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조울증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절망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광장의 찰나에 흥분하기보다 조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광장을 보는 것. 이것이 역사를 믿는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 태도가 우리를 이 체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역사를 도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것은 변화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성격이 급해져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요즘 하고 있다. 즉 우리 주변의 장치들과 그 장치들이 배치되는 방식이 변화에 대한 우리의 시간 감각을 통째로 바꾸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와 시간의 변화를 대치시키며 역사에 대해 불신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전혀 안전하지 않다. 무지를 드러내는 용기는 그 용기를 부렸을 때 자신의 인격과 존엄이 존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경우에나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기는 개인의 덕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의 문제다. 용기를 냈을 때 인격과 존엄을 존중해주는 ‘안전‘한 관계에서만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들이 만든 인권에 대한 선언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존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간의 존엄이 본질적으로 깨지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은 채 깨지기 쉬운 존엄이 꺠지지 않게 하는 장치들을 만들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 장치들을 인권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는 수치심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빈민들은 그들이 다스리고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지배 엘리트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성과주의‘사회에서 자원을 독점한 지배 엘리트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이의 빈곤이나 실패를 목도했을 때 생명권력이라면 반드시 느껴야 하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빈곤과 실패는 지배 엘리트와는 무관하며 전적으로 그들의 노력과 능력 문제로 치환한다.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수치심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바깥‘에 대해서는 ‘안됐지만‘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능력주의‘란 그 이름과는 달리 개인이 훌륭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공적으로 지원하고 보조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결코 다른 어떤 것을 배제한 순수하게 자신의 것으로서의 자질과 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의미하며, 이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능력주의‘다. 이 능력주의에서는 결코 모든 개인들이 훌륭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적 자원을 가진 소수만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그의 존엄성을 지켜준다는 말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존엄에 입각한 안전이란 공동세계에 참여하는 그의 활동과 의견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다. 그렇지 않고 그저 생물학적 생명이나 ‘보호‘하는 사회에 존엄성은 없다. 그런 사회에서 목숨이나 구걸하고 사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이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는 커녕 가장 모독받는 존재가 된다.
사람을 통치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이 무력한 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에 빠지면 그 다음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진다. 한번 무기력에 빠지면 그 무기력한 상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큰 힘‘이 생기지 않는 이상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또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면 무기력에 빠져 있는 한 ‘큰 힘‘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악순환이다. 그렇기에 무기력하게 만든느 것이야말로 사람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악순환에 빠뜨리는 것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말과 글의 힘을 박살내고 무기력을 통해 통치한다.
우리 모두는 존엄에 있어 평등하다. 인간 모두가 존엄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평등이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이 지향하는 평등이 경제적/정치적 권리의 평등에만 그쳐서도 안 된다. 존엄이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등하다면 바로 그 존엄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것이 새로운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하게 존엄하기 때문에 삶의 전 공간에서 모두를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내가 ‘점‘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민주주의지만 상대가 나를 ‘점‘으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다.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파괴되고 부패된다. 그것이 바로 1987년 이후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내일은 당췌 무슨 일이 터져 있을지 하루하루 불안한 이 시국에 책을 읽는 건 한숨 고르고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박근혜 게이트 터지기 전 읽고 있었던 이 책을 이제서야 마무리짓는 건 책 속에서도 책 밖에서도 속터지는 일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진도 빼기 너무 힘들었던 책이다. 꼬인 실타래를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나라에서 어쩌면 지금 시국은 기회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필사 예찬 및 방법론. 궁극적으론 필사가 자기 문장을 만들기 위한 기초가 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예전에 여유가 있을 땐 좋아하는 구절들을 필사해보곤 했는데, 할 것은 점점 쌓여만 가고 옮겨적는 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타이핑해서 블로그에 기록해두는 걸로 대체했었다. 요즘은 그나마도 포기하고 이북의 하이라이트 기능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저자의 필사노트도 엿볼 수 있어서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카르타 기준 208페이지 중 본편은 160페이지까지이고 나머지는 해당 출판사의 종이책 소개로 구성되어 있다.이북의 20%씩이나 광고에 할애한 건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돈주고 광고를 산 느낌이라 책에 대한 좋은 인상이 휘발되어 버렸다.
본가에서 키우는 내 개들(였으나 이윽고 엄마의 개가 되어버린)도 열 살이 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데려왔으니... 부모님이 시골로 이사가면서 내키는 대로 뛰어다니고 원할 때 마실나가면서 지내다보니 그 또래 개들보다는 팔팔하게 지내는 것 같다만, 그래도 잔병이 생겨 병원에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짠해진다.이 책을 읽다보니 엄마도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에게도 한 권 주문해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