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때려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확실히 굳힌 건 우리가 돈이 없어서 5월 월급이 반만 나오고 나머지 반은 나중에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 전에도 '아 정말 내가 참아야하나,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쭉 해오고 있었던 터라, 그 얘기는 넘칠락 말락 하는 컵에 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내가 확고하게 마음을 먹게 해 주었다. 알고봤더니 난 운좋게도 국고예산으로 월급이 나오도록 편입되어 있어 5월 월급이 제대로 나왔지만, 다른 직원들은 정말로 반만 나왔다. 나도 까딱하면 반쪽짜리 월급으로 집세를 내고 적금을 붓고 바닥난 통장을 보며 며칠간 허리를 졸라매야 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지만, 때려칠 마음이 확고해진 게 월급때문이라는 것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화가 나는 일이다. 일을 통해 얻는 보람이 없고, 월급날만 바라보는 직장인 A가 되어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스무살 무렵에 꿈꿨던 내 모습은 이게 아니었고,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지경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돌아보니 어느 순간 모든 낙이 퇴근후와 월급날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월급도 약간의 적금을 넣고 집세랑 공과금같은 고정비용을 제하고나면 한달 딱 아등바등 살기 좋은 정도라(적금넣고 가벼운 문화생활 할 수 있는 정도면 배부른 소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급에서 근로소득세나 의료보험료를 비롯한 각종 공제 금액이 먼저 빠져

나가고 남은 돈만 내 손에 들어오듯이 명목상으로는 내 월급이지만 내 자

유의지와 무관하게 빠져나가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없을까? 원인과 결

과가 뒤바뀌어 소비 지출이 먼저 설정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여가를 즐기며 소비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하기 위해 소비해야 하고 다시 그 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이미 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지출이 정해져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이 그다지 풍요로워진 느낌이 들지 않는 이

유이자 그 생활을 현상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돈을 벌고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p.168

이 생활이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데, 여기에서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계속 여기 있다가는 평생 지금같은 불만을 안고 살겠지 하는, 그런 불안감도 한몫하여 상사에게 퇴사의지를 밝히게 되었다.

6월초에 상사에게 7월말에 그만두겠다고 질러버린 후 난 후회했다. 한 달 월급을 포기하고서라도 그냥 6월말까지 일하겠다고 해버릴 걸!!! 일단 던져놓고나니 후련하긴 한데, 두 달을 더 다니기가 너무나도 싫은 것이었다. 작년 12월에 학기 끝나자마자 바로 입사해버려서 생각 정리할 시간도 없었으니 한두달정도 쉬면서 재충전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여튼, 바탕화면에 D-DAY를 설정해두고 매일 떨어지는 일을 처리하다보면 시간이 어떻게든 지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오늘로써 D-40이다.

 

 

 

공장이나 회사의 규격화된 노동에 적응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본

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학교 교육으로써

길러지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이다. 바로 노동자를 훈육(discipline)하는 것,

즉 길들이는 것이다. 징병제가 실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군대가 이러한 능

력을 극단적인 형태로 양성하는 공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속된 말로 '까

라면 까',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조직의 윗선에 맡겨버린 채 자신은 정

해진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이른바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그렇게 이루

어진다. 비판적 사고를 키우기 힘든 주입식 교육, 객관식 문제를 통한 줄을

세우는 교육,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에 상관없이 '전투'능력을 키워야 하는

군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 되어 지루함을 잘 참을 수 있

도록 길들여진 노동력을 양성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더욱이 교육은

동시에 그 사회를 지배하는 신념 체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수행한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

이다. 잘 길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

배 계급이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유지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pp.33~34

퇴사를 결심하고 많은 것을 생각해 봤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규격화된 노동'을 오기로 참아내어 대학 간판을 쟁취할 수 있었고,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선 왜 굳이 그래야 할까란 생각을 갖고 이것저것 주워듣고 읽다보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하는 내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학점이 똥망이 되고 준비하던 시험도 포기하고 희망직종도 없어져버린 지금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잘 길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노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불합리한 일을 하라고 지시받으면 왜냐고 자꾸 토를 달고,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만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나의 상사도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도 돈을 벌어먹긴 해야 하니 이상한 일을 도대체 왜 내가 해야 하나 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일은 했고, 쭉 성과를 잘 낸 편이었다고 자부한다...만 내가 감내해야할 스트레스에 비해 월급이 적은 것이 짜증났다.

그래, 아니라고는 해도 결국은 월급의 문제였나보다. 어떻게 글을 써도 그걸로 귀결이 되는구만 -_-;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굳이 여기에서 흔한 하소연을 풀어낼 필요는 없겠지.

 

사실 조직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개개인으로는 모두 좋은 사람임

에도 불구하고 조직이나 제도 전체적으로는 어이없이 불합리한 결과를 가

져오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국가 전체가 광기에 휩싸여

움직일 때 그저 묵묵하게 자기 맡은 일만 하는 이들이 모여 전쟁이나 대량

학살의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예는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가

족의 일원, 출신 지역의 일원, 국가의 일원으로 불릴 때 그 부름에 일일이

정당성을 따져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되어 거절은 곧 먹고사는 길이 막힌다는 의미

일 때, 우리는 쉽게 생계형 순응자가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건 회장이건

권력자의 옳지 못한 지시에 당당하게 맞섰다가 오히려 패기를 높이 평가받

아 출세하는 젊은이 이야기는 미니시리즈 드라마에나 나오는 판타지에 불

과하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p.83

 

이 인용구에 대한 커멘트를 하려면 너무 길어지고 구체적이 되어버릴 것 같으니 생략하고.

 

 

 

<회사가 우리를 열받게 하는 65가지 이유>를 보면 어떻게 이 작은 곳에 저게 다 있을지 신기할 정도로 내 직장 얘기랑 겹치는데, 저자가 강조하는 건  결국은 이런 것들이 '기업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공채 자리의 연봉, 직무분야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어 있어도 그 기업의 문화가 어떤지, 직원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내부자의 이야기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상황이니 기업문화를 보고 직장을 결정하기는 아직 어려운 듯 하다. 내 경우에도 입사 전에 지금의 상사에게 직무 내용이나 업무강도, 분위기 등에 대해 물었었는데 얼버무린 채 유의미한 답변을 듣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언론에 공개되는 구글이나 다음 등의 환상적인(사전적 의미로) 기업문화/직무환경에 열광하는 것일지도..

 

여튼, 내 발등의 불이다. 당장 그만둬도 먹고 살아야하니 하반기 공채를 준비해야지.

더 이상 '어떤 직업을 가져야지'가 내 꿈이 아니게 된 이상 최대한 즐겁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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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6-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아름답고 즐거울 브륀 님 일과 놀이 곧 찾으리라 믿어요.
차근차근 생각을 기울이면서
마음을 잘 추슬러 보셔요~

군대라는 곳은 평화를 짓밟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노예와 생체기계로 길들이지요.
그런데 참 많은 한국 사내는 이를
하나도 안 깨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