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 사랑에 관한 뜨거운 탐구로 전하는 차가운 위로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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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을 내다보라. 수없이 많은 영혼이 질주한다.

누군가 당신의 인연이 될 수 있었고,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특별한가?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룬다. 이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어떤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인연은 전체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다.

그 인연은 바로 나 자신의 '나'와의 인연이다.

거기에 타자는 없다.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거미줄에 걸쳐진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 것이다.

그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기 때문이고,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랑의 배타성이 사라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_ 제 3장 <사랑의 가능성> 중에서 '사랑을 위한 사랑'의 일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나의 사랑을 먼저 고백하겠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을 지금도 품고 있으니, 진행 중인 사랑이기도 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평생 마음에 품을지도 모르는, 이 말도 안되는 경우가 세상엔 있다는 걸 글로써 수줍게 고백한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가? 나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무수한 시간과 경험 후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역시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수많은 방법론과 이론은 허망한 것임을.

이 책에서 말하듯, 전통 철학에서 플라톤이 확립한 '지성'은 사랑을 포착할 수 있는 도구가 절대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계가 나에게 주는 우연의 시간은, 우연의 그 사람을 내 눈 앞에 슬며시 내려 놓았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첫 눈에 반했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본 것도, 그가 나를 바라본 것도

우리의 눈이 마주치게 된 것은 계획된 것이 아닌, 우연이었으니.

그가 저만치에서 한 발을 다른 한 발 앞에 두며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사랑은, 비실증적인 그것은 그 때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 때 이후로 몇 년 동안 내 마음 속에 품은 사랑은 변하지 않고 계속 자리하고 있다.

어째서 나는 당신이 좋은 걸까?

내가 무언가를 한번 좋아하면 영원히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조중걸 작가님의 책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을 읽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

당신이 어떠한 성질의 사람이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운명이라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사랑에 끝없이 의미 부여를 하면서 우리의 사랑이 '운명'임을 강조하는 많은 연인들이 있지만,

조중걸 작가님이 이 책에서 짚어주신 것처럼, 사랑에는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건 오히려 사랑을 퇴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러나 사랑은 하나의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라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의미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공허 위에 무엇인가를 쌓았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기만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배타적 이기심과 감상을 쌓아올린다.

어떤 것이 '의미'를 입으면 그것은 세계에 돌출된다.

'의미'는 잔인하다.

종교는 '신'의 의미를 앞세워 많은 잔인한 일들을 저질렀고,

히틀러는 '민족'이라는 의미로 대량 학살을 저질렀고,

'가족'이라는 의미는 삶을 냉혹하고 이기적인 전쟁터로 만들었다.


어디에도 의미가 부여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의미가 아니다. 실재가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예수가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할 때 거기 어디에 사랑의 의미가 있는가?

예수의 사랑은 스스로를 포함한 무수한 만물이 세계이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_232,233p


내가 '나'이게 하는 나의 무한한 성질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다른 성질로 바뀐다면,

아마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난히도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성질의 것들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당신이 유약하고 섬세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유난히도 외톨이같이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풍경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당신이 홀로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런 '나'이기 때문에 나의 세계가 당신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나의 세계와 마음에 당신을 품게 된 것이다.

내 사랑에는 이토록 당신과는 독립된 세계가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당신과는 독립된 그 무엇이라는 걸.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라는 조중걸 작가님의 말씀이 정말 맞았다.


절망적이게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환희에 차오르는 느낌만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 이후에 나는 그 사람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혼자만의 마음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왜 그에게 고백하지 않느냐고?

왜 그 사람과 사귀지 않느냐고?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선 먼저 이 책의 '사랑'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바보같은 나의 사랑의 방식을 말해본다.

바보같다고 하겠지만,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품고 내 안에서 지키는 것이 나의 사랑이다.

조중걸 작가님은 그 '사랑'을 실증적이지 않은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연애(애정),섹스,혈연,결혼 등을 실증적인 것으로 먼저 분리를 하기 위해 철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논리를 펼쳐 나간다.

이것은 진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위한 자리를 남겨 놓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수도 없이 인용했고, 그것은 정말 탁월했다.

사랑이 침묵 속에 지나쳐야 할 것이라고, 말해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작가님께서 주장하시는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독자들 중에선 이것을 많이 오해하여 '사랑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 입을 다물라' 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따라서 사랑은 희구와 열망이지, 손에 쥐어지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를 세계 속에서 소멸시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인가와 하나가 되려는 열망으로.

소멸은 수양이고 열망은 사랑에의 충동이다.

이 둘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아슬아슬하게 사랑의 희끄무레한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_239,240p

 

이 구절에서처럼, 우리가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베어나감으로써 '사랑을 위한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타인이 느끼지도 못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 '비실증적'인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될 수 없는 그것은 실증적인 것이 아님을 작가님은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작가님은 사랑을 굉장히 특별하고 고귀한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

사랑에서 의미, 감성, 감상, 실증적인 것들을 모두 베어냈을 때 남아있는 그 '무엇'에 독자들이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건 사랑을 품어본 적 있는 누구에게든 존재하는 '그것'일테니.


여기에서 나의 사랑의 방식도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님을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사랑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탄생했다고 하자.

비실증적인 그 '사랑'이 실증적인 연애,애정,섹스,결혼,출산,혈연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다.

실증적이지 않은 것과 실증적인 것은 독립되어 있다.

즉,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연애나 섹스,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랑은 실증적이지 않다.

아무리 이것을 원인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이것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강렬한 그 마음, 사랑이 반드시 실증적인 것들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존재하는 사랑이 보이는 것으로 그 정체를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애정을 기반으로 한 '연애'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지,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려는 욕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욕심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초월적인 사랑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에 가두어져 있다가, 인간 세계에 실존하는 것으로 꺼내어지는 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땐 바로 그 비실증적인 사랑이 실증적인 것들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헌신, 자기 희생, 친근감, 그리움, 애정, 질투, 실망, 분노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랑의 결과나 요소이거나 사실은 사랑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들이지,

사랑 자체는 아니다.

이것들을 다 합쳐도 사랑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느낌으로 이미 안다. 사랑은 이것들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고.


_43p


왜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드러나야 하는 걸까?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아무도 만질 수 없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인데,

우리들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것을 현실 세계에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고이 잘 간직되어 있는 사랑을, 기어이 열어서 밖으로 꺼내고야 마는 걸까?

이것이 연애나 결혼이 가진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태초에 품었던 열렬한 사랑의 마음은 지금도 당신들에게 남아있는가?

아니, 그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가?

그것은 연애와 결혼 생활 속 그 어떤 행위들과도 독립된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연역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연애와 결혼 생활 속에서 현존하는 것들로 사랑을 채워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형태를 갖지 않은 사랑을, 현실 속에서 저마다의 형태로 존재하게 만들었으면서.

그 선택에 대한 고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괴로울 때가 있다.

나는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용기내서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을 그저 품고만 있는 나 자신이 때로는 겁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불확실한 성질의 그 사랑을 굳건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겁쟁이가 아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사랑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무언가라고 했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어떠한 것은 비록 그 형태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너무 불안해한다.

그 불확실성을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어째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벽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이것이 실제적인 행위들로 서로 간에 오고 가야, 그제서야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일까?

나는 그런 점에서 회의적이다.



'운명적 만남'은 없다. 세계는 우연이고 만남도 우연이다.

그저 숙명으로 말해지는 우연이 있을 뿐이다.

왜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할까? 왜 '필연'이라는 것을 강조할까?

인간은 왜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인간은 자신의 전락에 대한 피난처를 예비하고자 한다.

운명은 모든 전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은신처이다.

그와 나의 결합은 운명이다. 그리고 필연이다.

운명은 그와 나의 가치와 행위를 넘어서 있다.

따라서 어떤 조건에서도 우리의 만남은 그 자체로 영속된다.

운명을 고집하는 것은 전락할 권리를 획득하려는 것이다.

운명은 여자들 사이에서의 그녀와 남자들 사이에서의 그의 배타적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계속되는 개인적 전락에도 불구하고 둘의 결합은 영원하다.


_226,227p


'운명'에 대해 이토록 명석하게 분석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심리학에서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째서 운명을 끌어들여 마음의 안정을 찾는가'에 대한 이론이 있을 것 같다.

현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인 '우연'은 인간에게 매우 불확실한 느낌을 선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확실한 그 무엇으로 치환하기 위한 행동들이 우리가 매일 하는 선택들이다.

그래서 행동은 비합리적인 성질을 자주 띠게 된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 때문이다.

조중걸 작가님은 이것을 '자신의 전락에 대한 피난처를 예비하고자' 한다고 표현했다.

매우 정확하다. 우리의 실패와 추락, 그 모든 전락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운명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모든 비극이 '운명'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깐.


연인들은 잘 알고 있다. 사랑은 비실증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그래서 서로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그들이 끌어들이는 이론이 바로 '운명'인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마음 속으로는 잘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하고자 사랑을 '운명'으로 치환한다.

그럼, 그 어떤 변화에도 서로의 사랑은 영원하게 될테니깐.

이것이 연애 관계에서 오는 불행 중 한 모습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한대도,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변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변화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미련이고, 억지를 부리는 것.

아무리 처절하게 상대의 마음을 부여잡는대도, 이미 변한 마음은 예전 그 마음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실려 가면 된다.

우리는 얼마든지 안일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방탕하고 전락할 수 있다.

삶이 어떻다 해도 운명에 따를 뿐이니깐.

그러나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리에겐 최선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도 우연이고 내일도 우연일 것이다.

우리를 벗어난 어떤 것도 삶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함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우연에 처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순간을 사는 것이다.


_227,228p


자,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인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조금은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

불확실함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을 어찌 해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선, 모든 것을 운명으로 엮으려는 생각을 베어내야 한다.

운명 탓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데에서, 우린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된다.

운명이 모든 질서를 정하려는 성질의 것이라면, 우연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를 밀어내지만, 우연은 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설령, 우리의 용기있는 행동이 만족할만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게 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최선'을 다했음에 행복하다.


사랑은 바로 '우연'의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우연은 불확실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최선이 예상하는 결과에서 빗겨간대도, 

순간을 살았던 우리들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우연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날들이 먼 훗날 우리가 간직하는 추억이듯이.


 

세계는 단일하다. 그리고 이 단일자는 거미줄을 가진다.

수없이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우리는 그 거미줄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나의 연인,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등은 이 수많은 거미줄에 같이 걸쳐졌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거나 결단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선택은 없다. 수없이 많은 우연 가운데 그 우연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우연 속에서 서로가 맺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인연에 매이고 말았다.

그만큼은 행복과 슬픔, 환희와 만남이 공존하게 된다.

어쩌겠는가? 어떤 우연이 우리를 그렇게 엮고 말았는데.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할 일만 남는다. 

말한 것처럼 선택 자체가 우연이었다.

이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우연에 대해 우연 자체를 살자는 얘기이다.

이것이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그가 필연적으로 나의 남편일 이유도, 아이가 나의 아이일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이 우연이다.

그렇게 우연히 우리는 해체될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배타적일 수가 없다.

어디에도 운명이나 필연은 없기 때문이다.


_249p


작가님이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만약 그 사람과 결혼한 것을 나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선택 앞에서 우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끝없이 그 선택을 평가하며, 후회하며, 상대를 부정하며,

나와 그 사람의 세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우월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한다면

나와 함께 하는 그 사람과 나의 아이는, 그저 같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우연으로 묶인 존재들에게 '위계'란 없게 된다.

어떤 누가 더 위에 있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으며, 모두가 '동등'하게 얽혀있는 존재들이다.

우연으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남아있게 된다.

작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책임이 아니라 '우연 자체를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현실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실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있어 최상의 처방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을 앞서 말했듯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린 '대가'로 대할지,

아니면 내게 주어진 '우연'에 대한 감사와 행복의 마음으로 대할지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그는 '그의 세계'이다.

우린 애초에 독립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가진 사랑의 마음도 서로에게서 독립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탄생할 때 초월적인 존재로서, 현실 세계가 아닌 '초월적인 곳'에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이 현실 속에서 형태를 가지고 실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게 연애, 섹스, 결혼 등이라면,

우린 판도라의 상자를 열은 대가를 치르는 것도,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모두 감당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을 알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의 세계뿐만 아니라, 상대의 세계도 파멸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사랑이 파멸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부디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조중걸 작가님의 책은 '사랑이 오로지 사랑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따뜻한 처방전이다.



우리는 자신을 묘사할 수 없다.

묘사는 대상 밖에서 안을 바라볼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하나의 그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그림의 대상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_206p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 속에서만 품고 있는 것이 나의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이 숭고하다거나 고결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에도 그것만의 배타적인 숭고함과 고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사랑의 방식이 유난히 더 특별하지도 않고, 고귀하지도 않다.

그저 '나'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사랑을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 두려는 것. 이것도 사랑의 하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저 사랑이 연애나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결합한다고 해서, 함께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기꺼이 바라보고,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내가 세상에 존재함을 삶의 순간마다 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세계 속에서 시작하고 완결되는, 나만의 사랑의 방식이다.

짝사랑과 비슷하겠다.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으니.

혼자만의 마음으로 영원히 간직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과 행복을 주기도 한다.

고통에서 오는 쾌락이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오는 초월적인 에너지를 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것 외에 더 무엇을 바라거나 욕심내지 않을 뿐이다.

내 안의 사랑을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내 사랑의 본모습이다.

나는 그런 욕망을 감당하기엔 너무 유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라, 심장 터질 듯 들뜨는 사랑의 마음도 겨우 품을 만큼인데

이런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왜 자신과의 승부를 걸지 않는 것일까?

모든 결의와 성취는 스스로에게 수렴된다.


제 1장 '사랑은 무엇인가?'에서 <허영>의 일부.


조중걸 작가님께서 이 책에서 말씀하신 사랑의 본질에 도달하다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예전부터 계속, 이상하게 내 머릿 속에서 자주 그려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하얀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 내려앉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 노란 꽃을 피워내는 것.'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자주 이런 풍경을 그려보고는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민들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홀씨들을 만들어 낸다.

바람이 그것을 대기 중에 날려보낸다.

어느 홀씨가 어디에 뿌리를 내릴지는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없다.

'우연'인 것이다.

홀씨와 땅이 맺는 관계는 정말 우연인 것이다.

그 땅이 방사능 물질 가득한 땅일 수도 있고, 쓰레기장에서 흘러나온 악취 가득한 땅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홀씨는 어디에든 뿌리내려 노란 꽃을 피운다.

이것을 민들레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서 사랑의 참모습을 본다.

연약한 홀씨에게 주어진 '우연'의 요소들 앞에서, 홀씨는 우연 그 자체로 살아간다.

거기에 어떤 감정이 있고 어떤 비극이 있겠는가?

바람이 홀씨를 날아가게 만든다고 해서,

땅이 비옥하지 않다고 해서,

대기의 자연현상이 그를 떨게 만든다고 해서,

민들레 홀씨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홀씨는 홀씨의 세계이고, 홀씨가 민들레로 성장하는 데에는 세상의 많은 요소들과 관계하지만

결국 홀씨가 노란 꽃을 피워내는 데에는 홀씨 자신의 '사랑'이 존재한다.

홀씨는 어떤 우연들과 엮이게 되더라도, 민들레가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자신 안에서 완결되는 사랑'을 기쁘게 느껴본다.

이 사랑이 내가 추구하는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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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9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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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9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30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25-01-30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유난히도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성질의 것들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내가 유난히도 외톨이같이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풍경을 좋아한 탓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전야제 2025-01-30 14:55   좋아요 1 | URL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게 되더라구요. 신기하게도.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