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우울'이라는 것도 같이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내 등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심장을 관통하고, 마음을 어지럽히고, 머리 속까지 파고들어 결국은 이성까지도 마비시키는.
이 무시무시한 괴물은 언제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우울은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을 쌓으라고 지시하기도 하며,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도록 가두기도 한다.
방에서 한 발자국 나가는 일도 어렵게 만들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조차도 포기해버리게 만든다.
사랑도, 희망도 우울 앞에서는 그다지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도 우울 속에서 나를 꺼내주지는 않는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 말했던, 나를 환희에 차오르게 만들었던 '희망'은
때로 내 열정에 환한 촛불을 켜주기도 했지만,
얼음같은 우울의 세계에 들어오는 순간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겨우 그 정도의 작은 촛불일지도 모른다.
이소무라 유키코의 연주곡 <風の住む街>을 들으면서 어떤 외로운 풍경이 생생히 그려졌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없다는 것.'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리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바람이 느끼고 있을 공허함이
있는 대로 모조리 나에게로 날아와 나를 한없이 공허하게 만들었다.
공허한 감정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텅 빈 내 몸 그 자체이다.
육체는 살아있다는 이유로 잠시도 쉬지 않고, 혈액이 온 몸을 돌며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고
체온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영양분을 갈구하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그것들을 채워주지 않는다면 육체는 텅 빈, 바람 빠진 고무 풍선같은 존재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 지금 앉아있는 곳의 역사를 떠올린다.
100년 전에 이 곳에 앉았던 사람의 생활을, 고뇌를, 우울을 상상해본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미 죽어 없어진 오래 전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한 때 그들도 살아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배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동을 하고,
생을 끝내게 만들어버리는 병마에 맞서 싸우고,
각 시대에 투쟁해야만 했던 신념과 적과도 싸우고,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무너지기도 하고,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와중에 자신도 곧 떠날 채비를 하고.
그렇게 탄생과 소멸을 거치면서 역사는 계속 되어 왔다.
한 때 이 땅에 태어났었고, 잿빛 가루가 되어 다시 지구의 성분으로 돌아갔을 수많은 생명들.
그들의 우울과 나의 우울이 맞물리는 순간,
그것의 정체는 두려운 것에서 초라한 것으로 모습을 바꾼다.
나를 고통스럽게 짓눌렀던 거대한 우울이, 한없이 초라해져 발에 밟히는 어떤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생명과 우울의 거리를 그렇게 잔뜩 늘려보기도, 줄여보기도 하면서
생은 흘러간다.
우울은 역사 속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 되었든 우리들은 생에 최초로 태어나고 최후로 살아가는, 세상 단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우울'은 필연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운명인 것이다.
단지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간은 우울과 한 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깐 우울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다.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하며 나를 농락하는 존재, 그것이 '우울'이라고 하면 조금 와 닿을까?
그것은 그렇게 내 등 뒤에 딱 붙어 죽는 순간까지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것.
이쯤 되면 우울이란 것은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는 내내 함께 하는 것이니 당연히 애증의 관계가 될 수 밖에.
그러나 우울은 마냥 우리를 무기력하게만 만들지는 않는다.
우울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우울이 보여주는 인격의 아주 다양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우울은 우리를 환희에 차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다름 아닌, '우울'이라는 녀석이 하는 일이다.
영화 <체리향기>에서 죽으려고 나무에 밧줄을 동여매다가, 부드러운 촉감의 체리를 손에 잡고 그 달콤한 맛으로 죽으려는 생각을 바꿨다는 '바게리'씨처럼.
우울은 한순간 변모하여 갑자기 체리가 되기도 한다.
붉고 탐스런 체리의 맛과 향기가 죽으려던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한다.
체리가 불러일으킨 생에 대한 의지가 어디 정체 모를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살아야겠다는 마음 또한 내 마음에서,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는 우울에서 오는 것이다.
우울은 죽음이 아니다. 그 둘을 같은 취급하면 우울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우울이 가진 수많은 인격을 느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울이 우리를 잠식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녀석은 나를 열정에 불타오르는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모든 것을 꼴보기 싫다는 마음으로 은둔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파괴의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미친 사람처럼 춤추게 만들기도 한다.
우울은 그런 녀석이다. 나를 끝없이 농락하고야 마는.
그러나 우울 때문에 한없이 힘들고 괴로워 세상 모든 무게가 내 몸에서 느껴지고,
우주의 법칙인 중력마저 철저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속수무책으로 그저 온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버틸 뿐, 더 무슨 해결책이 없을 때이다.
그럴 때마저도 내 등 뒤의 우울은 갑자기 어디서 또 나를 희망에 차오르게 만드는 무엇을 끌어다 준다.
우울이 나의 귀를 열고, 청력을 높여 내가 들어야 할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향하게 만든다.
유튜브를 보다가 최근에 <한일 톱텐쇼>라는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른 '나카시마 미카'의 영상이 눈 앞에 딱 등장했다.
무기력했던 마음이 갑자기 일어나는 기분에 나도 놀랐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한국어로 번역하면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제목 그대로 우울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은 이 노래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려 달라'라는 구호의 의미로 들렸다고도 한다.
그만큼 이 노래에는 '살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너무 좋아했던 노래였지만, 잊고 있었던 노래.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때, 그 처절하고 아름다운 가사가 자막으로 등장할 때, 나는 무너졌다.
좋아서. 너무 아름다워서 주저 앉았다.
그렇다. 이제야 알았다.
아름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안의 어둠도 함께 조명되고야 만다.
숙명이다. 어쩔 수 없는. 빛과 그림자는 뗄 수 없는 거니깐.
우리가 삶에서 너무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추악한 것들을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내 안의 아름다움이 성장할수록, 내게서 그것과 반대되는 속성의 것들이 뿌리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울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도 보게 만들지만, 동시에 추악함도 보게 만든다.
한쪽만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권태나 고뇌,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우울 때문이 아니다.
우울 탓으로 돌려 죽음으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냥,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슬프고 힘든 것이다.
내 우울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 우울은 나를 살리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무한한 용기와 영감으로 꿈꾸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은 끝나지도 않고, 끝나서도 안되는 나의 '또다른 나'인 것이다.
거리를 두고 좁혀가기도, 멀어지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나카시마 미카가 분홍과 보라빛의 오묘한 조명 속에서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를 부를 때,
그녀가 두 팔을 벌려 마치 모든 사람들의 우울을 끌어안는 듯,
자신의 우울을 환영하는 듯,
그녀가 보여주는 거대한 포용에 넋을 잃었다.
그녀의 열정 가득했던 음악 인생에도 절벽같은 시련이 있었다.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병 앞에서도 피하지 않고 무대에서 노래하고자 했던 그녀의 의지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나에게 날아와, 나를 또 날아오르게 만든다.
나의 우울이 나의 귀와 마음을 또 다시 연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달라지는 건 언제나 나이다.
노래 가사 중에 나카시마 미카 본인도 울컥했다고 한 부분이 있다.
나 역시 이 가사에서 마음이 아팠다.
死ぬことばかり考えてしまうのは
죽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은
きっと生きる事に真面目すぎるから
분명 삶에 너무 진심이기 때문이야
진심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실패나 거절은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든다.
삶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마음.
무엇 때문에 삶이 힘들든
나카시마 미카에게도, 나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이 마음은 숙명과도 같다.
힘든 이유는 달라도,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든 똑같이 주어진다.
그래서 음악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 다시 환희에 차오르며 내일을 살아간다.
(YouTube 나카시마 미카 노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1_oSburh70&list=RDGMEMCMFH2exzjBeE_zAHHJOdxgVMj1_oSburh70&index=1
나카시마 미카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ウミネコが桟橋で鳴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괭이갈매기가 부두에서 울었기 때문이야.
波の随意に浮かんで消える過去も啄ばんで飛んでいけ
물결에 밀려오는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과거도 쪼아먹고 날아가렴.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誕生日に杏の花が咲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생일에 살구꽃이 피었기 때문이야.
その木漏れ日でうたた寝したら虫の死骸と土になれるかな
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 얕은 잠에 들면,
벌레의 시체와 함께 흙이 될 수 있을까?
薄荷飴,漁港の灯台,錆びたアーチ橋,捨てた自転車
박하사탕, 항구의 등대, 녹슨 아치형 다리, 버려진 자전거
木造の駅のストーブの前まえでどこにも旅立てない心
나무로 지어진 역의 난로 앞에서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마음
今日はまるで昨日みたいだ明日を変えるなら今日を変えなきゃ
오늘은 마치 어제와 같아. 내일을 바꾸려면 오늘을 바꾸어야 해.
分かってる分かってるけれど
알고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心が空っぽになっ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마음이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야.
満たされないと泣いているのはきっと満たされたいと願うから
채워지지 않는다며 울고 있는 것은 분명 채워지고 싶다고 바라기 때문이야.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靴紐が解け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신발끈이 풀렸기 때문이야.
結びなおすのは苦手なんだよ人との繋がりもまた然り
매듭을 다시 바로 묶는 건 서툴단 말이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少年が僕を見つめてい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야.
ベッドの上で土下座してるよあの日の僕にごめんなさいと
침대 위에 엎드려서 조아리고 있어. 그 날의 나에게 미안하다며.
パソコンの薄明かり,上階の部屋の生活音
컴퓨터의 희미한 빛, 윗 방의 사람 사는 소리들
インターフォンのチャイムの音,耳を塞ぐ鳥かごの少年
인터폰의 차임벨 소리, 귀를 틀어 막는 새장 속의 소년
見えない敵と戦ってる六畳一間のドンキホーテ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다다미 여섯 장 단칸방의 돈키호테
ゴールはどうせ醜いものさ
Goal은 어차피 추할 뿐이야.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冷たい人と言われ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愛されたいと泣いているのは人の温もりを知ってしまったから
사랑받고 싶다며 울고 있는 것은 사람의 따스함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야.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あなたが綺麗に笑う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네가 아름답게 웃고 있어서야.
死ぬことばかり考えてしまうのは
죽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은
きっと生きる事に真面目すぎるから
분명 삶에 너무 진심이기 때문이야.
僕が死のうと思ったのはまだあなたに出会ってなかったから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 아직 너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야.
あなたのような人が生まれた世界を少し好きになったよ
너 같은 사람이 태어난 세상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
あなたのような人が生きてる世界に少し期待するよ
너 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조금은 기대해 볼게.
->영화 <체리향기>중에서.
조금만 있으면 봄이 된다는 사실이 당신을 기쁘게 할까?
나에게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딱 하나 있다.
언제나 이 이유는 변하지 않고 계속 되어 왔다.
마치 봄을 대하는 의식처럼, 내가 봄을 기다리는 단 하나의 이유.
레미오로멘(レミオロメン) 의 <3月 9日>
나는 3월 9일에 항상 이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가 나에게 상징하는 것을 흠뻑 느끼고, 봄을 느끼고, 생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
매년 내가 의식처럼 하는 일이다.
인생 전반에 걸쳐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추억 그 자체이다.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기도, 꿈이기도, 현실이기도 한.
나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瞳を閉じればあなたが
눈을 감으면 당신이
まぶたのうらにいることで
눈꺼풀 뒤에 있다는 것으로
どれほど強くなれたでしょう
얼마나 강해졌는지 몰라요.
あなたにとって私もそうでありたい
그대에게 있어서 나도 그런 존재이고 싶어요.
花さくを待つ喜びを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는 기쁨을
分かち合えるのであればそれは幸せ
서로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겠죠.
다가오는 봄을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