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연애할 때 - 칼럼니스트 임경선의 엄마-딸-나의 이야기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7월
품절


친구의 자식은 일종의 시어머니 같은 존재인가 보다.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몬스터. 친구의 사랑과 관심과 시간을 뺏어가는 몬스터. 기혼과 미혼 사이에는 말이 안 통하기 시작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몬스터.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긴장될 것 같다. 괜히 막 때마다 옷 선물 해줘야 할 것 같고 같이 놀아줘야 할 것 같고. 친구,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의 자식 앞에서는 완전히 비굴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뭐 아이가 언제 그런 어른들의 감정 노동에 신경 썼는가. 일부러 '여시 짓'하는 것도, 냉담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존재일 뿐이다.-83쪽

'남들은 다 제대로 잘하고 있는데...' '다들 그래' '무조건 이래야만 해' 같은 생각에 휘둘리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지고, 그러다 아이가 행복해지기 전에 엄마가 불행해진다. 엄마가 불행한 것보단 불완전한 게 백배 낫다. 단, 그렇게 불완전한 엄마임에도 이 세상에서 나만큼 내 아이를 챙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뭐래도 아이에겐 '내 엄마'가 가장 완전한 엄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기적 같은 아이의 확신을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이면 된다.-100쪽

처음 보는 어른이 아이에게 "어서 인사해야지"라며 어른에 대한 예절을 몸소 강요하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는다. 얘가 당신을 언제 알았다고. 나이 먹은 게 자연스레 벼슬이 되거나 반말을 할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무적으로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이가 자기에게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엄마인 나를 힐끗 노려보는 것이 마치 집안에서 밥상머리 교육, 예절 교육은 어떻게 시켰냐는 눈초리다.
더 몹쓸 짓은 "이거 줄 테니까 어서 인사해봐"라며 미끼를 던지는 것. 남들 앞에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면서, 굴복시키기 위해 값싼 미끼를 던지다니. 그런 어른들은 나부터가 어른 취급 안 하고 싶다. 인간 됨됨이는 나이순이 아니다. 어른은 어린이 위에 서 있는, 더 낫고 높은 존재가 아니다. 존경심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친밀감 이후에 비로소 오는 것이다.-136쪽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줘'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너는 계속 부단히 노력하는 너여야만 한다는 것. 일견 자유분방한 듯 보이는 그 엄마들은 실은 고지식할 정도로 냉철한 엄마들이었다.-173쪽

나는 결코 아이에게 "네가 나의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야. 너의 꿈이 나의 꿈이지"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 그 말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라는 말로 바뀔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엄마는 소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생산해내는 사람임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알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자신의 꿈을 찾아 생생하게 살고 있는 어깨를 보여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꿈꾸는 사람의 샘플을 보게 되고, 꿈을 어떤 가시적인 형태로 실천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리라 본다. 그것은 약간의 용기와 끈질긴 인내심의 문제니까. 아이에게 '엄마는 충족된 인생을 살기 위해 지금 이걸 하고 있어'라며 즐겁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라면 인내하는 모습보다 힘내고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이 더 자랑스러울 테니까.-183~184쪽

내가 남편을 가장 '내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로 의식했던 것은 결혼식장이 아닌 엄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남남이었지만 이제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음을 깊이 느꼈다. 멍하니 장례식장 입구에서 돈 봉투를 받으며 사위 처신을 하던 그와, 시뻘건 육개장 그릇을 나르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우리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상대의 죽음을 지켜보고 책임지는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은 상대의 삶과 죽음을 좋든 싫든 '관리'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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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변호사들 - 대한민국을 뒤흔든 노동 사건 10장면
민주노총 법률원.오준호 지음, 최규석 만화 / 미지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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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엾어서 그랬을까요? 관리자들 때문에 힘들긴 했어도 우리가 불쌍하다 이런 건 잘 못 느꼈는데, 뉴스에서는 그런 투로 나오더라고요. 물론 우리 중에서도 여기서 번 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며느리랑 같이 있기 싫어서 오는 사람도 있어요. 청소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핍박받고, 그런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그렇게만 비추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물론 나도 돈 필요해서 나오지만 안 그런 사람 없잖아요."
이 분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청소/경비 노동자 투쟁에 대한 내 시선을 돌아봤다. 언론 보도에 영향을 받아 '불쌍한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가 그런 시각에만 머무른다면 이들의 요구를 보편적인 노동 기본권의 차원이 아니라, 가난한 집단의 처지를 좀 개선해주자는 차원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럴 경우 임금이 조금 오르고 복지가 나아지는 물질적 개선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저임금 노동을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는 놓칠 수 있다.-107~108쪽

독일은 이러한 직종들을 자영업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노동자라고 보고 '유사 노동자'라는 이름을 붙인다. 프랑스는 우리가 특수고용직이라 부르는 직종 거의 전부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이들의 노동3권을 보장한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등에서도 외형상 독립 사업자이지만 경제적 종속 관계에 놓여 있을 때는 파업권을 인정하고 노동법의 보호 범위를 넓히고 있다.
외국에 비해 한국은 노동자성을 너무나 좁게 해석한다. 한국에서 편의점 점주들이 자신들도 노동자라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공정거래법 위반이 되죠. 그분들이 단결해서 뭘 하려고 하면, 부당공동행위로 처벌됩니다."-135쪽

이랜드-뉴코아, KTX, 현대중공업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개인의 능력이나 준비 정도와는 거의 무관해지고 있다. 기업은 거의 모든 업종과 업무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교체하는 추세이다. 어제까지 정규직이 하던 일을 어느 순간 외주 업체로 돌리고, 상시적으로 하던 일을 언젠가부터 2년 단위로 끊어 재계약 하도록 한다. 청소 노동자부터 IT 엔지니어까지, 생산직 노동자부터 정부 연구 기관 연구원까지 비정규직은 일반적인(많은 회사에서는 심지어 유일한) 고용 형태가 되었다. 이윤 증대가 목표인 기업은, 개인이 정규직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든 어떤 능력을 갖췄든 그에 보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법이 이런 고용 형태를 합법이라고 보장해주었으므로.
비정규직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왜 노력해서 정규직이 되지 않았냐는 말은 공정하지 않다. 비정규직은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고,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준을 넘어섰다. 차별 규제 조항을 일부 덧붙이는 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가 비정규직 증가를 이제는 막겠다는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168~169쪽

하지만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노조 측에서 온갖 증거자료를 갖춰 고발해야 겨우 수사가 이뤄지는 반면, 노동조합의 불법행위는 회사 측의 고발만으로도 바로 수사가 시작되고 공권력이 개입한다. 현장에서 급박하게 벌어지는 용역 투입이나 노조 파괴 등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에는 너무나 느리게 대응하는 검찰과 노동부가, 노조의 불법행위에는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대응한다. 게다가 오랜 시간이 걸려 결국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처벌한다 해도, 그때는 이미 회사가 자기 입맛에 맞는 회사 노조를 만들어 민주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뒤다.-215쪽

강 변호사는 교육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교실을 마치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공간인 양 논쟁이나 비판이 사라진 곳으로 여긴다면 시민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미숙하다는 점을 근거로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을 빼앗는다면, 시민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시민 의식을 제대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 강 변호사는 "이러다가 학교는 정말로 정치적 미숙아들의 공간이 되어갈 것"이라고 우려한다.
"교사의 권리 부정이 청소년의 권리 부정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교사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시민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만드는 사회는 어떨까요?"
교사는 순수해야 한다고 여기며 그들을 정치적 금치산자로 만드는 일을 묵인한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일이다.-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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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서재 -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
김운하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월
품절


그러나 삶의 무게와 상관없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우리의 근원적인 무지이다. 매 순간 현재를 경험하지만 정작 이 순간이 나의 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현재의 시간'에 경험하는 사소한 우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사건이 미래에 어떤 운명을 낳게 될지 결코 알 수 없다. 토마스가 사색에 잠긴 순간, 테레사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히스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 현재'라는 순간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지금, 현재'가 아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라는 시간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 현재'의 의미를 결정해주는 판관은 미래다. 그리고 미래는 내가 아이러니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34~35쪽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의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를 바라지만, 불현듯 어떤 계기로 이 세계가 근원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져 단지 죽음이라는 무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때 찾아드는, 주관적 의식과 이 세계 사이의 모순과 괴리가 바로 부조리이다. 다시 말해 부조리란 이 세계 자체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립이요, 그러한 대립에 대한 의식적 자각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바로 그런 모순을 의식하는 순간에 찾아드는 허무와 절망의 감정이다.-86~87쪽

카뮈가 말한 반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부조리를 부조리 상태로 살게 하는 것, 무익하고 희망이라곤 없는 노동뿐인 삶을 불굴의 의지로 감내하며, 부조리를 명료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때문에 카뮈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를 명료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영웅과도 같다. 부조리를 버티며 사는 부조리의 영웅이다.-92쪽

흔히들 하는 오해이지만, 행복이란 멀리 있는 높고 거대한 어떤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실은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찾고자 하면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차오르는 크고 작은 기쁨과 즐거움들이다. 그러니 행복을 거창하게 과장하지도, 또 너무 집착하지도 말자. 그보다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위험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열과 성을 다 바칠 결단력과 용기, 배짱이 있는지를 숙고해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100~101쪽

나는 삶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스스로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알기 위해선 그 전제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선 그것부터가 쉽지 않다.-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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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구판절판


일리히의 주요개념 중 하나는 반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이다. 산업사회 스스로가 자신의 원래 목적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자동차 구입비, 기름값, 교통체증을 포함하여 자동차에서 보낸 시간 등을 모두 합해 계산하면, 사람들은 1만 킬로미터를 이동하기 위해 한 해 평균 1600시간을 썼다. 그럼 자동차의 진짜 스피드는 지금 속도계에 찍히는 바로 그 속도가 아니라 겨우 시속 6Km밖에 안된다는 것. 우리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바치는 대부분의 노동이 사실 진정한 생산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47쪽

악역을 도맡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일종의 영웅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일을 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그렇게 힘든 일을 나 같은 사람이 떠맡아야 할 거대한 사명이다. 이렇게 믿으며 '자신의 악행'을 '역사의 사명'이나 '조직의 대의'로 조작하는 것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들뿐 아니라 독재자의 하수인들, 각종 고위직의 부정부패 연루자들은 하나같이 '나는 죄가 없다'고, 꼭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악역 자처범(?)의 한결같은 특징은 바로 지독한 '근면성'이다. 이 일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다만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근면성.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이야말로 세상을 하루하루 더 나쁘게 만든다.-67쪽

그리하여 데리다는 말했다. 실패한 애도만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공한 애도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애도의 피날레다. 애도의 불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애도의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상실의 슬픔이란 충격이나 폭소처럼 즉각적인 감정이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천천히 온다. 상실감은 '슬퍼하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분리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슬픔은 삶을 객관화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커다란 충격으로 마비되어버린 영혼은 슬퍼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80쪽

'용광로'나 '샐러드 그릇'같은 공존의 상징들은 위선적이다. 다인종사회의 융합을 상징하는 용광로는 사실 '누가 녹는가?'라는 질문을 은폐하는 지배의 또 다른 전략이다. 샐러드 그릇이라는 비유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다양성들이 '소화'되었을 때 그 다양한 몸과 영혼을 소화, 흡수해서 이익을 보는 자들이 진정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용광로는 쉽게 통합되거나 복속되지 않는 것들, 즉 '녹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오를 함축한다. 샐러드는 한 가지 요리에 '섞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를 함축한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도, '다문화'라는 레테르 자체가 차별의 표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용광로나 샐러드 그릇처럼 지배와 차별을 은폐하는 완곡어법이 아닐까. 다문화가정은 없다. 오직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은, '가족' 자체가 있을 뿐. 다문화가정이라는 명명 뒤에는 '단일민족국가'라는 폭력적 환상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118~119쪽

정말 우리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머나먼 연예인들의 정보는 샅샅이 꿰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듣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것 같다. '하룻밤에 세계사 마스터하기' '일주일만에 영어문법 끝장내기'같은 효율적인 정보의 소통에는 익숙하지만,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타인의 육성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경험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의 박탈, 타인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의 박탈, '정보의 홍수'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현대인이 지불한 대가는 바로 이런 사람의 체온이 담긴 '이야기의 박탈'이 아니었을까.-172쪽

재능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라는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빨리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종 학원으로 아이들을 출근시킨다. 조기교육, 조기유학, 조기졸업.... 모든 것을 '조기'에 해결하려고 하는 이 재능의 속성재배시대. 사람들은 지니어스 요정의 축복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지니어스를 내면화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능은 마치 한정된 자원처럼 취급되고, 창작은 재능을 소모하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가 노먼 메일러조차도 "내가 쓴 책은 모두 조금씩 나를 살해했다"고 고백했을까. 재능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 아닐까.-196쪽

누구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건드리면 세상 모든 것과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던 그 시절의 '비밀'은 '폭로의 대상'이 아니라 '재산목록 1호'다. 비밀을 만들고, 봉인하고, 공유하고, 지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배운다. 비밀이라는 단단한 보호막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릴 수 없는 진실, 참을 수 없는 진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진실한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나라고 가정되는 주체'를 연기한다. 우리는 '나라고 가정되는 주체'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자신의 연기력에 심취한 것은 아닐까.-209쪽

모든 사랑은 편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나누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의는 다르다. 예의는 모르는 이에게도, 싫어하는 이에게도, 심지어 철천지원수에게도 지켜야 할 무엇이다. '난 널 알아, 그러니 널 지배하겠다'라는 배타적 모성이 아니라, '난 널 몰라, 하지만 너의 너다움을 인정한다'는 보편적 예의가 가족 안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 자식'을 향한 배타적 애착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타인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가 그립다.-259쪽

비평은 '이 글은 온전히 내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을 줄이면서, '사실은 내 것'을 털어놓는 글쓰기, 그러니까 감추면서 드러내는 글쓰기다. 물론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끄집어낸 나의 무의식'을 조금씩 끄집어내면서,평론가는 작품을 통해 비로소 깨어난 스스로의 숨은 내면과 진정으로 대면하게 된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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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2월
절판


사파티스타는 세계에 대해 맨얼굴을 드러내고 육성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무언가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믿지 않는다. 픽션의 힘을 믿는 것, 픽션의 힘에 입각해서 운동을 전개하는 것, 여기에 사파티스타 운동의 참신함이 있다. 픽션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때야말로 사람은 리얼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131쪽

현재 리비아 무력 개입에 나선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정부가 열을 올리며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은 절대로 유럽과 같은 '민주주의'를 늦게나마 자국에도 도입하려는 '민주 혁명'따위가 아닌 것이다.
희망하는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과일 노점상을 하던 20대 청년이 장사 밑천을 몰수당하고 절망 속에 분신자살을 한 사건에 대해 젊은이들이 크게 공감함으로써 아랍의 봄의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랍의 봄은 청년의 운동, 프레카리아트의 운동이며, '불안정',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준準안정' 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이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 전부를 거부하는 운동인 것이다. 지역적으로 특수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지중해 건너편에도 탄력적으로 불이 옮겨붙었고, 나아가 유럽과 세계의 모든 도시에도 가뿐하게 불씨를 퍼뜨렸던 것이다.-176~177쪽

원자력 발전 사고는 빙결이나 눈사태처럼(또는 지진이나 쓰나미처럼) 준안정 상태의 해결로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과냉각수나 경사면에 쌓인 눈처럼 준안정 상태 그 자체의 지속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가령 계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점진적으로 향해 간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원자력 발전 사고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사고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현세적 현실과 더불어 잠재적 에너지의 과포화가 늘 유지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가시적인 차원에서 상전이가 연속적인 답으로서 산출될 뿐만 아니라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는 과잉에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 사고는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옮아가는 운동으로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이다.-207쪽

혁명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 생기지만, 봉기의 기쁨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생겨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문제 해결 사회에서는 도래해야 할 해방의 기쁨이라는 약속 아래 피로를 불문에 부치지만, 문제 제어 사회에서 피로는 해방의 기쁨을 지속시키는 조건으로 떠오른다. 요컨대 혁명은 피로를 알지 못하지만, 봉기는 피로하다. 우리가 봉기의 시대를 살면서 쌓아 가는 것은 피로뿐만이 아니다. 방사선 피폭 양도 쌓여 간다. 그것은 그러한 축적이 우리의 신체와 뇌에 파놓은 '균열'을 물리적으로 한층 벌어지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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