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강조된 것은 늘 시장의 공정함이었는데, 이를 고려한다면 결국 당시 귀여니를 두고 제기된 논란들은 ‘지금 이곳의 시장이 과연 공정하게 기능하고 있는가‘란 의문을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당시 제기된 대중적 의문은 ‘누구나 쓸 수 있는 B급 소설이 각광을 받고, 수입을 창출하고, 작자의사회적 지위마저도 향상시켜주는 지금의 시장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이 사건을 대하는 대중의 욕망이 드러난다. 이 욕망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너는 되고 나는 왜 안 되는가?"pp.92-93. 2_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세상 오만 것들에 다 속고 있다‘는 인식은 결국 냉소주의로 부를 수 있을 거다. 냉소주의는 늘 자신과 타자에 대한 기만을 대동한다. 세상이 다 나를 속이는데 나라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는 법 이 어디 있는가? 또, 내가 남을 속이는데 다시 내가 나를 속이면 안된다는 법은 또 어디에 있나. 냉소주의자의 어법은 그래서 ‘진정한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 진정한 무엇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거다. 그래서 ‘진정한 무엇‘을 찾을 때까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 ‘진정한 무엇은 없다‘는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건 원래부터 믿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는 모두를 대상으로 기만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거다.p.12. 책머리에
이런 형태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은 어떤 면에서 두 가지로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냉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냉소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남들의 잘난 능력을 일부러 평가해주지 않는 캐릭터를 고수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그들의 잘난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자가 자신의 ‘공정한 잣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는 치졸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즉, 여기서 ‘나‘는 어찌됐건 ‘잘난 사람‘ 이고 이 방식은 내가 실제 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열등감을 해소하는 두 번째 방식은 ‘열광‘ 하는 것이다. 잘난 사람의 우수한 능력을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존재자체에 열광하고, 그들과 대비되는 ‘못난‘ 존재들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 말이다. 이들은 잘난 사람의 능력을 동일 시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틀 안으로 몸을 던지고 그 안에서 되도록 오랫동안 머문다. 때로는 못난 존재들에 대한 적대감이 혐오의 형태로 발산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나‘는 ‘잘난 사람들의 하나‘이며, 이 역시 잘난 사람들의 일원이 되기 위한 효율성 추구의 결과이다. 이러한 두 태도의 충돌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종종 발견 되는 바다. pp. 84-85. 2_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읽으면서 ‘왜?‘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결국 끝까지 그 ‘왜?‘가 밝혀지진 않는다. 그게 오히려 개돼지들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강남이라는 공간을 잘 설명하는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소재 자체가 센세이셔널하다보니 꽤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문맥상 ˝구역질˝이 들어가야 할 곳에 자꾸 ˝비역질˝을 쓴 부분이 엄청나게 눈에 밟힌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다른 주변화된 정체성과 동일시하면서, 독단적인 정치운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소비주의를 통한 레저와 자기계발의 ‘필요‘가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전유된 것을 혐오하면서도, 삶이 즐거워야 한다는 자유주의적인 시장 이데올로기에 설득당했고, 쾌락과 욕망 추구의 측면에서 관리 가능한 삶을 일구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자아의 기술‘을 채택하여 사적인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였다. 미셸 푸코(1988)가 만들어낸 ‘자아의 기술‘개념은 사람들이 자아-지식("너 자신을 알라")과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네 앞가림을 잘하라")간의 관계에 대한 (서양)철학적 전통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들이 정치적 대의를 위해 개인적 행복을 억눌렀던 학생운동가들의 고통을 목격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즐겁게 사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된 점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p.21
과거 학생운동가였던 자경과 난이는 아무런 성찰 없이 사회의 흐름을 좇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유화된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구조화된 자본주의 고용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삶에 대한 욕망과 유연한 노동시장에서 앞가림을 해야 하는 책임 사이에 놓인 딜레마에 직면해있다. 스스로를 긍정하고 돌보는 정동의 통로를 통해 자기만의 시공간 속에서 살면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추구하는 비혼여성들은 한편으로는 포드주의적인 자본주의적 생산과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교조주의에 맞서 ‘노동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연한 삶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적인 에토스와 정동의 결합체는 신자유주의 경제, 특히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를 승인하고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