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글들은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그냥 잡스러운 글들입니다.
평생 한번도 글짓기를 배워 본 적 없는 사진쟁이가 쓴 글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사진을 찍으며 했었던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을 누구에겐가 한번쯤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모든 사진들은 하나 빠짐없이 엄마가 무쇠솥에 장작불로 지어주시던 밥처럼
옛날 사진기에 필름 넣어 찍어낸 나의 피붙이들입니다."
_안승일 <우리 동네 꽃 동네>의 서문 중에서.
백두산에 올라 북녘 산하를 보며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나. 여기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전율을 느꼈다던,
안승일 사진 작가.
그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쳐 찍은 사진들과 날 것 그대로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은 자연의 것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그에게서 물아일체의 경지가 느껴졌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산과 들에서 살아 온 사람이다.
거칠고 서툴지만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왔다.
꽃 앞에 카메라를 떡 하니 세워 놓고 마치 자연 위에 인간이 있다는 듯 멋대로 셔터를 눌러 대는 사진가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는 먼저 꽃에게 대화를 건넨다. "사진 한번 찍어도 될까요?"
꽃의 표정을 살피고, 그의 언어를 느낀다.
온 몸으로 꽃과 마음을 주고 받는다.
꽃이 허락할 때, 그제서야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인간 생각의 잣대로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연을 유린하지 않는다.
사람이 원할 때가 아니라, '자연'이 원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진가이다.
그는 어젯밤 비바람 속에 지친 꽃들에겐 사진 찍자고 하지 않는다.
이토록 생명체 하나 하나를 사람 대하듯, 아니 그보다 더 귀중하고 섬세하게 대한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과 온전히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자연의 사진을 찍는 사람.
진짜 자연의 사진을 찍는다는 건 바로 이런 태도가 먼저가 아닐까?
사진에 대한 그의 장인 정신은 바로 여기에서 예술이 된다.
안승일 사진가의 소중한 사진 인생이 담긴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인생도 돌아보았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지난 1년을 돌아보다가
하나의 인생 전체를 돌이켜본다.
'투쟁'
지난 날의 나는 무엇을 그토록 이기려 했는지,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하여 끝없이 투쟁해온 것 같다.
잡초 하나조차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늑하고 거룩한 대지를 만들어 모든 생명을 품어내는 것처럼,
자연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인데.
나는 포용에 거부하고, 혼자서 나의 길이라 믿는 것을 의심하며 확인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성질이 아니다.
길은 알고 갈 때가 아니라, 걸어감으로써 생기는 것.
'산과의 투쟁에서 내가 이기려 함이 아니다.'
'바람과의 대결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자연과 삶과 운명에 맞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인생은 바로 이런 것임을 깨달았다.
격렬하게 흔들렸던 지난 날의 내가, 이제서야 인생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보고, 품고, 느끼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내가 본 아름다움을 나의 일에 담아, 내 손으로 다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
'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아마 내년의 나는 조금 더 달라져 있겠지.
하지만 삶에서 아름다움을 더 보고 느낄 것이라는 기대감에 온 몸이 떨리기도 한다.
내가 만나게 될 세상과,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세상 속으로
용감하게 들어 가보자.
다가오는 2025년에는 이런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보자고,
나에게 말해본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위대한지,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러 가보자."
*이제부터는 안승일 사진 작가의 <우리 동네 꽃 동네> 속 사진과 글이 나옵니다.
절판된 책이라서 많은 분들께 닿질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여기에서라도 소개해봅니다.
자연과 친구가 되어 한 평생을 산과 꽃 사진으로 채워 온 안승일 사진작가의 순수한 마음을 느껴보세요^^
바람이 뭐라고 속삭이며 지나가는 줄 알아요?
당신이 예뻐 눈이 시리대요. 당신이 너무 예뻐 눈이 시리대요.
내가 먼저 수작을 걸었다.
"사진 한번 찍어도 될까요?"
그녀는 볼을 약간 붉힌 채 그대로 가만히 있다.
그래도 그녀의 눈빛은 내가 실없는 난봉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설치했다.
파인다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웃어주는 듯 하다. 가슴이 뛴다.
나도 그녀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이 작은 꽃을 사진 찍으며 생각했다.
숲 속을 다닐 때 조심해야겠다.
잘못하면 그녀를 밟아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선상님, 꽃 사진 어떻게 찍나요?"
"꽃을 찍으려구요? 그냥 꽃이 되세요."
들에서 그녀와 함께 피어나고
그녀가 마시는 샘물을 함께 마시고
들에서 산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야지요.
그래서 당신도 들꽃일 때 사진도 되지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인화지에 꽃들을
복제해 놓으면, 옮겨다 놓으면
그녀는 금새 시들어버리고 말지요.
우선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당신 이름이 뭐지요?"
"닻꽃."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음이 통하면
이제는 카메라를 꺼내도 되겠지요.
그녀의 표정을 잘 살펴보세요.
살아있는 사진이 될 것입니다.
시들지 않는 싱싱한 사진이 될 것입니다.
향기 탐스러운 사진이 될 것입니다.
사진은 사진이니까. 사진은 진실하니까.
가장 가깝게 진실을 전할 수 있는 방법.
그런데 내 가슴 속 아주 깊은 데까지
넘실대는 이 꽃내음과 그들의 속삭임들은
정겨운 그녀들의 노랫소리는 또
어떻게 사진에 담아낼 수가 있겠는가.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신이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경지를
인간이 넘볼 수 없을 것 같으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온몸으로 빗방울 머금은 달구지풀이 금빛 햇살을 향하여 두 팔 활짝 벌린 자태가 너무 아름답다.
바라보는 나조차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다.
꽃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사진작가의 마음이 돋보인다.)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사진이 될 만한 꽃을 찾아 숲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라도 만나면 말을 건넨다.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우리는 서로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다.
인간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곳에서도 꽃들은 피어난다.
당신, 이 험한 겨울을,
그 지독한 날들을
그 깊은 산 속에서 어찌 살아내는가.
긴 겨울을 어찌 견디어 살아내고
그리도 고귀한 꽃을 피워내는가.
당신과 나 멀리 떨어져 있어
당신과 나 더욱 더 가까워진다.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고산화원을 저렇게 피워내는 것은
빛이고 바람인 것이다. 풍광으로 살아난다.
그런데 이 구절초들은
며칠 밤낮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미친 바람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어대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끄덕도 없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그렇게 열매를 맺으면 바람은 또 한번
구절초의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줄 것이다.
그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꽃들을 위해서 바람은 그러는 것이다.
산을 사진찍는 일은 기다림이다.
산정은 혹독할 꺼라는
산 아래 사람들의 상상은 틀리다.
모든 게 풍요로운 눈 속은 그래서 따뜻하다.
욕심내지 않고 자제하며 사는 게 눈 속의 삶이다.
산을 사진찍는 일은 기다림이다.
꼭 무엇을 찍어야겠다는 급한 마음을 달래고
산과 함께 살며 산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조바심 치면서 기다릴 수는 없다.
가끔씩은 지독한 외로움에 서럽기도 하지만
나는 기다림의 시간을 즐기며 사는 또라이다.
새싹을 흙 위로 끌어 올려주는 봄날의 대지
연하디 연한 새싹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천하장사도 아닌데.
겨우내 눈에 짓눌리고 바람에 다져진
딱딱한 땅을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는가.
봄볕과 바람은 밤새워 봄서리를 만들고
그들 셋이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합해서
그 애어린 순이 다치지 않고 땅거죽을
뚫고 나오게 도와주는 것이다.
흙덩이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도록
손을 잡아 대지 위로 끌어올려 주는 거다.
한번쯤 봄날의 대지를 만져보라.
아주 잘 익은 카스테라나 솜사탕보다
더 부드럽고 따뜻할 것이다.
살짝 건드려도 부러질 꽃고비 새싹들.
그 가녀린 생명들은 그렇게 해서
봄을, 푸르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을 싹틔우고 살찌우는 것이다.
형광색 꽃무리 속에 취하면 영혼마저 빼앗기는 수가 있지요.
달빛이 파랗게 부서지는 밤에 한번쯤
들판으로 달맞이꽃을 맞으러 가 보세요.
그 눈부신 형광색 꽃무리 속에 취하면
영혼마저 빼앗기는 수가 있지요.
깊은 산 속보다 자동차길 옆 여기저기
가까운 들판에 많이 살고 있으니까
차 몰고 가다 한번쯤 관심 가져 보세요.
너무 성급하게 달리지 말고, 뛰지 말고
쫓겨다니듯 힘겹게 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가끔씩은 무거운 짐 벗어 던져버리고,
조금만 나가면 달맞이꽃들이 기다릴테니.
달밤에 바람을 타고 춤추는 그 꽃들은
잠 못 들어 밤을 헤매는 날벌레들을 위해
세상사에 지친 당신을 달래주기 위해
온밤을 그렇게 춤을 추는 거지요.
온밤을 그렇게 피어서 기다리는 거지요.
밤마다 그렇게 기다리며 사는 거지요.
그리움, 돌아갈 곳이 있어 다시 힘을 내.
그보다 더 견디어내기 어려운 게 있다.
그리움이란 거 그거 참기 정말 어렵다.
보고싶은 마음 저 벌판 끝까지 꽉 차버린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없으면
나는 이 고된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들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돌아갈 곳이 있음으로 나는 힘을 얻는다.
나는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이 일을 한다.
나의 사진을 알고 기다려주는 그들을 위해.
백두산 고산화원에서 꽃들도 행복해서 기립박수, 기립박수!
일에 지쳐 곤하게 잠들어 있는 그 사람.
가만히 들여다 보아 주세요. 착한 그 사람.
당신 위해 얼마나 마음쓰고 있는가.
나의 그 못나고 급한 성질 죄다 받아 주고
제 모든 걸 내게 다 주고, 그래도 좋아, 그게 좋아
편한 얼굴로 잠든 그 사람, 이쁜 그 사람.
내일은 당신 끓인 우거지국이 제일 맛있다고
아주 맛나다고 진실을 진실로 말해주고
모든 시름 제쳐두고 백두산에 한번 와보세요.
환웅을 지아비로 맞은 곰네의 신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엿보러 한번 와보세요.
그 사람 얼마나 좋아할까요.
행복한 두 사람 보면 꽃들도 좋아하겠지요.
화장하지 않은 당신의 깨끗한 민낯이
이슬묻은 꽃들보다 더 이쁘다고
저 많은 꽃들보다 훨씬 더 이쁘다고
아주 큰 소리로 말해도 꽃들은 질투 안하지요.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스런 그 사람
꼬옥 안아주세요.
백두산 고산화원에서
꽃들도 행복해서 기립박수, 기립박수!
질 때를 알기에 피어 있을 때 더욱 고귀한 것
그 꽃들은 어느날 바람을 타고 한꺼번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질 때가 아름답다.
누추한 꼴을 보이지 않고 갈 때를 잘 안다.
그래서 피어 있을 때 더욱 고귀하다.
바람에 꽃잎을 날려 보내며 서럽지 않다.
좀 있으면 씨마다 모두 모두 낙하산을 펴고
멀리 멀리 신나는 여행을 떠날 테니까.
내일은 비 오세요.
내일은 비 오세요. 하루종일 촉촉히 봄비 오세요.
내일은 사진 안 찍고 하루 종일 술이나 서너 근 마시게.
한 잔 하고 꽃 얘기 하고, 또 한 잔 하고 산 얘기 하고,
또 한 잔, 사진하는 얘기 하게. 하루 종일 비 오세요.
오늘 하늘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또 무슨 꽃들이 나와 만나려 기다릴까?
밤중에도 잠 못 들어 자꾸만 밖에 나가
별을 찾아본다. 졸리운 줄도 모르고 좋아한다.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나의 일이요, 삶이다.
꽃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아요.
높고 큰 산을 대할 때의 감동도 크지만
마이크로렌즈로 꽃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그 섬세한 자연의 숨결은 경이로울 것이다.
그 감동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왜 사진 찍는지 너는 아니?"
어떤 카메라로 꽃을 찍으면 좋겠냐고
인생 상담처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약간의 유리와 쇠붙이로 구성된 기계.
카메라는 그냥 차가운 도구일 뿐이다.
그놈은 느낌도 없고 철학도 없다.
별 생각 없이 카메라의 성능에 의존해서
기술로만 찍는 사진은 생명 없는 사진이다.
사진, 어떻게 찍을 것인가? 그보다는
사진, 왜 찍는가?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며칠을 헤매더라도 당신 가슴을 쿵덕 쿵덕 뛰게 하는
행복한 꽃 한 송이를 만나라!
식물원의 꽃들은 벌써 야생화가 아니다.
인간에게 보호되면 야생은 사라지고 만다.
재배되고 있는 꽃은 꿈을 잃은 슬픔이다.
절벽에 매달려 바람에 시달리며 끈질기게
피워낸 그 꽃들은 빛깔조차 다르다.
당신이 진정한 야생화 사진을 하려면
그 꽃들의 행복한 표정을 찾아내야 한다.
울타리 안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늘어선
그 꽃들이 왜 불행한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신념 가득 찬 들빛 사진가로 되려면
표본실같은 식물원 근처를 기웃거리지 말고
계곡 깊숙이, 벼랑 끝, 산등성이를 넘어서
환하게 피어나는 들꽃들을 찾아 나서라.
며칠을 헤매더라도 당신 가슴을 쿵덕쿵덕
뛰게 하는 행복한 꽃 한 송이를 만나라.
산 속의 모두가 힘을 모아 봄을 만드네.
그 두터운 눈덩이를 녹여내는 것은
지열이며 바람이며 빗물이며 햇볕이다.
그 모두들이 힘을 모아 봄을 만들어 간다.
벽 앞에서도 꽃은 정면 돌파, 무모할지라도 피어난다.
나의 큰골에는 특별한 기능이 추가된다.
나는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능력이 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잘 됐다고 생각해버린다.
아주 험한 일을 당해도 팔자려니 생각하고
정해져 있던 운명으로 돌리면 맘 편하다.
마음 약한 운명론자라 해도 나는 좋다. 하하하
흙의 숨소리, 언젠가 나의 숨소리가 될 그것을 맡아보자, 들어보자.
사진을 찍으려면 코를 땅에 박아야 한다.
불룩나온 배를 땅에 찰싹 붙여야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땅 냄새를 맡는다.
부드러운 흙의 숨소리를 듣는다.
나, 일 끝내고 떠나면 아직 쓸모 있는 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머지 껍데기는 불태워 재로 만들어서
향기로운 흙 속에 스며들겠지.
흙과 함께 숨 쉬러 흙으로 돌아가겠지.
화인다 들여다보다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돌아갈 포근한 땅에 뺨 부벼 본다.
대지의 부드러움과 향이 온몸으로 온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
나는 돌밭이나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강인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나면
무조건 좋아한다. 무조건 존경한다.
지독한 태양열에 달궈진 암벽의 복사열과
계속되는 가뭄의 극단적인 갈증을 참고
모질게 불어대는 미친 바람도 견디고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극한 상황을 극복해내는
그 여린 듯 강한 생명들.
그들에게 우리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내자.
그들의 삶을 한번쯤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라
바위 틈의 악조건에서 열심히 물과 양분을 만들어 보내는
뿌리들, 숨은 일꾼들.
우리 사는 세상에도 그런 이들은 있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
진정으로 기립 박수를 받아야 할 그들이다.
누가 꽃이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우리 세상을 꽃 피울 뿌리같은 사람들
그들 덕에 우리는 숨 쉬며, 웃으며 살 수 있다.
산이 내게 베풀지 않으면 사진은 못 한다.
이제는 기다리던 빛의 모양이 이루어졌으니
허둥대지 말고 찬찬히 살펴보자.
이제부터 마음 속에 사진을 담아야 한다.
사진은 맑아야 한다. 탁한 느낌은 안된다.
꽃과 산을 얼기설기 되는대로 엮어놓으면
뒤숭숭한 사진이 되고 만다. 더 안 된다.
얼렁뚱땅 허둥지둥 들여다 보고 그냥
대충대충 셔텨를 누르면 사진은 어설퍼진다.
산이 내게 베풀지 않으면 사진은 못 한다.
내 차지가 아닌 걸 애써 욕심내서도 안 된다.
사진, 아주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세상살이도 한가지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솔체꽃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제 힘으로 열심히 피어난다.
백두산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다.
어느 꽃이나 모두가 그 땅의 주인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재배되지 않고
스스로가 제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한 포기의 풀 만큼이나 열심히 살아왔는가?
얼마나 멋진 씨앗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가.
꽃이 지는 것은 허망함이 아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의 힘차게 퍼덕이던
날개를 접고 씨를 퍼뜨리는 보람이다.
새싹을 키워내던 희망도
꽃을 피우던 아름다운 시절도
사랑을 나누고 씨를 맺었던 기쁨도
모두 모두 바람에 날려 보내 버리고
마른 풀잎들은 흉하게 버려진 게 아니다.
쓸쓸한 가을이기보다 풍요로운 가을이다.
사진은 느낌을 찍어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씨앗을 모두 날려 보내고 이제는
꺾여져서도 당당하게 대지 위에 서 있는 자그마한 마른 풀대에서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위대한 생애가 내년의 고산화원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나는 모진 바람을 더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렇다. 쓰러지지 않는다.
씨앗들을 멀리멀리 하늘 너머 낯선 땅
저 끝까지 남김없이 떠나 보내는 날까지
부러지거나 쓰러지면 안 된다.
그 가녀린 가지로 광풍을 견디는 괴력은
우리네 어머니의 마음과 한가지다.
나 이제야 겨우
사진이 무엇인가를 조금 알 것 같다.
왜 사진을 하는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수많은 착오와 오류를 범하며 나 혼자
지름길을 두고 먼길을 외둘러서 힘겹게
이제사 여기까지밖에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얻어낸 몇 알의 씨앗을
바람에 날려보내 이 땅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서
야들야들한 애기 잎이 돋아나고 넓게 가지를 치고
내가 볼 수 없는 훗날에라도 아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이제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모두를 바칠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척박한 이 나라에서 사진을 천직으로 살았다.
사진 보리고개에서도 그 좌절의 시간들을
사진을 해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어냈다.
예술대학이라는 데에서도 갈팡질팡 헤매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나 혼자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이제는 여태까지 한 길로만 달려오며 느낀
많은 생각들과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새로운 일들을 계획할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공부하고
내 삶의 반환점을 돌아 다시 뛸 것이다.
산길은 가파르겠지만 나는 다시 뛸 것이다.
안승일 사진 작가의 <고산 화원>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