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구판절판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모두가 헌 추리닝을 입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매일같이 위험하고 힘들게 일했다. 볼품없는 외모를 주눅 들게 만드는 예쁜 여자도 없었다. 누구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거기엔 실패를 받아들인 데서 오는 편안함도 있었던 것 같다. 항구에선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무 문제없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약속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권하는 어설픈 거짓말로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놀랍게도 항구에선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83쪽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직장 때문에 서울에 오겠지만 젊은이들은 메가박스를 이용하기 위해, 동대문에서 쇼핑하기 위해 서울에 오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이유는 내가 지방에 살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데, 그건 모든 것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만 있는 것들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문화와 의료인데 나 역시 그 둘 중 어느 쪽도 제대로 향유할 만한 형편은 못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누군가 파리와 런던을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다. '파리는 프랑스가 아니지만 런던은 영국이다.' 런던의 예는 서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모든 것이 서울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은 서울에'만' 있다. 지방 젊은이들은 계속 서울로 몰려들고, 그들이 떠난 곳에서 공장은 이전하고 상점들은 문을 닫는다. 그 덕분에 지방 소도시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SG 워너비의 신곡을 연주하며 지나간 것 같은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한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서울이다.-139쪽

누구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만한 행동들이, 종업원에게는 이를테면 감정적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킨다. 반말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중략)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냐와는 상관없이 모두가 종업원에게는 스트레스를 준다.그리고 이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인데, 그 스트레스는 시간이 지나도, 같은 행동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매번 똑같이 괴롭다. 편의점 일이란 게 매일 이런 식이다. 앞에서 예를 든 행동 때문에 결투를 신청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도 매일같이 겪다 보면 야구방망이라도 집어 들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159-160쪽

누군가는 '빨리빨리' 문화가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하지만 그 부작용은 오롯이 감정 노동자들이 떠안고 있다.-165쪽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평해도 된느 것과 불평해선 안 되는 것을 눈치로 파악했다. 전자가 사람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시설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방 사람이 너무 시끄럽다, 아니면 몇 호에 사는 누가 항상 문을 '쾅' 닫는다 하며 다른 투숙객을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방이 너무 춥다, 화장실이 너무 더럽다 하며 시설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다. 한 달 10여 만 원으로 지붕 아래서 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167쪽

나는 비슷한 실험을 편의점에서도 진행했다.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한다는 그 행동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몇몇 손님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반복했다. 거스름돈을 카운터에 던져버린다든가, 쓰레기를 다시 손님 쪽으로 밀고서 쓰레기통을 가리킨다든가, 똑같이 반말로 대꾸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 결과 대다수가 이런 '사소한' 행동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드러났다.-170쪽

자존심이 세고 게으르면 좋은 웨이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모든 면에서 부적격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업계의 실상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모두가 부적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173쪽

왜 더럽고 힘든 일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과소평가되는 걸까? 지금의 대통령이 게으름을 피운다면 시위대가 할 일을 잃을 뿐이겠지만 누군가 똥오줌을 치우지 않는다면 모두가 미치거나 병들어 죽게 될 것인데도 말이다.-220쪽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234쪽

고용주들은 언제나 '이리저리하면 상관없지 않느냐?'하고 쉽게 얘기하지만 모든 작업장에는 고용주의 현실과 피고용인의 현실이 별개로 존재한다. 고용주는 자신이 느끼는 현실보다 피고용인의 그것이 진짜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303쪽

마을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돈만 밝히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젊은 사람들이 피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이라도 꺼릴 만한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누군가는 최악의 생활환경에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게 문제 될 게 없다는 사고방식 말이다. 그런 생각은 엄하게 훈육받은 아이들이 장래에 성공한다는 믿음만큼이나 헛소리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왜 누군가는 항상 고통 받으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어째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들만이 이 엉망진창인 사회에 대한 책임ㅇ르 져야 한단 말인가?-332쪽

나는 진심으로 주인 부부가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들이 내 고용주 중 가장 좋은 사람들이었는데도 생활환경은 가장 열악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치에 맞는 말이다. 고용인에게 넉넉한 급여를 주고 쾌적한 숙소와 편의 시설을 제공하려면 매달 생활비, 병원비, 교육비, 농협 대출금, 자동차 할부금을 희생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잔뜩 쌓인 빚더미에 더 무겁고 고약한 빚을 더하게 된다는,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이 고통 받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어떤 사람들은 결혼생활의 정수가 거기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인부를 위해 그 길을 택할 사람은 없다.) 그 정도 빚더미가 폭발하면 웬만한 가정 정도는 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걸, 아저씨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39-340쪽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터도 불법 파업 때문에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불법 정상화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뿐이다. 일부 사람들은 백혈구가 병균을 공격하듯 노동조합을 비난하지만 어느 쪽이 병들어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 같다.-437-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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