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추
박이도 지음 / 문학수첩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박이도,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은 오는가
무력했던 여름
비극의 환상이 언뜻언뜻
무더위로 사라진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어둠의 꺼풀을 벗고
먼동이 꿈틀대는 모습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순리를 보러가자
흥건히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이 육신을 세우고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을을 나서는 기침소리
가까이 흐르는 냇물소리
살아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차가운 소리
가을이 온다, 내 정신으로
살아온다
*******************************************************************************************
가을이 이렇게나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었던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가을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다른 시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을'을 떠올리면 보통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등의 하강하는 정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시에는 그러한 감정은 단연코 들어있지 않다.
가을이 오는가 보다, 라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기어이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겠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을과 '결연함'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그건 바로 전의 계절인 여름을 어떻게 살아내었는가와 관계가 있을것이라 추측해본다.
'무력했던 여름'과 '비극의 환상이 무더위로 사라진다'는 표현으로 보아,
표면적으로는 무더위에 무너졌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여름 동안 어떤 비극적 일들을 겪어 온 화자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 비극을 무더위에 실어 다음의 계절로 날려보내야 할 만큼.
그 여름이 가을을 대하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또한 처절하게 무력했던 여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손을 계속하여 뻗는 이의 간절함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던 공허한 빈 손. 그것을 지속해야만 하는 숨막힘.
간혹, 연과 연 사이에 가슴에 훅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문장이 존재하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나는 사실 이 한 문장에 꽂혀서 박이도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된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화자가 가을을 대하는 태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뜻이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의 정반대이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먼동이 꿈틀대는 것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의 웅장함을 포착하기 위해, 그 순리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마음이 꿈틀대었으면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일까.
생명의 일렁임을 강하게 품은 화자의 눈부신 설레임도 느껴진다.
그리고는 또 연과 연 사이에 있는 강렬한 한 문장, 이번에는 위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살아 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자신에게서 '모두'에게로 시선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화자의 생명에 대한 '포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비극의 환상 속에서 무력했던 여름 내내 존재하지 않듯이 살아왔을 화자는, 이제 그 몹쓸 환상 따윈 날려보내고선 마치 만물의 생명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의지가 단순히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강함이 아닌, '냉철한 이성' 속에서 나오는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기력했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당당히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화자의 장엄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화자는 모든 것이 스러져 낡아가는 가을의 낙엽과도 같은 것들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들, 아직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라는 어떤 외침이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계속 귀에 들려왔다. 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가? 모르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중에서, 부서지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력을 가을에 담아 노래한 시는 처음 본다.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과 이제 모든 것이 없어져가는 계절과의 대비가 미묘하게 조화롭다.
시인의 언어는 이토록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차가운 소리로, 차가운 공기로.
그러나 무기력했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이다.
아니,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간신히 잡은 감사함과 행운은 곧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빠져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앞의 행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테다.
체념과 포기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날과는 분명 다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아마추어는 자기가 좋을 때만 하고 싫을 때는 도망칠 수 있지만, 프로는 눈이 오나 비가오나 1년 365일 쉬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한다'는 것이다. 꿈을 이루는 일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싫은 것들, 귀찮은 일들, 피하고 싶은 고단한 노력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온 사람들이 '프로'이다.
나는 바로 그 '프로'가 되고 싶다. 아직은 애기 수준이지만. 멈추지 않고 걷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나의 꿈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것이라 믿고서.
불현듯 다시 살아나는 나의 의지와 박이도 시인의 시가 맞물려, 나 또한 이 시의 화자처럼 '결연함'을 품고서 새벽의 이슬을 들이키며 길을 나선다.
-> 박이도 시인의 시집 <반추>의 서문이다. 여기에 인용된 '젊어서 쓴 시는 무의미하며 평생을 기다려 노년기에 몇 줄의 시를 써야 한다.' 는 릴케의 어록이 심장에 비수를 꽂듯, 깊이 새겨졌다. 어쩌면 아직 노년기를 맞지 않은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쓸 수 없어도, 나이가 많이 들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어줍잖은 믿음.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재능이 없더라도, 혼자만이 알고 읽는 글이라 할지라도 계속 써나가고 싶다. 글 쓸 때의 자유로움. 그것은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진정 살아있다는 어떠한 증명을 보여준다. 읽히기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일 때.
시인은 내 최초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손 닿을 수 없는 창조의 영역이다. 시인의 언어는 깊고 푸르다. 푸른색의 '지구' 같다. 우주가 아닌 지구. 광활하고 애매모호한 우주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고 온 몸의 감각으로 제시해주는 한정된 세계. 시는 일상의 언어로 추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은 그 추상을 다시 눈 앞에 재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시를 읽는 것이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그의 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에 실린 시이다.
나는 그것이 이 시집 <반추>에 나온 줄 알고 구매했지만, 그래도 시인의 다른 시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