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히의 주요개념 중 하나는 반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이다. 산업사회 스스로가 자신의 원래 목적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자동차 구입비, 기름값, 교통체증을 포함하여 자동차에서 보낸 시간 등을 모두 합해 계산하면, 사람들은 1만 킬로미터를 이동하기 위해 한 해 평균 1600시간을 썼다. 그럼 자동차의 진짜 스피드는 지금 속도계에 찍히는 바로 그 속도가 아니라 겨우 시속 6Km밖에 안된다는 것. 우리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바치는 대부분의 노동이 사실 진정한 생산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47쪽
악역을 도맡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일종의 영웅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일을 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그렇게 힘든 일을 나 같은 사람이 떠맡아야 할 거대한 사명이다. 이렇게 믿으며 '자신의 악행'을 '역사의 사명'이나 '조직의 대의'로 조작하는 것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들뿐 아니라 독재자의 하수인들, 각종 고위직의 부정부패 연루자들은 하나같이 '나는 죄가 없다'고, 꼭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악역 자처범(?)의 한결같은 특징은 바로 지독한 '근면성'이다. 이 일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다만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근면성.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이야말로 세상을 하루하루 더 나쁘게 만든다.-67쪽
그리하여 데리다는 말했다. 실패한 애도만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공한 애도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는 것이 애도의 피날레다. 애도의 불가능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애도의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상실의 슬픔이란 충격이나 폭소처럼 즉각적인 감정이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천천히 온다. 상실감은 '슬퍼하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분리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슬픔은 삶을 객관화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커다란 충격으로 마비되어버린 영혼은 슬퍼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80쪽
'용광로'나 '샐러드 그릇'같은 공존의 상징들은 위선적이다. 다인종사회의 융합을 상징하는 용광로는 사실 '누가 녹는가?'라는 질문을 은폐하는 지배의 또 다른 전략이다. 샐러드 그릇이라는 비유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다양성들이 '소화'되었을 때 그 다양한 몸과 영혼을 소화, 흡수해서 이익을 보는 자들이 진정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용광로는 쉽게 통합되거나 복속되지 않는 것들, 즉 '녹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오를 함축한다. 샐러드는 한 가지 요리에 '섞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를 함축한다. '다문화가정'이라는 말도, '다문화'라는 레테르 자체가 차별의 표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용광로나 샐러드 그릇처럼 지배와 차별을 은폐하는 완곡어법이 아닐까. 다문화가정은 없다. 오직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은, '가족' 자체가 있을 뿐. 다문화가정이라는 명명 뒤에는 '단일민족국가'라는 폭력적 환상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118~119쪽
정말 우리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머나먼 연예인들의 정보는 샅샅이 꿰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듣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것 같다. '하룻밤에 세계사 마스터하기' '일주일만에 영어문법 끝장내기'같은 효율적인 정보의 소통에는 익숙하지만,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타인의 육성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경험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의 박탈, 타인의 삶이 담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의 박탈, '정보의 홍수'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현대인이 지불한 대가는 바로 이런 사람의 체온이 담긴 '이야기의 박탈'이 아니었을까.-172쪽
재능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나는 왜 재능이 없을까'라는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빨리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종 학원으로 아이들을 출근시킨다. 조기교육, 조기유학, 조기졸업.... 모든 것을 '조기'에 해결하려고 하는 이 재능의 속성재배시대. 사람들은 지니어스 요정의 축복을 느긋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지니어스를 내면화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능은 마치 한정된 자원처럼 취급되고, 창작은 재능을 소모하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위대한 작가 노먼 메일러조차도 "내가 쓴 책은 모두 조금씩 나를 살해했다"고 고백했을까. 재능을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고통스러워진 것이 아닐까.-196쪽
누구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건드리면 세상 모든 것과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던 그 시절의 '비밀'은 '폭로의 대상'이 아니라 '재산목록 1호'다. 비밀을 만들고, 봉인하고, 공유하고, 지키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배운다. 비밀이라는 단단한 보호막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릴 수 없는 진실, 참을 수 없는 진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진실한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나라고 가정되는 주체'를 연기한다. 우리는 '나라고 가정되는 주체'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자신의 연기력에 심취한 것은 아닐까.-209쪽
모든 사랑은 편애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나누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의는 다르다. 예의는 모르는 이에게도, 싫어하는 이에게도, 심지어 철천지원수에게도 지켜야 할 무엇이다. '난 널 알아, 그러니 널 지배하겠다'라는 배타적 모성이 아니라, '난 널 몰라, 하지만 너의 너다움을 인정한다'는 보편적 예의가 가족 안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 자식'을 향한 배타적 애착보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타인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가 그립다.-259쪽
비평은 '이 글은 온전히 내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을 줄이면서, '사실은 내 것'을 털어놓는 글쓰기, 그러니까 감추면서 드러내는 글쓰기다. 물론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끄집어낸 나의 무의식'을 조금씩 끄집어내면서,평론가는 작품을 통해 비로소 깨어난 스스로의 숨은 내면과 진정으로 대면하게 된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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