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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깊이에의 강요 외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또하나의 고찰 이란 제목의 단편모음집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그의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한 템포 빨리 여운을 준다는 것이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 얻어낼 것이 없을까 생각 속에서 탐색하고 있노라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나버린다.
한 템포 빠르게 여운을 주기에 나도 한 템포 빠르게 생각을 진척시켜야 한다.
이 단편들 중에서 단연 '깊이에의 강요'와 '그리고 또하나의 고찰'이 좋았다. 짧은 분량이었지만 생각을 하게끔 해준다. 그 생각이란 건, 언젠가는 했어야하는 생각이다.
'깊이에의 강요' 에선 한 평론가가 어떤 젊은 여류화가에게 별 뜻 없이 당신의 작품에선 깊이가 부족하다 고 말한다. 그 후 그 비평이 신문에 실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 화가는 스스로 자신에겐 깊이가 부족하다며 자책하고 재능있는 화가이며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삶은 순식간에 황폐해지고,무너져간다.
결국 그녀는 자살하고 이후, 그 평론가는 그녀에게서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었다고 기고한다.
깊이에의 강요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그림, 조각, 음악, 글에 깊이가 없는 것 같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만큼의 악평이 또 있을까.
깊이에의 강요- 그건 그렇게 혹독한 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찰' 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학의 건망증'.
이건 작가의 에세이같은 건데,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몇번 반복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책들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것.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다 읽었지만 지금 알렉산더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고 30년 전쟁에 관해 읽었지만 지금 그것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30년 전 나는 글읽는 것을 배웠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웬만큼은 읽었다. 그런데 고작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수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소설의 제2권에서 누군가가 권총으로 자살한다는 희미한 기억이다. 30년 동안 읽은 것이 다 헛일이라니!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의 수천 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는데도, 망각 이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니."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분명히 그 책을 읽었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책이 없다. 왜냐면, 지금 그 책을 다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까.
작가는 말한다. 책을 읽었으면, 그 책이 나를 변화시켜야 되지 않았겠느냐고.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여기서 또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분명 기억에는 거의 남지 않은)을 통해서 내 삶을 변화시켰던가. 그 책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
이렇게 문학의 건망증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겐 또 하나의 괴로움이다.
같은 책을 여러번 읽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감탄해야한다니!
그래도 마지막 작가의 (독자를 위한, 자신을 위한)합리화는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오랜만에 글을 길게 써봤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후, 문학의 건망증으로 인해 또다시 잊게 되는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난 후 짧게든 길게든 좋든 나쁘든 약간의 평을 덧붙여 본다는 건, 문학의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