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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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의심스럽지만 누군가 독서를 '개인적 차원의 책 읽기'와 '사회적 차원의 책 읽기'로 구분했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자는 독서에서 순수한 쾌락을 취하는데 의의가 있으며 흔히 말하는 문학작품 읽기가 대표적 예이다. 후자는 현대 사회에서 진행 중인 사회적 담론에 대한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하며, 철학이나 사회과학 자연과학 서적 등의 독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글을 쓰다보니 용어의 자의적 창작이야 기억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분의 내용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가지 구분이 결코 명확하고 선명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자는 후자를 내포하거나 구체화 할 수도 있으며, 후자 역시 독자에 따라 전자의 목적을 동시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어디 세상사 그렇게 간단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던가.

세계체제론으로 널리 알려진(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권력의 레토릭』은 '사회적 차원의 책 읽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적 차원의 책 읽기'라는 물줄기와 섞여 흐르게 된 독서 경험 중의 하나이다. 이보라. 역시 이분법은 나쁘고 충분히 불충분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입문서로 읽기에 좋다는('로쟈'로 유명한 '이현우'씨의) 서평을 접하고 나는 그의 『근대세계체제』와 『유럽적 보편주의』를 동시에 빌렸다. 분량으로 보나 가독성으로 보나 후자를 먼저 읽는 게 에너지 효율성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누구나 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대단히 명쾌하다. 월러스틴은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서구의 문화, 자본, 지적 권력의 지배현상을 '유럽적 보편주의'로 정의하고 이것이 절대 보편적인 보편주의가 아님을, 그것은 서구라는 세계의 특수한 상황의 우월성과 힘이 담보된 '특수한 보편주의'임을 주장한다.

1장에서 월러스틴은 16세기,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과 관련된 당시의 커다란 지적 논쟁, 라스 까싸쓰와 쎄뿔베다의 논쟁을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당시 에스파냐의 식민 정책의 대상국이 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과정에서 이를 지지했던 쎄뿔베다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명의 주요한, 그리고 그것으로 전부인 견고한 레토릭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원주민은 미개하다는 것, 그 결과 인신공양과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자연법의 위반)을 저지른다는 것, 그 죄악으로 인해 피해 받는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 보편적 진리인 기독교의 안전한 전파를 위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대항하는 라스 까싸쓰의 논리는 이러하다. 야만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이 행위는 어느 경우에나 소수의 행동이라는 것, 기독교의 교리와 무관한 이들을 기독교의 사법권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도 교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폭력과 살육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원망을 사는 것이 진리의 전파에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다. 라스 까싸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단죄나 포교와는 무관한 사항이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적 보편주의의 레토릭은 본질적으로 쎄뿔베다의 주장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월러스틴은 설명한다. 16세기는 신앙의 이름으로, 19세기는 문명화의 이름으로, 20세기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행해질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권위가 개개의 신앙적인 차원과는 무관하게 어떤 방식으로 불합리한 지배구조를 만들었는지 알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의 시선이 동양이라는 제국을 요리하고 삼키기 위해 만들어진 레시피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가치중립적 보편주의가 어디에서나 성행할 수 있는 인문학의 권위를 깔아뭉개기 위한 서구의 책략이라는 주장은 아직 어딘가 낯설다(과학의 발전이 자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이 노학자의 충고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깨어있어야겠지만 급할 건 없다. 이제 겨우 입문서를 읽었을 뿐이니까. 급하면 쉽게 탈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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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밀란 쿤데라 지음, 김재혁 옮김 / 예문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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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국내에서 쿤데라 붐(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면)이 일었던 것은 90년대 초중반이었던 모양이다. 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쿤데라의 이런저런 책이 번역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개 그 책들은 현재 절판이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아직도 쿤데라를 읽는 일정 수요 이상의 독자층이 국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예전만 못한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은 분명해 보인다. 민음사에서 기획하는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만 해도 쿤데라의 소설 세 편(『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이 출판되었고, 아직 그의 소설 독자층이 상당했는지(혹은 돈벌이의 싹이 보였는지) 민음사에서는 아주 쿤데라의 전집 출판을 기획하고 나섰으며 현재진행중인 상태이다. 대형 출판사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인지 어쩌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렵다는 출판계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획 출판이라니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보면 실로 윈윈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말은(글은) 조금 삐뚤게 나갔지만 어디까지나 민음사 측에서도 쿤데라의 탁월한 문학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물이라고 별다른 근거 없이 믿고 있는 바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여전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쿤데라 문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소설집이 바로 『사랑』이다. 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이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으로 쿤데라가 뚜렷한 정치적 탄압을 받기 전까지인 60년에서 68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담』과 더불어 쿤데라 소설의 출발점을 살펴 보기에 중요한 책이다.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에서는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으로(『우스운 사랑』) 출판 예정되어 있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발매가 되지 않고 있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때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도서관에도 없다!)!

 

 

정작 소설에 대한 언급 없이 글이 이토록이나 길어진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찬양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찬양의 형식을 잃고 격앙된 메아리만이 남을 공산이 크다. (내가 알기로는)유일무이한 쿤데라의 소설집이자, 일곱 편의 사랑 이야기들은 재기가 넘쳐 흐르다못해 읽는 이의 내면을 적신다. 쿤데라는 전체주의라는 견고함과 경직성 안에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발견 한다. 인간의 실존을 엄금 당한 세계에서 실존의 실오라기라도 발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에로티시즘의 세계가 아니고 또 어디있겠느냐는 일곱 편의 골 때리는 항변인 셈이다. 물론 전체주의의 마수는 한 올의 실오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에로티시즘은 관능적이지 않고 옹색하다. 섹시하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본능적이지 않고 사색적이다.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 벌써 찬란하고 영롱한 쿤데라의 소설이 색을 잃어가는 듯 싶다. 다만 일곱 편의 우스운 사랑 이야기 곳곳에 앞으로 그가 써내려갈 소설들의 중요한 파편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말겠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성(sex)의 문제, 불멸에 관하여…….

독자는 그저 배꼽을 잡는 사이에 그가 톡톡 벗겨내는 가면 뒤의 실체를, 혹은 또 다른 가면을 음미하다가 끝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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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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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작품을 발표 된 시간 순으로 읽어 보고 싶어졌다. 이것도 순전히 쿤데라의 에세이로 인해 생겨난 욕망이니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나는 단순히 이 작가의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해본다. 나는 예전에도 감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런 식으로 읽으려다가 그것이 순리라는 듯 책장에 모셔만 둔 적이 있으니까.

 

 

쿤데라의 첫 소설인(그는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농담』을 나는 극도로 경직된 전체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농담으로 인해 송두리째 자신의 삶을 유린 당한 루드빅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체재 속에서 지극히 협소함을 강요 받거나 상실되어버린 실존의 가능성. 이것이 『농담』을 읽는 독법의 한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농담』을 읽으면서도 어느정도까지 그러한 독법은 충분히 유효했다.

 

 

독자에 따라서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얼마나 서정적인 장면과 분위기를 연출해내는데 탁월한 소설가인가 하는 물음에 있어 호응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놀라고 경탄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서정성이다. 자기연민과 붕괴된 자아라는 상실감 속에서 루치에를 향했던 루드빅의 사랑은 어찌나 아름답고 또한 우스꽝스러웠던지. 통속적인 사건이 결코 저수지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비단 그의 날카로운 통찰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쿤데라의 소설에서 서정성이란 그가 가진 재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주목을 받을 만큼 아름답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 그리고 루치에의 이야기는 서로 절묘하게 맞물리기 시작하면서 대단히 혼란스럽고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영역으로 소설은 도망가기 시작한다. 이 인물들은 정치적 신념, 복수, 사랑, 신앙, 전통과 같은 추상의 의지에 자신의 삶과 신념을 헌신하려 했다.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대에서, 20세기 중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였으며 누군가에겐 그것이 20세기 중반의 시기라는 역사의 순간과는 관계없이 영원무구하도록 중요하고 논쟁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추상의 의지가 개인에게 하나의 도그마로 굳어지는 순간, 생은 그 단단함으로 인해 반드시 드러나는 틈새를 통해 농담처럼 짓궂은 장난을 걸어온다. 농담으로 유린 당한 삶, 복수라는 영원한 헛발질, 깨어진 환상, 진지한 자에겐 언제나 이중적인 세계. 무거움은 가벼움의 조롱 앞에서 분노하고 좌절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지럽도록 성찰적인 인물들의 해부도인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소설가는 인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도록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나마, 도저히 설명되어질 것 같지 않은 사고의 파편들을 머릿속에 주워담아, 아주 끝난 것은 아니라는 불충분하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마음 속에 남는다. 의외로 마음 속에 무언가가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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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3
김원 지음 / 책세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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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10일. 그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루키의 소설 『1Q84』의 주요인물 중 하나인 덴고는 자신이 고작 한 살이었던 시절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자문한다. 대개는 자신의 젖먹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87년 6월 10일, 나의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저 그날이 민주주의와 연관되어 대단히 중요한 날이었구나, 하는 정도의 수준 낮은 역사 지식과 의식을 갖고 오늘날까지 잘도 살아왔던 셈이다.

 

 

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한 이후 전두환 군사 정권이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다. 뒤이어 전두환의 정권 장악에 반대한 광주에서의 항쟁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폭력과 언론 탄압, 냉전 논리에 기반한 선동으로 국민을 유린하고 권력을 유지하던 전두환 정권에서 한 명의 대학생이 의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정부 운동을 이유로 쥐도 새도 모르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대학생이 취조 중 사망한 것이다. 그 학생의 이름이 바로 '박종철'이다. 조용히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정부가 마지못해 발표한 내용이라는 게 <(책상을)'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 같잖은 변명이었다. 사인은 쇼크사였고 국민들이 분통해 마지 않았으리라는 건 말을해 무엇할까. 유신 이후 지속된 헌법의 개헌을 요구하며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든 묵살시켜버릴 기회만 엿보던 전두환 정권은 88올림픽의 안정적인 유치와 현 사태의 외교적 긴박함이라는 냉전논리로 기존의 대통령 간접 선거제를 유지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4월 13일 선언한다. 이후 정부의 개입으로 은폐될 뻔했던 박종철 사건의 전말이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밝혀지고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다. 당시 정치, 문화, 종교 단체 등등의 재야 인사들로 조직된 국민운동본부(흔히 '국본'으로 불린다)를 중심으로 6월 10일 전국적 규모의 시민항쟁이 계획되고 그렇게 하나의 역사가 쓰여진 것이다. 이것이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 큰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6월 항쟁을 다루고 있는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김원의 『87년 6월 항쟁』이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추천할만 하다 싶었다. 최근 돌베게에서 나온 서중석의 『6월 항쟁』은 훨씬 다양하고 방대한 사료로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그만큼 분량을 무시할 수가 없다. 최규석의 『100˚c』는 만화를 통해 6월 항쟁의 주체인 학생과 시민들의 드라마적 요소를 부각시켰다. 실제로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부록처럼 실린 민주주의에 대한 고찰은 막연하게 민주주의의 환상을 가진 나 같은 독자에겐 일침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역시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의의를 입체적으로 조명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보충할 독서를 필요로 한다(사실 이 책은 청소년들의 학습 보조교재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본 책의 저자인 김원은 역사적 사실이 사학자의 관점이라는 막대한 영향력 내에서 의미가 생성된다는 점을 고백하면서, 당시 항쟁의 실질적 주체였던 대학생,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 노동자, 그리고 기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소설적 형식을 빌려 6월 항쟁의 의미를 추적한다. 6월 항쟁의 의의 못지 않게 한계점이랄까, 못내 아쉬운 지점에 대한 비판과 현실정치(이 책이 다루는 현실 정치의 시점은 2009년이다)의 규탄 역시 대체적으로 공감이 된다. 특히나 MB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몰아세우던 당시 언론의 틀이 자칫 차기 정권에서 우리가 획득해야 할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시의성을 갖고 있다. 독재 정권이라는 틀에 묶인 현정부 이후 차기 정부의 민주적 성취가 자칫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소박한 범주로 제한되거나 만족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다.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의 시기를 지금이라도 뒤돌아보며 내가 민주화를 위한 숭고하고 치열했던 희생과 열정이라는 과거의 영광에만 젖지 않을 수 있었던 지점도, 바로 내가 서 있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광장의 입구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현실의 시점 바로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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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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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인용으로 더 유명한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이 격언은 대체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지의 상태에 놓여져 있음을 상기시키기에 더 없이 적합하다. 인류는 끊임 없이 모든 것과 변별되는 자아로서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물어왔고, 데카르트의 '코기토(이성적 존재)'는 그 물음의 종착점이 되지 못한 채 여전히 미궁을 헤매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의심할 바 없는 분명한 주체로 존재하는 것 같으나 사실 우리는 나 아닌 수 많은 타자, 집단,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자아의 정체는 매우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주의 별처럼 셀 수 없는 광고, 홍보, 이념, 선전 등등의 공세는 현대인의 사고를 마비시키는 마약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이러한 선전 전략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지금에서는 '프로파간다'라는 용어가 대단히 음흉한 것, 본의를 뒤로 감춘 악질적 선동의 의미로 거의 굳어져 버렸지만 본래 이 용어는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가 프로테스탄티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포교 활동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카톨릭의 교세를 감안할 때 본 용어는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차 세계대전 중 행해진 영미 국가의 독일군에 대한 악색선전이 공공연하게 드러나며 오늘날의 프로파간다적 의미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자신의 저서인 『프로파간다』를 출간한 해는 1928년으로 이미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프로파간다라는 단어가 주는 음흉함이 굳어져 있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프로파간다의 권위 회복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기질적 요소로 보이는 굳건한 엘리트주의적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에 관한 평가는 근대적 선전 전략의 개척자 답게 극과 극으로 양분되어 전해진다. 그러나 나로서는 다음의 몇 가지 일화를 통해 그와 선전 전략이라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지성을 가진 이들의 몫이란 그들의 능력으로 대중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이것이 민주사회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매커니즘이라고 확신했다. 대중의 우매함은 무질서를 낳고, 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소위 지성인의 역할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태연하게 담배를 피는 여성을 따가운 눈초리로 흘겨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여성의 입장으로서는 자신의 자유권이 충분히 침해 받는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 역시 여성들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 확대를 위해 여성들에게도 남성만큼이나 많은 담배를 판매하고 싶었던 아메리칸 토바고의 의뢰를 받아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자유의 횃불'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여성들의 흡연과 권리의 신장을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매혹적이었고 아메리칸 토바고의 럭키 스트라이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60년대에 이르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흡연의 유해함에 절감하여 反흡연 운동에 앞장 서게 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업적 중에 담배광고를 성공시킨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한다.

또 하나 에드워드 버네이스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바나나 무역 독점에 기여한 사건이다. 당시 바나나의 주요 생산지 중 한 곳이었던 과테말라는 오랜 군부 통치 시절을 지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로부터 바나나 재배지의 매입을 통해 토지 분배를 실시하려 하였고, 이를 저지하려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미국 정부의 공조는 과테말라 정부의 행위를 공산주의 국가로의 이행으로 판단하면서 안보의 명목으로 과테말라 민주 정부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과테말라를 미국 안보에 있어 위협적인 국가로 인식되게끔 하는데 대단한 활약을 펼친 것이다.

 

 

본서의 6장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과 정치 지도력>이라는 소제목으로 정치와 대중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다음은 본문에서 내용을 발췌한 부분이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신조는 선출된 사람들을 유권자의 눈치나 보는 하인으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일부 비평가들이 늘 불평하는 정치 무기력 현상은 다는 아니더라도 바로 이런 신조에서 기인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지성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야말로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이다. 그리고 프로파간다는 엘리트에 의해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전가의 사고의 기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선전이 세계에 미칠 파급력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결국은 자신과 자신의 우군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묻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이미 죽었고 세계는 여전히 그가 남긴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분명한 건 우리가 스스로 너 자신을 알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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