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금요일에는 종종 당고개역을 지나게 되는데 여유시간이 있으면 근처 헌 책방에 들린다. 헌책방은 규모가 작지만 내용은 제법 알찬 편이다. 사장님은 한 켠에 있는 방에서 사는데 갈 때마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얼굴로 또 술을 마신다. 누구를 불러놓고 마시기도 하고, 혼자 마시기도 한다. 지난번에는 전화로 수다를 떨면서 잔을 기울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나한테 그런다.
“총각, 같이 한잔 할까?”
들어가서 일 해야 한다니까 또 그런다.
“에이, 책 냄새 나는데서 한잔 하면 좋지 뭘 그래!”
일이 산더민데 하마터면 거의 소주잔 쥘 뻔 했다.
이 아저씨 술 실력에 비해서 장사실력은 형편없다. 처음 거래를 트던 날 내가 고른 책은 서너 권 정도. 안소영의 ‘책만 보는 바보’,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김예림의 ‘문학 풍경, 문화 환경’, 김영호의 사진집 ‘도시 그리고 여자’. 사장님, 자기가 붙여놓 가격표도 안 보고 대충 제목만 훑어보더니 그런다.
“팔천 원.”
책 뒤에 견출지로 붙어 있는 가격표도 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도 훨씬 싼 가격을 부르는게 아닌가. 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은 네셔널 지오그래픽이 잔뜩 쌓여 있길래 몇 권 집었다.
“삼천원”
세상에, 무려 권당 천원씩이다.
“미안, 깍아주고 싶은데 이거 권당 팔백원씩 산 거라서.”
이러지 마시라고, 권당 이천원씩 받으시면 안되겠냐고 통사정을 해도 막무가내다. 천원이란다. 물건 싸게 사고 기분 나쁜 적은 처음이다. 알콜의 과다섭취로 인한 뉴런계통의 이상일까? 아니면 단순한 경영 마인드의 부실일까?
#. 2
헌책방의 매력은 단지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혀 생각지 못한 책을 구입하게 되는 즐거운 불확실성과 간혹 절판되었거나 속표지에 저자 싸인이 들어간 레어 아이템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내게 있어서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 현대문학은 헌책방이 열어준 신 세계였다. 뿐만인가, 박찬욱의 오마주가 출간되기 전 헌터들의 수배목록 1호 였던 ‘비디오 드롬’도 헌책방에서 구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스들이 언제나 무한한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책 한권 못 고르고 그냥 나올 때도 있다. 사실 그런 헛발질보다 더 난감한건 오래 있기 무안해서 괜히 아무 책이나 한권 집어 나올 때다. 그렇게 해서 얻은 로빈쿡의 ‘바이러스’같은 책들은 정말 처치 곤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헌 책방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책 못 고르는 날 한 두 권씩 사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고르는 날에 안 사들였다는 건 아니지만.

처음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고른 날 사장님 그러셨다.
“아, 그 책 좋은 책이지. 그 왜 독수리 사진 한 장 찍을 라고 한 삼년씩 숨어서 기다리고 그러는거라고 그게!”
끄덕끄덕. 내 생각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만큼 사진이 좋은 잡지가 없다. 아무 호나 들어도 웬만한 작가의 사진집이나 화보집보다 훨씬 퀄리티가 높다.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왔던 남자 주인공도 직업이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였다.

그게 아니라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내게 호감도가 높은 잡지다. 내 사진 스승님께서는 아직 디카 시장이 채 개척되기도 전 일찍이 300만 화소 똑딱이로 한국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표지를 장식하신 일이 있었다. 저화소 카메라의 쾌거이기도 했지만 더 경탄할만한 건 화소에 구애됨이 없는 내셔널측의 안목이었다.
내게 처음 그 잡지를 보여준 건 그로부터도 한참 전, 카이스트에서 석사 공부하던 어느 녀석이었다. 녀석은 가끔 사진이 멋있고 외국말이 잔뜩 쓰여있는 잡지를 들고 오곤 했는데 어느 날은 그게 탐이 났더랬다.
“그거 놓고 가.”
“왜.”
“읽게.”
풋. 하고 비웃던 고 싸가지가 얄미워서 그날 밤은 사전을 찾아가며 잡지를 읽었었다. 오랑캐 말이라고 늘 저급한 건 아니었다.
#. 4
그런데 어느 날.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헌책방에 수북히 쌓여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종적이 묘연해진 것. 어질어질한게 간만에 모닝시거 한대 피워 문 느낌. 요즘 이런 잡지 볼 사람 없다고 생각한 건 순진한 판단이었던 건가.
“미안, 어느 젊은 여자가 한꺼번에 다 사가더라구.”
뽀드득, 하고 이를 갈다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세상에 철 지난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잡지 나부랭이에 관심 있는 젊은 여자가 흔한 건 아니니라.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건, 필시 알라디너일 것이다.’
하긴, 알라디너가 아니고서야 이런 상도의를 한참 벗어난 짓을 저지를 인간들이 또 있을까? 이 무법자들. 머릿속에 몽타주가 촤르륵 넘어간다. 웬디양? 아치스트랄? 아니면 도로도? 심증은 확실하다. 현장에 떨어진 두발 DNA분석과 지문 분석, 철저한 탐문수사. 이젠 증거를 밝혀내는 일만 남았다.
그래, 이 긴 글을 쓴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내 내셔널 지오그래픽 몽땅 집어간 인간 자수해라. 교양있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매점매석에 사재기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과학적 수사를 통한 수사망은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좁혀 들어가고 있음을 밝히며 이만 글을 마칠까 한다. 빰- 빰- 빰- 빠라바라바라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