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적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김현미 외 지음 / 이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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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새로운 '자유'를 주장한다. 즉 개인의 선택의 자유, 정부로부터 간섭 받지 않을 자유,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할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개인'의 자유를 역설했다. 그러나 그 개인은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적극적인 행위자인 '재산'을 가진 개인이다.-8쪽

하지만 노동자를 일약 소유자로 전환시킨 이 같은 자본의 연금술은 실상 새로운 부의 창출과 분배 과정이기보다는 각자가 향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가치를 앞당겨 소비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는 개인이 현재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많은 것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신용카드 원리와 같은 것이다. 금융 심화로 인해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개인들은 미래의 가치가 증대될 거라는 불확실한 전제를 기반으로 자신의 현재적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소비를 손쉽게 향유한다. 그러다 보니 주 5일 근무나 여가 시간이 확장되더라도 이 시간은 노동의 인간화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이용되지 못한다. 그 시간은 또 다른 소비로 채워지거나 자신의 과잉 소비를 벌충하기 위한 추가 노동이나 자기 계발 시간이 되기 쉽다. 과잉 소비, 과잉 노동, 시간 부족,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이를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소비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노동자가 사라진 소유자 사회에서 소외는 노동의 영역이 아닌 비노동과 무노동, 여가의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Lefebvre,1991:38).-63쪽

누구나 투자자며 자본가인 사회에서 개인의 노동자 정체성은 부정되고 거부된다. 고도로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요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또한 사람들이 생산물을 구매해 주어야 이윤이 나는 상황에 갇혀 있을 필요도 없다. 그저 거대한 세계자본시장을 순환하며 차액을 수확하면 그뿐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운동이나 대안적 꼬뮌주의, 소비자 운동도 무력해지기 쉽다. 대항할 상대도 사라졌고, 싸울 주체도 보이지 않는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을 든 노동자는 이미 소유자가 된 이웃들 사이에서 낯선 존재로만 보일 뿐이다.-69쪽

결국 엄격한 이주 통제 정책은 이주를 통해 거대한 폭리를 취하는 중개인을 양산하고 잇는 셈이다. 중개인들은 점차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갱스터 연합체를 구성하면서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있다. (중략) 이주 업자들은 초국적 네트워크와 변호사, 자문단 등 전문가 그룹을 동원해 가면서'어두운 산업'에서 벗어나 영향력 있는 '정상적 산업'으로 변신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이주를 통제하는 정책을 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값싼 이주 노동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을 이뤄 내는 서구와 유럽, 아시아 국가들의 이주 통제 체제 덕분에 이주 산업은 글로벌 영리 산업으로 그 규모를 키워 가고 있는 것이다.-91쪽

그러나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상품의 소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상징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날 명품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상징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한 명품 소비를 넘어 명품에 어울리는 신체적/정신적 자아를 구축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개인들은 명품 소비의 범람 속에서 특별한 자아를 통해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다. 이러한 구별 짓기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 이제는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기 위해 그 가방에 어울리는 명품 코트나 명품 구두를 갖추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돈만 내면 한순간에 소유할 수 있는 기성품들을 넘어 명품 몸매, 명품 피부 등 철저하게 관리된 몸을 갖추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147쪽

상품 페미니즘은 독립적인 자아, 사회적 성공 등 페미니즘의 목표가 상품으로 구현되면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곧 그 성취로 간주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개인적인 생활양식으로 바꿔 버림으로써 페미니즘의 탈정치화를 초래하며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한다. 개인주의 또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비판을 망각하고 상품 형태에 포섭되어 버리는 것이다(골드만, 2006:185~188).
특히 이러한 정치성의 탈각은 여성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적자생존의 논리 및 페미니스트는 피해 의식에 젖어 있거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성들이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의 정치성의 소멸과 페미니즘에 부착된 부정적인 이미지는 직장과 가정에서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등 페미니즘에 의해서 획득된 가치를 당연시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명칭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여성을 대거 양산했다(위의 책:185).-150-151쪽

긍정적인 인성을 지닌 이들이 사회적으로도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 계발 문화는 능력주의 신화를 퍼트렸다. 성공하면 행복해진다는 인식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적 실패와 좌절이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선택이 적절치 못했거나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실패와 좌절이 개별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다.-166쪽

이와 같이 감정 노동 영역에서 노동자의 감정 관리는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표준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기업 만족도 향상을 위한 인사 관리에서도 중요한 경영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업의 이러한 ‘소통’과 ‘배려’가 작업장의 민주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고 이윤을 확대하기 위한 ‘인사 관리’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에 대한 감정 관리를 통해 기업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기인한 문제를 ‘감정적’으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175-176쪽

치유서나 자기 계발 담론에서 개인들의 정신과 감정, 인성과 삶을 마치 경영의 대상처럼 사유하여 자본처럼 축적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거나,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는 기술로 생각하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은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신자유주의 주체성은 ‘자신을 돌보고 향상시키려는 개인의 의지, 즉 자기 계발의 의지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서동진, 2009).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새로운 사회성은 니콜라스 로즈가 ‘기업가적인 자아entrepreneur self'라고 부른 자아 관념, 즉 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자아 자체를 마치 기업과 같이 경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객체로 바라보는 관념을 만들어 낸다(Rose, 1992).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과 경력, 정서 상태, 외모, 육체, 교우 관계 전반을 기업의 재무제표와 같이 개량화하여 시장 가치로 환산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182쪽

생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지당한 명제는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했을 때 높은 가격invaluable이 매겨지는 모순을 낳는다. 인체의 한 부분을 사람에서 분리해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생명을 상품화하는 행위이며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은 자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장기 매매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불법이지만, 장기 이식을 통해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인체로부터의 장기 분리가 비윤리적이라고 선언할 수는 없는 문제다. 더욱이 기증된 장기만으로는 엄청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 법칙에 의해 장기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장기 매매는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인체의 분리와 생명의 상품화는 비단 장기 매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치병 치료와 생명 연장이라는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생명공학은 인체의 분리와 생명의 상품화를 통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203쪽

슘페터의 관점을 빌어 볼 때 한국 사회의 저출산은 현재와 같은 경제적 체제의 필연적 결과로 해석된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돈이 드는' 문제로 인식되고, 결국 출산의 결정은 자녀 양육과 교육을 감당할 경제 능력이 있는가 여부에 달린 문제가 되었다. 저출산이라는 우리 사회의 난제는 불평등과 무한 경쟁의 심화가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미친 폐해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는 삶을 메마르게 해 자연히 '재생산'과 '돌봄'에 대한 욕망보다는 책임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다. 이런 상황에서 치솟는 집값과 교육비를 감당해야 할 부부의 유일한 생존 전략은 출산을 통제하는 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한국 사회 전 영역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불가피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 인구가 많은 사회에서는 느리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 사람들은 서로 의존하고 상부상조하는 호혜적 생활양식을 욕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슘페터가 말한 '새로운 경제인'과 더불어 인구학적 요소 때문에 위기와 새로운 기회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224-225쪽

사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선택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돈이나 경제적 성취에 매달려 인간의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지 않으려면 덜 일하고 다른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한다면 삶을 단순화할 수 있다. 공적인 가치를 변화시켜 나가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변화의 노력 역시 중요하다. 사회는 개인들에게 어떤 삶을 살고 어떠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선택이 모여 사회적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데 힘을 미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어떠한 변화가 가능한지 사유하고 상상하고 실험하는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때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서 우리는 이제 인간이 가진 '삶'의 능력을 회복하도록 서로 고무하고 격려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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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호황 - 불 꺼지지 않는 산업, 대한민국 성매매 보고서
김기태.하어영 지음 / 이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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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명동이나 개복동 화재 사건을 떠올리며 쇠창살도 없는 곳에서 일하는 업소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것 아니냐고 쉽게 비난한다. 그러나 쇠창살이 없어진 지금, 돈이 여성들을 옥죈다.-39쪽

일상이 된 성매매는 더이상 낯선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앞서 강남의 테헤란로 주변 지역을 탐문 조사한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매매는 때론 지역 상인이 성매매 단속에 반대하고 나설 만큼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지하경제가 합법적인 경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스스로를 정상화하고 있는 셈이다.-57쪽

김 씨는 영업 사원이어서 접대를 하는 쪽이다. 접대를 할 때 상대방의 성매매 비용을 미리 지불한다. 그때 자신은 성매매를 하지 않는다. 접대는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일과 성매매 행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성 구매를 자제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구분은 모호하다.
김 씨가 성을 구매할 때는 인센티브를 받은 뒤다. 흔히 회사 동료들과 함께한다.회식을 일의 연장이라고 보면, 그때의 성 구매도 직장 생활의 연장이다. 김 씨의 습관은 말과 어긋난다. 하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그가 "일이냐 아니냐"라고 할 때, 그게 업무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성매매 업소에 함께 가는 이들과 성매매를 통해 연대감을 고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연대감은 일반적인 한국 남성이 성 구매를 합리화하기 위한 자기 논리의 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83쪽

신박: 유흥 접객원이나 안마시술소 일은 합법적인 직업이에요. 여기에서라도 노동자성이 인정되면서 규제해 나가면 되는데, 이곳에서도 여성은 성매매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음지로 밀려나는 것도 문제예요. 예를 들면 어떤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에게)선불금을 주고 연 36퍼센트 사채놀이를 할 수 있겠어요? 만약 그런 현장이 있다면 그 구조 자체가 불법으로 규제 대상이 되겠죠. 그런데 성매매 산업은 그냥 두는 거죠. 이런 착취가 가능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이유는 이곳이 노동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죠.-266쪽

"국가가 우리를 지켜 주려고 성매매를 금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세희 씨의 말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처벌자 ․ 압제자의 이미지가 강한 듯했다. 고정갑희 한신대 교수(영문학)는 "성매매특별법"제정에 맞서 "성매매의 비범죄화와 자치 조직, 그리고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자"는 대안을 낸 적이 있다. 이들이 노동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는 "이주 노동의 자유, 노동운동의 자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자유, 직업으로 성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법에 의해 보호받을 자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자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낙인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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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의 책 -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
윤성근 지음 / 마카롱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책장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만, 서가에 꽂아두고 싶은 독서 에세이.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내지 일러스트도 돋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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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구판절판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모두가 헌 추리닝을 입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매일같이 위험하고 힘들게 일했다. 볼품없는 외모를 주눅 들게 만드는 예쁜 여자도 없었다. 누구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거기엔 실패를 받아들인 데서 오는 편안함도 있었던 것 같다. 항구에선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무 문제없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약속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권하는 어설픈 거짓말로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항구에선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83쪽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직장 때문에 서울에 오겠지만 젊은이들은 메가박스를 이용하기 위해, 동대문에서 쇼핑하기 위해 서울에 오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이유는 내가 지방에 살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데, 그건 모든 것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만 있는 것들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문화와 의료인데 나 역시 그 둘 중 어느 쪽도 제대로 향유할 만한 형편은 못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누군가 파리와 런던을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지만 런던은 영국이다.' 런던의 예는 서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모든 것이 서울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은 서울에'만' 있다. 지방 젊은이들은 계속 서울로 몰려들고, 그들이 떠난 곳에서 공장은 이전하고 상점들은 문을 닫는다. 그 덕분에 지방 소도시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SG 워너비의 신곡을 연주하며 지나간 것 같은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서울이다.-139쪽

누구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만한 행동들이, 종업원에게는 이를테면 감정적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킨다. 반말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중략)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냐와는 상관없이 모두가 종업원에게는 스트레스를 준다.그리고 이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인데, 그 스트레스는 시간이 지나도, 같은 행동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매번 똑같이 괴롭다. 편의점 일이란 게 매일 이런 식이다. 앞에서 예를 든 행동 때문에 결투를 신청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도 매일같이 겪다 보면 야구방망이라도 집어 들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159-160쪽

누군가는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하지만 그 부작용은 오롯이 감정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다.-165쪽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평해도 된느 것과 불평해선 안 되는 것을 눈치로 파악했다. 전자가 사람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시설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방 사람이 너무 시끄럽다, 아니면 몇 호에 사는 누가 항상 문을 '쾅' 닫는다 하며 다른 투숙객을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방이 너무 춥다, 화장실이 너무 더럽다 하며 시설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다. 한 달 10여 만 원으로 지붕 아래서 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167쪽

나는 비슷한 실험을 편의점에서도 진행했다.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한다는 그 행동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몇몇 손님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반복했다. 거스름돈을 카운터에 던져버린다든가, 쓰레기를 다시 손님 쪽으로 밀고서 쓰레기통을 가리킨다든가, 똑같이 반말로 대꾸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 결과 대다수가 이런 '사소한' 행동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드러났다.-170쪽

자존심이 세고 게으르면 좋은 웨이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모든 면에서 부적격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업계의 실상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모두가 부적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173쪽

왜 더럽고 힘든 일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과소평가되는 걸까? 지금의 대통령이 게으름을 피운다면 시위대가 할 일을 잃을 뿐이겠지만 누군가 똥오줌을 치우지 않는다면 모두가 미치거나 병들어 죽게 될 것인데도 말이다.-220쪽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234쪽

고용주들은 언제나 '이리저리하면 상관없지 않느냐?'하고 쉽게 얘기하지만 모든 작업장에는 고용주의 현실과 피고용인의 현실이 별개로 존재한다. 고용주는 자신이 느끼는 현실보다 피고용인의 그것이 진짜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303쪽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돈만 밝히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젊은 사람들이 피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누군가는 최악의 생활환경에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그런 생각은 엄하게 훈육받은 아이들이 장래에 성공한다는 믿음만큼이나 헛소리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왜 누군가는 항상 고통 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어째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들만이 이 엉망진창인 사회에 대한 책임ㅇ르 져야 한단 말인가?-332쪽

나는 진심으로 주인 부부가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들이 내 고용주 중 가장 좋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생활환경은 가장 열악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치에 맞는 말이다. 고용인에게 넉넉한 급여를 주고 쾌적한 숙소와 편의 시설을 제공하려면 매달 생활비, 병원비, 교육비, 농협 대출금, 자동차 할부금을 희생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잔뜩 쌓인 빚더미에 더 무겁고 고약한 빚을 더하게 된다는,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이 고통 받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어떤 사람들은 결혼생활의 정수가 거기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인부를 위해 그 길을 택할 사람은 없다.) 그 정도 빚더미가 폭발하면 웬만한 가정 정도는 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아저씨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39-340쪽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터도 불법 파업 때문에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불법 정상화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뿐이다. 일부 사람들은 백혈구가 병균을 공격하듯 노동조합을 비난하지만 어느 쪽이 병들어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 같다.-437-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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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쿠튀르를 입은 미술사 - 명화 속에서 찾아낸 세기의 트렌드
후카이 아키코 지음, 송수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3년 2월
절판


베블런에 따르면 유한계급에 속하는 여성은 "모든 생산적인 직업으로부터 면제되었거나 혹은 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덧붙여 그녀들이 모드에 돈을 쓰는 이유는 "가부장을 대신해 소비하는 것이 경제 사회에서 여성의 임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과거의 가부장제도를 계승한 우리의 사회 체제는 특히 여성에게 가정의 지불 능력을 입증할 직무를 부여"했다. 남성은 노골적으로 옷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의 옷을 통해 과시하려 한 것이다. 베블런은 '과시'라는 역할을 다한 오트쿠튀르와 지금도 유명한 명품 브렌드가 19세기에 탄생한 이유 중 일부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나 평등하게 옷을 입을 수 있게 되고, 서민들도 질이야 어떻든 간에 유행하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19세기에 옷을 통해 차별을 과시한 고급스러운 오트쿠튀르가 탄생한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하지만 사회의 계급 성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피에르 부르디외가 모드의 기능이란 좀 더 많이 차별화한 것에 있다고 말했듯이, 오트쿠튀르야말로 모드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실행한 셈이다.-190-191쪽

이 시대의 모드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와는 거리가 먼 실루엣의 옷을 만들어냈다. 철제 기술의 발전 덕분에 옷의 형태를 안에서 교묘하게 지탱해주는 장치(코르셋, 크리놀린, 버슬 등)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더불어 이 시대의 사회는 옷을 입는 것에 대한 규범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풍부해진 의생활의 증거이자 발전하는 문화의 한 정점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이 코르셋이었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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