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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지만 특별한 감회가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기력함의 방증일까. 시간을 보다 성숙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일까. 나의 생활이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비켜 서 있다는 의미일까. 일기는 일기장에. 해가 몇 번이 바뀐데도 여전히 책을 손에 붙들고 있기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어떠한 목자가 될 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2차 세계대전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는 책들과 영상들을 읽고 보는 중이었다. 이토록 끔찍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잘도 망각하고 있었구나 싶은 나날이다. 검은 피의 세계는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그에 걸맞는 짝인 지나친 궁핍, 맹목적 적대와 맹신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다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비극의 조건들은 여전히 망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우연처럼 작년 12월에 발행된 신간 소설 중엔 2차 세계대전의 자장 안에서 쓰여진 소설이 몇 권 눈에 띄었다. 그저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일본 정부의 우경화가 우리에게 우려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정치적 사상의 근본인 민족주의의 극단이 잔인했던 과거사의 옹호나 선택지가 없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과 따위로 변색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부터의 진심 어린 반성은 외부를 향해서만은 곤란하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내부를 향해 이루어져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입은 상처는 일본의 외부는 물론이거니와 그 내부로도 짙게 드리워졌다. 원폭 투하 이후의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자승자박이라는 운명론적 속죄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불씨를 살려두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참혹함 속에선 모두가 패배자일 수밖에 없음을. 그 진심어린 반성의 출발점을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각종 신춘문예와 문예지의 당선작들을 챙겨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읽었던 소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이영훈 씨의 소설이었다. 그 뒤로 독자는 소설가를 잊고 살아도 소설가는 여전히 어디에선가 글을 쓰면서 살아나가 다시 독자의 마음에 노크를 하는 법이다.


알라딘에서 발췌한 소설 속 문장들에서 즉물적인 공감을 느낀다. 아버지도, 중심도, 믿고 따를 진실도, 철학도 신도, 아무 것도 없는 위대한 과거의 지루한 모방인 세대. 비참한 소재의 처참한 패러디의 세대.

아무리 벨 에포크를 탐닉하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끈덕지게 밀착된 동시대의 작가에게서 받는 수혜와 위로를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기대를 해본다.





사실 읽고 싶은 소설이 정말 많은 달이었다. 목록을 간추리며 다섯 권을 꼽기에는 너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읽고 싶은 소설보다 언제나 적은 법이다. 책의 강물을 따라 흘러 간 소설들은 그렇게 돌고 돌아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는 그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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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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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느 만큼 재미있어야 하는가.

고대의 동양에서 소설이란 말 그대로 '사소한 이야기'로서 정치적 사상이라는 지배자들의 담론 반대편에 자리한다. 그것은 집안을 무대로 이루어지는 아녀자들의 이야기였다. 서양 역시 소설(Novel)은 로망스라는 기사들의 연애와 무용담의 모태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설의 원천으로서의 주요 기능은 오락의 문제였다. 근대 이래 소설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데에는 소설이 덜 재미있어졌다는, 심지어는 아주 지루해졌다는 이유가 무겁게 버티고 있다.

 

 

쿤데라는 『이별의 왈츠』를 통해 (내용의)무거움을 (형식의)가벼움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고 그것이 자신이 중요시하는 바라고 말했다. 『이별의 왈츠』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극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형식이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기대하지 않던 과장의 일치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빈 틈 없는 연결이라는 정교함과 여유를 두지 않는 속도감에 힘 입어 자연스럽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그럴싸한 하나의 실제로 인식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조심스럽지만)통속적이라고 부른다.

 

 

온천이 유명한 조그마한 관광도시에서 닷새 동안 벌어지는 해프닝을 우리는 지켜본다. 유명한 인기 트럼펫 주자인 클리마는 루제나라는 아름답고 젊은 여성과의 하룻밤 사이에 생긴 아이를 낙태시켜야만 한다. 루제나는 이 잘나가는 트럼펫 주자를 잡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아이임을 알고 낙태를 거부한다. 루제나를 끔직이도 사랑하는 연하의 남자 프란티셰크는 두 사람을 감시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몽상적인 산부인과 의사 슈크레타는 조국에서의 불행한 삶을 형제애로 이겨내기 위해 불임 치료차 찾아오는 여성 환자마다 자신의 정액을 몰래 투입한다. 당원인 친구의 밀고로 수감 생활을 한 야쿠브는 망명을 앞두고 친구인 슈크레타와 자신을 밀고했던 친구의 딸을 찾아 온천 도시를 찾아 온다. 야쿠브를 밀고한 당원의 딸인 올가는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자 아빠와도 같은 야쿠브를 유혹한다. 트럼펫 주자의 아름다운 아내인 카밀라는 남편의 끝 없는 바람기에 대한 확고한 의심으로 온천 도시를 찾는다. 여기에 돈 많고 허풍스러운데다가 여성 애찬론자인 베르틀레프라는 미국인 요양객이 더해져 사건은 톱니바퀴 맞아 떨어지듯 굴러간다.

 

 

결국 한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정교한 초침은 점점 귓 속에서 큰 소리로 울리고 마지막 순간엔 오로지 그 초침 소리만이 가득해진다. 이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형식적 가벼움이다. 그것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내용의 무거움은 그 안에 담긴 온갖 죄의식과 죄의식에 대한 무감각과 이미 무감각으로 점철되어 버린 지나온 삶의 행적이다. 쿤데라의 말 대로 이것은 우리 삶의 무의미함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인간이 지닌 무거움(기억의 순간)은 삶이라는 형식의 가벼움(망각의 연장) 안에서 소진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고 망각 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릴 운명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어느 만큼 재미있어야 하는가.

이제는 위상이라고 할 만한 양말도 갖춰 신지 못한 소설의 신세를 두고 우습기 짝이 없는 질문이겠지만 나로선 대답은 해야겠다.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선 곤란하다. 극적인 이야기라는 괴물이 한 인간의 실존을 잡아 먹어버려선 소설은 오락거리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소설의 노력이란 최소한 기억에 남기려는 것이 하나의 이야기를 등에 진 인간이어야 한다. 이야기가 모든 것을 잡아 먹는다면 남는 것은 오직 재미 뿐이다. 모든 추리 소설 속의 흥미로운 인물들이 하나의 '캐릭터'는 될 수 있어도, 한 명의 '인간'이기에는 미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설의 책장을 덮고 나니 가벼움만 남고 무거움이 소멸하는 헛헛함을 나는 아직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설령 그것이 똥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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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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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밀은 시인으로 태어난다. 그의 엄마가 이미 그를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할 줄 아는 어린이로서 사랑 받았다. 언어의 마술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그는 어린 나이에 체감한다. 엄마를 닮아 예쁘장한 외모와 가느다른 금발을 가지고 태어난 야로밀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외모가 영 못마땅하다. 여자의 육체를 경험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예쁘장한데다가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자신의 외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자를 경험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남자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다분히 환상적으로 성적 결핍을 채워나간다. 야로밀에겐 스승과도 같은 화가가 한 사람 있다. 화가는 현대예술(초현실주의.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948년의 체코를 전후로 하고 있으므로)의 옹호자였고 야로밀 역시(그리고 그의 시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화가의 친구들과 함께 한 회합실에서 그는 남자여야 했으므로(그곳에 물론 여자가 있었으므로) 야로밀은 화가와 자신의 시를 매장하고(자립과 독립이야 말로 남성성이므로) 공산주의 혁명에 동참하는 예술만이 유일한 예술임을 역설한다. 그는 여자를 경험하고 새로운 시를 발견했으며 엄마와 다투어야 했다. 엄마는 야로밀이 영원히 그에게 속해 있기를 원했고 그는 거기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엄마의 얼굴을 품고 있었고, 결코 그토록 그리던 남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하고 까다로운 시라는 것에 대해 종합적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쿤데라의 소설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제공된 하나의 창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란, 엄밀히 말해서 서정시란 양가적 진실이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한 진실이 아니라 감정으로 다다른 진실이다. 어제의 슬픔과 오늘의 행복은 동시에 모두 진실이다. 또한 서정시인은 무경험의 천재이다. 그들의 내면엔 두 개의 거울이 있다. 하나는 생활적 실존으로서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상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로서의 거울이다. 그들은 시를 통해 사랑하고, 분노하고, 응징하며, 혁명을 완수한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삶은 여기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것은 삶이라고 부르기엔 초라하고, 왜곡되고, 비루하며 미완성인 것이다. 언제나 삶은 다른 곳에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또한 우리는 쿤데라가 제공한 창 너머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시선이라는 점을 우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얘기로 넘어갈 수가 있다. 시와 거울이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면 소설은 관망대와 그러한 관계를 갖는다. 소설은 관망대를 설치해두고 외부를 꼼꼼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볼 때, 소설가는 관망대를 통해 역사라는 환경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고 들여다본다. 우리의 실존은 무한하지만 실존이 처한 역사라는 장의 크기만큼만 무한하다. 이 소설의 6부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물론 그것은 소설 전체에 해당되는 사실이다.

 

 

글을 쓰다보니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아직 똥폼 잡고 싶은 나이라는 걸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물론 쿤데라의 소설엔 힘이 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낄낄대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그가 감춰지거나 부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욕망의 우스광쓰러움을 소설 속에서 기가 막히게 포착해내주니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소설을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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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한 알라딘 신간평가단(소설 부문)에 선발이 되었다. 그 첫 활동으로 11월 출간 소설 중 기대되는 소설을 추려내는 작업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나는 굳이 신간 소설을 찾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검증 된 구간의 소설들도 충분히 많다. 그렇게까지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의 의견에 수긍이 간다고 할까(나가사와는 사후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는 주의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낯설고, 높은 비율로 추리물 소설이 신간을 차지하고있다는데 놀랐다. 누군가에겐 서울 복판에 떨어진 한양의 촌놈 같은 소리로 들릴 것 같다. 처음이라 잡설이 길었다. 책소개를 살펴보며 12월의 기대되는 신간 소설을 추려 봤다.

 

 

 

 

 

 여성 소설가의 소설은 언제나 기대만큼 조심스러움이 뒤섞인다. 무엇보다 그것은 (보통 남성 소설가 이상의)섬세함에 대한 기대와 우려이다. 섬세함이 소설에 꼭 맞는 외투가 된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섬세함이 소설을 온통 뒤덮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현기증을 느낀다.

육 년 동안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나는 똑같은 기대와 우려를 갖는다. 일 년에 한 편 꼴로 장편소설을 써내는 소설가들도 얼마나 많은가.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일이겠지만 그것은 여느 일처럼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결과물을 창출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필요는없다. 흘러가는 시간을 쫓아가기에도 바쁜 시대에 짧은 소설에까지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섬세함이다. 내게 아름다움이 남는지 현기증이 남는지 두고 볼 일이다.

 

 

 

모옌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돌면서부터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이미 언젠가는 읽게 될 소설가의 명단에 모옌의 이름이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직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질 못했으니 11월에 출간 된 소설 중 가장 읽어 보고 싶은 소설로 『열세 걸음』을 꼽는다.

 

 

 

 

 

 

 

 

 

 

책 소개를 보니 황석영의 『강남몽』 이 겹쳐 떠오른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시대사를 다루었던 그 소설을 바쁘게 읽어치웠던 기억이 난다. 간혹 황석영을 두고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별칭을 붙이곤 하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 비가 내린 다음 날 도랑의 물 흐르듯 이야기가 거침 없이 흘러나간다. 독자는 신명나게 이야기의 물살을 타면 그만이다. 그러나 급한 물살은 타고 내려오기야 신나지만 엉덩이가 땅에 닿고 보면 어딘가 아쉬운 맛이 남는다. 재미나게 한바탕 놀고 난 뒤 돌아온 일상은 어딘가 낯설다.

19세기 조선말기의 시대사를 압축적으로 다루었다는 소개글에서 나는 그저 한 이야기꾼이 다룬 19세기의 풍경만을 가벼운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전쟁은 언제나 세계(심지어 일상의)의 압축으로 표현되어 왔고, 그러하고, 여전히 그럴 것이다.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약자, 소수자,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강요된 희생을 조건으로 누군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악마의 놀이에서 여성은 약자이며 소수자이고 이방인이다. 그런 여성의 세계를 전장에서 관찰하려는 이야기를 어떻게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을까. 그것이 러시아의 여성이든 독일의 여성이든, 유대인이든, 혹은 일본인이거나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문학 안에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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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 행복한 물리학자 파인만에게 듣는 학문과 인생이야기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정영목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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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도 하지 않고 파인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서 언젠가 헌책방에서 구입을 해두었던 책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제외하면 나는 파인만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좀 괴짜스러운 물리학자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흥미가 있었다. 식사 중 심심풀이 삼아 읽을 책을 찾다가 집어 들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진지하다는 의미에서).

 

 

저자의 경력이 재미있다. 레너드 믈로디노프라는 저자의 이름은 내겐 생소하다(그의 이름이 『시간의 역사』,『위대한 설계』에서 스티븐 호킹과 나란히 적혀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는 전도 유망한 물리학 박사였지만 결국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언뜻 보면 어딘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의문이 해소가 될 것이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의 내용이 믈로디노프가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으로 불리며 최고의 연구시설로 유명함)의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난 전설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그리고 '머레이 겔만')과의 대화와 추억 속에서 편집된 학문과 삶의 이야기(대단히 유익하고 진지한)이니까 말이다.

전도유망하고 젊은 물리학자인 믈로디노프는 천재들(그리고 노벨상 수상자들)의 집합소인 '칼텍'에서 자신을 채용했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만 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젊은 물리학자로서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물을 기대할 것이라고 믈로디노프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물리학자들의 세계였다. 기대라는 것은 언제나 열정과 부담을 동시에 안기지 않던가. 믈로디노프의 연구실은 당시 물리학계의 두 거인이었던 파인만과 머레이 겔만 사이에 있었고, 스스로 답을 찾기 어려웠던 그는 이들에게, 특히 파인만에게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며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저자는 자신의 글이 소설이 아니라고 미리 밝혀두지만 도대체 소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법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런 문제를 논의할 수도 없거니와 단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글이 소설과도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물리학에 관한 이론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양자 물리학과 초끈 이론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일반 교양 수준의 정도에서 다루어 질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몰랐던 사람은 감이 잡히는 정도이고(나는 여기에 속한다), 이미 잘 아는 사람은 시시할 수도 있는 수준이리라. 그러니 내용의 본질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소설처럼 읽힌다. 물론 소설이냐 아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나 글을 읽다 보면 자신의 명성(혹은 안정)과 행복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한 명의 인간이 자꾸 도드라진다. 그리고 파인만은 이야기 속에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그를 인도하는 탁월한 스승이다. 파인만은 전설의 물리학자이자 자신의 일(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다)에서 행복의 원천을 느끼는 삶의 지배자이다. 그는 창조적인 인물인 동시에 자신에게 충분히 진지하고 솔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로서의 재능과 삶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믈로디노프가 어떤 결과를 선택했는지 알고 있는 우리는 이 이야기가 뻔한 한 편의 주제를 되풀이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하라는 위대하고도 낡은 주제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책을 읽는 와중에 현명하고 열정적인 파인만의 조언에, 믈로디노프가 처한 상황과 선택의 무게에서 방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 한 개인의 인생이란, 진지한 선택의 순간이란 결코 낡은 주제가 될 수 없으니까.

 

 

"누가 무지개의 진짜 기원을 처음으로 설명했는지 아세요?"

내가 물었다.

"데카르트지."

그는 잠시 후에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두드러진 특징이 뭐였다고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어, 무지개는 사실 원뿔의 일부인데,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가진 호로 보이죠. 물방울들이 관찰자 뒤의 햇빛을 받아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감의 원천은 이 문제가 물방울 단 하나를 생각함으로써 분석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적합한 기하학을 적용한 것이죠."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가 말했다.

"네? 그럼 그의 이론에 영감을 준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

- 본문의 믈로디노프와 파인만의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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