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흑인 피아니스트와 노동계층 백인 운전사.
사실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비슷한 컨셉의 영화는 많다. 엘리트 백인과 차별받고 하위계층 흑인의 우정을 쌓은 영화. 많은 사람에게 강제 감동을 주지만 불편한 영화다.
사실 이 영화도 불편한 것은 맞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차별이 횡행하던 시절, 실화를 바탕으로 차별받는 두 사람의 진실된 우정을 그린 영화는 불편하다. 그 불편함에 대하여 딱 부러지게 이야기 하거나 글을 쓸 수 없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화가 날 정도이다. 게다가 이런 차별이 없어진 것도 아니라 더 화가 난다.
흑인 피아니스트와 흑인 차별이 횡행한 남부로 가게 된 백인 운전사.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차별이었다.
백인은 본인들이 부른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존중했지만 그 음악을 연주한 돈 설리를 피부색을 이유로 존중하지 않았다. 높으신 백인 양반이 존중한 것은 음악이었을 뿐이지 흑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돈 설리가 유색인종전용 숙소에서 머무르고, 유색인종전용 화장실에 가며 백인과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토니도 백인 중의 흑인이라는 이탈리아 사람이라 차별받고 멸시받았지만 그 스스로도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단지, 돈 설리와 함께 다니면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차별받은 경험 때문에 돈 설리가 받은 차별을 공감했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고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 않다면... 난 뭐죠?'
맨 마지막 대사가 영어로 'Who am I.'였다. 평생동안, 돈 설리는 괴로웠을까? 그에게 남아있는 정체성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사람이었을까?
영화에 나왔던 피아노 연주는 좋았다. 하지만 행복해보이는 연주는 오렌지 버드에서의 연주뿐이었다.
아직 돈 설리의 피아노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 글을 다 쓰고 알라딘에서 돈 설리의 음반 하나를 살 계획이다. 그 음악이 행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