그가 그렇게 필사적이 되었던 순간은 분명 그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십년이 넘도록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지면서 그를 처음으로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벌거벗은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이 그려져있고 그 나신들이 교합하는 장면. 그의 머릿 속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이미지이며, 영상 작업으로 만드는 것에 어떤 운명적인 갈증을 그는 계속 느껴온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부족했던 찰나에 아내의 말이 그를 비극으로 치닫는 예술을 하도록 만들었다.

'몽고반점'. 아내가 그에게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 온 이미지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의 '비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있어 영혜는 처제이기에,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고, 자신을 낯선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는 등, 그는 자신에게 도덕적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벌거벗은 몸에 꽃을 그리고 영상으로 촬영한다는 것을 그가 영혜에게 제안한 것이 영혜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미쳤다고 욕하며 제안을 거절했을테지만, 영혜는 수락한 것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한다.

오히려 자신의 나체에 꽃과 식물의 것들을 그리는 것에서 영혜는 생에 번뜩이는 감정들을 느낀다. 자신의 육체에서 자연의 일부를 꽃 피워낸다는 것이 영혜에게 있어, 그녀가 줄곧 벗어날 수 없었던 죄의식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녀가 연둣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삶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그녀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가졌었다.


형부가 처제의 알몸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그것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형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온 예술 작업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영혜는 채식 행위로도 씻어낼 수 없었던 죄의식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망은 일치했고, 그 결과가 바로 '몽고반점 1- 밤의 꽃과 낮의 꽃' 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그는 이 영상으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그는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된다.

그의 후배인 J와 영혜의 교합 장면 촬영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작업의 끝까지 지켜왔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영혜에게,

"내 몸에 꽃을 그리면, 그땐 받아주겠어?" 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들렸을까.


이 전까지 그는 영혜의 벌거벗은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면서도 성적인 느낌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태고의 것이며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는 그것에서 무한한 예술적인 영감을 느끼는 것에 압도되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영혜의 육체를 성적인 것이 아닌, 마치 조물주가 창조한 경이로운 것인 마냥 바라보았다. 그래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도 그는 숨죽이며 오로지 자신의 예술 작업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철저히 그의 외부에 존재해야만 했다. 그는 절대로 그 작품 안에 들어가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들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작업물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바로 전에 그는 일종의 고해성사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온 몸에 꽃을 그리고는, '석유를 부은 불처럼 타오르는 욕망' 을 품고서 영혜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적나라한 교합의 장면이 흘러나온다.

교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남녀간의 애정이 담긴 행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꽃과 줄기와 잎들이 서로 맞물리는 행위만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식물의 것도 아닌, 아주 기괴한.

(일본의 테라야마 슈지라는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예술가가 있었다. 그의 실험극 영화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영상 작업이다. 유투브에 영상이 있었지만 매우 기괴하고 선정적이라서 언젠가부터 볼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그의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형부의 영상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장면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그럴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욕망과 영혜의 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영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에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촬영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에게 계속 몸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죄의식의 근원을 직시하고 새롭게 살아갈 삶의 방식을 찾은 듯 해보였다 분명히.


그러나 내가 헷갈리는 건 형부인 그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알몸에 그림을 그리고 영상 촬영을 한 것이야 예술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이 반영된 것이지만, 그 또한 몸에 꽃을 그리면서까지 그녀를 탐하는 욕망은 과연 단순한 성욕일까 아니면 영혜에 대한 사랑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진 못했다.

한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건, 소설에서 묘사한 영혜와 형부의 성향에 대한 것들이다.

영혜도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고, 형부 또한 그런 성질의 사람이었다. 

둘 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비위를 맞추어 살아갈만큼의 면모는 없는.

사회로부터 부유하는 듯 살아가지만,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둘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직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폭력의 근원을 마주하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을 품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형부는 영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영혜에게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영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나르시시즘일까?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정작 현실에선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작업물만 만들어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이 영혜와의 관계에 투영된 그의 욕망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러나, 적어도 한 순간만큼은 내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설레었었다.

그가 자신의 온 몸에 꽃과 식물을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가는 장면.

그녀를 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한 순간 어떠한 형태의 사랑을 느꼈었다. 그의 발걸음 하나, 하나에 담긴 비장함과 숨결이 진실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비상'이다.

이 다음날 아침 영혜의 언니인 인혜에게 둘의 현장이 발각되고, 인혜는 구급차를 불러 영혜를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형부는 잠적한다.

영혜와 형부의 순수한 욕망이 그들에게 잠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현실 속 처방은 윤리적 잣대에 충실한 것이기에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영혜가 원했듯이, 또 예술작업의 일환으로써, 그녀의 몸에 형부가 꽃과 식물을 그리고 촬영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신이상자의 행동인 것이다. 나조차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러운 공감과 이해가 필요했으니깐.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형부에게 있어서는 예술가로서의 종말이고, 영혜에게는 정신분열증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구원'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도 한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신이라는 것.

나에게 가해진 폭력을 거두어 내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소설은 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떠한 것인지보다, 그것을 온 몸으로 흡수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만큼 몸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폭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폭력과 그것의 죄의식에 잠식된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나 강함 같은 성질의 것들은 오히려 영혜에게 있어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정말 영혜를 구하려고 했다면, 필요했던 유일한 건 가족들이 영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백화점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고, 자취방에 혼자 살면서도 자해를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형부와의 관계로 인해 결국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해답을 찾아낸다. '물구나무 서서 땅을 받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것'.

영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니 인혜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혜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뿐, 인혜조차도 영혜를 구원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구원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혜가 자신의 죄의식에 마주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영혜가 형부의 예술 작업 제안을 받아들이고, 온 몸에 물감칠을 하게 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갇혀 물구나무 서서 땅을 두 팔로 받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신도 나무가 되기 위해 영양분 섭취를 아예 끊어버리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온전히 이해되기 힘들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구원이라니. 


영혜는 자신의 내장이 퇴화해가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신의 육체에서 인간의 성분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게워내는 과정을 기꺼이 선택한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비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혜는 그렇게 기꺼이 죽음을 기대하고 맞이한다.


몽고반점 이야기에서 영혜는 식물이었다. 자신의 푸른 생명력을 그때까지만해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물은 허공에서 자라지 못한다. 결국은 땅 속에 뿌리내려야 살아갈 수 있다. 그녀는 나무불꽃 이야기에서 그 진실을 깨닫게 되고, 기어이 땅 속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이 아니기에, 푸른 빛의 생명은 나무가 되지 못하고, 영혜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마른 육체 안에 얼마 남지 않은 피마저도 토해내며 생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이 인정받지 못할 때, 삶의 방식이 존중받지 못할 때, 인간은 이렇게 절벽에 서게 된다. 추락하는 것 말고는 달리 살 길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의 모든 폭력들을 경계하라고, 마지막 장인 <나무불꽃>은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섭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의 잎사귀들을 '초록빛의 불꽃'이라고 묘사하는 장면에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을 영혜의 언니가 무언가에 항의하듯 어둡고 끈질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니의 눈빛에서 말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들을 독자들이 이어보길 바란다. 그것에서 많은 질문도 던져보고, 답도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굉장히 무거운 감정 속에서 한동안 힘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어떠한 공포 영화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건, 살아내었으면 한다.

영혜는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생에 대한 눈부신 의지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고,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것을 분명 꽃 피워내려고 했었다.

내가 이 소설에서 포착한 생명력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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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4-10-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주소(도메인) 변경을 하고 나서 그동안 제가 쓴 리뷰들이 삭제되었다고 접속이 전혀 안 되길래 제일 최근에 썼던 채식주의자 리뷰를 다시 삭제하고, 새로 작성해서 올려보았더니 그래도 서재 접속이 안되네요ㅠㅠ 제 채식주의자 리뷰에 좋아요 눌러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리고, 글 삭제해서 넘 죄송합니다ㅠㅠ 서재랑 글이 복구가 되어야 될텐테 걱정입니다ㅠ

appletreeje 2024-10-22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어떡해요? 전야제 님 주옥같은 리뷰들이 삭제되어서요. ㅠㅠ
부디 서재랑 글들이 복구되기를 빕니다!

전야제 2024-10-22 01:2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이 늦은 밤에 댓글 감사합니다ㅎㅎ 주옥같은 리뷰라니 칭찬 넘넘 감사합니다!! 제가 로그인해서 서재 들어가는 건 되는데, 제가 리뷰를 썼던 책에 있는 제 글을 클릭하면 삭제된 서재라고 전부 다 그렇게 뜨네요ㅠㅠ 심지어 핸드폰 어플로는 저도 접속이 안되구요ㅠ 일단 알라딘 고객센터팀에 문의글은 접수해놓았으니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길 바래봅니다ㅠ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주무세요^^

appletreeje 2024-10-22 01:37   좋아요 1 | URL
서재 복구 되었나 봅니다! 다시 글들이 다 보이고 이달의 당선작 리뷰도 보이네요~~
마음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전야제 2024-10-22 01:46   좋아요 1 | URL
우와 아까 저녁 9시 넘어서부터 계속 안됐는데 정말 이제 접속이 되기 시작해요ㅠㅠ 아직 책에서 리뷰 접속하는 건 안되긴 하는데 그것도 왠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ㅎㅎ appletreeje님 덕분입니다 진짜^^ 행복한 한 주 되세요!!
 
반추
박이도 지음 / 문학수첩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박이도,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은 오는가

무력했던 여름

비극의 환상이 언뜻언뜻

무더위로 사라진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어둠의 꺼풀을 벗고

먼동이 꿈틀대는 모습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순리를 보러가자


흥건히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이 육신을 세우고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을을 나서는 기침소리

가까이 흐르는 냇물소리


살아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차가운 소리

가을이 온다, 내 정신으로

살아온다


*******************************************************************************************

가을이 이렇게나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었던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가을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다른 시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을'을 떠올리면 보통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등의 하강하는 정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시에는 그러한 감정은 단연코 들어있지 않다.

가을이 오는가 보다, 라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기어이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겠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을과 '결연함'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그건 바로 전의 계절인 여름을 어떻게 살아내었는가와 관계가 있을것이라 추측해본다.

'무력했던 여름'과 '비극의 환상이 무더위로 사라진다'는 표현으로 보아,

표면적으로는 무더위에 무너졌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여름 동안 어떤 비극적 일들을 겪어 온 화자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 비극을 무더위에 실어 다음의 계절로 날려보내야 할 만큼.

그 여름이 가을을 대하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또한 처절하게 무력했던 여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손을 계속하여 뻗는 이의 간절함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던 공허한 빈 손. 그것을 지속해야만 하는 숨막힘.

간혹, 연과 연 사이에 가슴에 훅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문장이 존재하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나는 사실 이 한 문장에 꽂혀서 박이도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된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화자가 가을을 대하는 태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뜻이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의 정반대이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먼동이 꿈틀대는 것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의 웅장함을 포착하기 위해, 그 순리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마음이 꿈틀대었으면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일까.

생명의 일렁임을 강하게 품은 화자의 눈부신 설레임도 느껴진다.

그리고는 또 연과 연 사이에 있는 강렬한 한 문장, 이번에는 위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살아 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자신에게서 '모두'에게로 시선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화자의 생명에 대한 '포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비극의 환상 속에서 무력했던 여름 내내 존재하지 않듯이 살아왔을 화자는, 이제 그 몹쓸 환상 따윈 날려보내고선 마치 만물의 생명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의지가 단순히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강함이 아닌, '냉철한 이성' 속에서 나오는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기력했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당당히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화자의 장엄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화자는 모든 것이 스러져 낡아가는 가을의 낙엽과도 같은 것들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들, 아직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라는 어떤 외침이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계속 귀에 들려왔다. 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가? 모르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중에서, 부서지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력을 가을에 담아 노래한 시는 처음 본다.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과 이제 모든 것이 없어져가는 계절과의 대비가 미묘하게 조화롭다.

시인의 언어는 이토록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차가운 소리로, 차가운 공기로.

그러나 무기력했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이다.

아니,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간신히 잡은 감사함과 행운은 곧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빠져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앞의 행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테다.

체념과 포기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날과는 분명 다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아마추어는 자기가 좋을 때만 하고 싫을 때는 도망칠 수 있지만, 프로는 눈이 오나 비가오나 1년 365일 쉬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한다'는 것이다. 꿈을 이루는 일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싫은 것들, 귀찮은 일들, 피하고 싶은 고단한 노력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온 사람들이 '프로'이다.

나는 바로 그 '프로'가 되고 싶다. 아직은 애기 수준이지만. 멈추지 않고 걷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나의 꿈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것이라 믿고서.

불현듯 다시 살아나는 나의 의지와 박이도 시인의 시가 맞물려, 나 또한 이 시의 화자처럼 '결연함'을 품고서 새벽의 이슬을 들이키며 길을 나선다.


-> 박이도 시인의 시집 <반추>의 서문이다. 여기에 인용된 '젊어서 쓴 시는 무의미하며 평생을 기다려 노년기에 몇 줄의 시를 써야 한다.' 는 릴케의 어록이 심장에 비수를 꽂듯, 깊이 새겨졌다. 어쩌면 아직 노년기를 맞지 않은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쓸 수 없어도, 나이가 많이 들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어줍잖은 믿음.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재능이 없더라도, 혼자만이 알고 읽는 글이라 할지라도 계속 써나가고 싶다. 글 쓸 때의 자유로움. 그것은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진정 살아있다는 어떠한 증명을 보여준다. 읽히기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일 때.

시인은 내 최초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손 닿을 수 없는 창조의 영역이다. 시인의 언어는 깊고 푸르다. 푸른색의 '지구' 같다. 우주가 아닌 지구. 광활하고 애매모호한 우주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고 온 몸의 감각으로 제시해주는 한정된 세계. 시는 일상의 언어로 추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은 그 추상을 다시 눈 앞에 재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시를 읽는 것이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그의 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에 실린 시이다.

나는 그것이 이 시집 <반추>에 나온 줄 알고 구매했지만, 그래도 시인의 다른 시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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