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산책 한길 히스토리아 9
아베 긴야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5년 6월
품절


그들은 집을 갖지 않고 방랑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민담 속에 나타나는 신과 동물의 위상은 [그림 동화]나 다른 지역의 민담에 나타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집시나 피차별 민족처럼 대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이나 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 신과 영은 인간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집시의 세계관과 소우주에서 살아가는 정착민의 우주관은 확연히 다릅니다. 대우주 속을 여행하는 집시와 마을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신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개의 우주]-83쪽

욥기가 괴물을 다루는 내용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의 모두 첫 문자를 괴물의 형상으로 그려 넣은 것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이란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진 우주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자는 우주의 입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교회의 입구에 괴물을 배치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중세건축의 괴물들]-101쪽

그리스도 교회는 어디까지나 우주는 하나라는 구도를 주장해왔습니다. 설령 신과 악마로 대변되는 선악이 서로 싸운다 하더라도 그 승패의 결과는 이미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결코 두 개의 우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교회가 주장하는 하나의 우주라는 구도는 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감성적인 면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나 수도원 깊은 곳에서 사색하는 인간과는 달리, 농민이나 시민은 아침부터 밤까지 대우주 즉, 자연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아무리 옳다고 설명한들 미지의 자연에 대한 공포는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차원에서 두 개의 우주를 믿었습니다. 대우주를 지배하는 괴물의 존재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태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교회 현관 위의 벽이나 입구에 괴물을 배치해서 그것들이 그리스도 교회 내부에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중세건축의 괴물들]-116-117쪽

중세 사람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부에 대한 의식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화의 탕진이란 고대의 호혜관계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많이 가진 자는 모두 써야 했습니다. 구두쇠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막대한 부를 가진 자는 국왕이건 유력자이건 그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탕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호혜 재분배의 관계 가운데서 인간의 삶을 결정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189쪽

대부분의 구빈원에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성체를 배령한 다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고, 농촌지역의 작은 구빈원에서는 환자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때로는 병든 사람, 열병, 지체가 뻣뻣하게 굳은 사람, 최근에 지체의 일부를 자른 사람, 버려진 아이, 출산이 가까운 임산부, 그리고 고아는 받아들이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로 보건대, 중세도시에서 구빈원이나 고아원, 양로원은 빈자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설자의 영적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써 상징적인 의미로 소수의 빈민이 선발되었을 뿐이며, 그것은 빈민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는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구빈원은 빈민을 위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증자, 부자의 영적 구원을 위해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자]-212쪽

이처럼 두 가지 우주가 부정되면서 두 우주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그 자리를 잃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그 교의를 널리 퍼뜨리건, 일상생활 감각의 차원에서 숲은 여전히 두려운 공간이며, 죽음과 질병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런 한에서 두 가지 우주의 관념은 감각적으로 근대까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적인 감성 차원에서는 두려움의 표적이 되었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공적인 권위 아래서 그 가치를 부정당할 때, 예전에 가졌던 공포심이 굴절해 경멸감으로 변질됩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감성의 차원에서 성립된 민중의 경멸감을 이용해 신분편성을 행하려는 위정자의 정책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리스도교의 우주론과 이교도의 두 가지 우주론이 접촉하는 순간부터 천시와 경멸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 소우주인 공동체가 해체되고, 영업의 자유로 동직조합이 해체되었을 때, 감성의 차원에서도 두 가지 우주라는 관념은 엷어집니다. 그리하여 두 가지 우주의 관념이 균질한 시공의 관념으로 대체되는 순간, 피차별민의 존재는 어둠 속에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335-336쪽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소리라고 하면, 순수한 음악, 또는 작곡된 음악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대우주의 소리가 전부 잡음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잡음에는 인간이 손을 댈 수 없는 불가침의 의미가 있는데, 그런 대우주의 소리에 대해 인간의 소리로 대항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럴 경우 종소리가 바로 소우주의 상징입니다. 한편으로 종소리는 신의 소리이기도 해서, 거기에 자동기계가 부착되어 저절로 종소리가 울리게 되었을 때, 중세 사람들은 신의 소리가 마침내 인간의 것이 되었고, 신의 소리가 공동체의 소유물이 된 것처럼 이해했던 것입니다.
[중세의 소리 세계]-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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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5-2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든 미국에서든,
또 오늘날 한국에서든,
문화나 문명을 말하는 이들은
으레 '도시에 있는 권력자와 지식인'
테두리에서만 이야기하기 일쑤예요.

중세유럽에서도
'도시 권력자와 지식인' 먹여살린
시골 흙일꾼은
언제나 숲에 깃들어
숲내음과 숲바람과 숲소리 누렸겠지요.

유럽이건 미국이건 한국이건,
'밥을 짓는 사람들' 눈높이에서
문화와 문명 바라본다면
사뭇 다른 이야기가
즐겁게 태어나리라 느껴요.

오월 봄날 밤에 듣는
개구리 노랫소리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도시사람 누구나 알 수 있기를 빌어요...

(아름다운 밤노래 들으며 이 댓글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