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 P-1

나는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이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 힘들 리는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모든 인생들이 그랬다. - P-1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 P-1

그렇다. 누군가 고단한 당신을 위로하고자 나직하게 노래한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노랫말처럼 곱게 흘러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쉽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그 노랫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 P-1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보다 좋은 내일, 내일보다 좋은 모레, 매일매일 행복한 나. 제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것도 미망에 홀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를 넘으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 결락되어 있는 인간은 무력한 사람이 된다.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삶을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행복을 꿈꾸어도 죄를 짓게 되고, 아예 꿈을 꾸지 않아도 무력해진다. 자기 아닌 것을 너무 갈망하다 보면 자기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자신이 왜소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은 탁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땐 정녕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 P-1

그러나 이따금 기적이 일어난다. 삶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정치의 잔혹함과 비루함을 통절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치 결별을 선언해야 마땅한 상대와 재결합을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영광은 바로 끝내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그들의 마음에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예술 비평가 스탠리 카벨은 별생각 없이 그냥 결혼해서 무난한 듯 사는 일보다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이혼의 위기를 극복하고 헤어졌던 상대와 다시 재혼하는 일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결합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결합은 별 고민 없이 진행된 첫 번째 결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한계와 결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결합하기로 감히 결심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오해나 불신을 극복하고 마침내 화해에 이른 것이다. 불행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 P-1

나는 삶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한 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 고단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정치적 동물의 길》은 바로 그러한 삶과 정치에로 초청하는 작은 손짓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 P-1

아무리 분투해도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 정치가 있다. 불면증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잠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잠이 와야 한다. 정치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오길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 가려고 하면 도리어 멀어지는 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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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평균, 중간을 추구한다는 국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글프게도 중간의 인간은 대체됩니다. AI는 중간을 학습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지금 중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로 많은 변화가 중간에 있는 인간들을 없애고 있습니다. - P-1

이처럼 방법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플랫폼을 만들거나 장인이 되는 것. 즉 프로바이더가 되거나 크리에이터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1등이 되어야 하고요. 가운데는 없어요. 결국 이 이야기의 무섭고도 슬픈 결말은, 우리가 완전체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P-1

이제는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고 성장의 기록을 채록하는 것이 곧 나의 프로파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직접 하셔야 하고요. 둘째,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 성장 과정이 나의 자산으로 환금될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문화적 자본이니까요. 그리고 그게 나의 업이 될 테니까요. - P-1

그러니 늘 조심하고 늘 사려 깊게 사는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상당한 피로도가 따르겠죠. 항상 착한 척하는 건 몹시 어려우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착하게 살아야 해요. 근원적으로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착한 척한다면, 긴장이 풀어진 순간 단 한 번의 일탈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모든 개인의 정보가 줌인되어 확대되고, 환기되고, 재생될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일상의 매 순간이 항상 건실해야 한다’는 삶의 법칙이 각자에게 요구될 것입니다. - P-1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구글에 검색해본 다음, 같은 게 나오면 안 하는 것입니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걸 해야지, 나오는 걸 하는 순간 카피캣이 됩니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하면 나만의 신용이 쌓일 테고, 그것이 브랜딩이 되겠죠. 저는 이것이 진정성의 시대에 개인의 덕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들이 하는 건 하지 않는 것, 반골이죠. 저는 이것을 존재의 의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다르니까요. 그리고 소중하니까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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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초반에는 이 질문이 변화의 신호인지 단순한 소음인지 알기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그때의 방법은, 많이 읽는 겁니다. 책이든 뭐든 꾸준히 많이요. 읽다 보면 패턴이 반복되는 게 보입니다. 신호가 증폭되는 게 있고 감소하는 게 있는데, 그걸 보면 됩니다. 구글트렌드 등 검색엔진의 키워드 분석 툴이 이런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누군가에게는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장 미국 주식을 살지 말지 누가 찍어주면 좋겠다는 사람에게 몇 년 동안 책 읽으라 하면 좋아할까요? 그러니 급한 대로 ‘1000권 읽고 깨달은 것들’ 같은 다이제스트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취란 다이제스트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1000권을 읽는 와중에 그 노력을 통해 각성하는 거지, 1000권에 담긴 정보가 저절로 각성을 주지는 않습니다. 성취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얻어지는 훈장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P-1

여기에 한 가지 더하고 싶은 얘기는, 무조건 열심히만 하는 게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하면 소진됩니다. 한 신문사의 기사에 따르면 2002년에는 텔레마케터가 유망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에는 없어질 직업 1위로 지목됐습니다. 2002년의 누군가는 15년도 안 되어 사양산업이 될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방향을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에 충실히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생각을 먼저 하면 돼요. 일어날 일은 일어날 테니까요. 그냥 해보고 나서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하고 나서 검증하지 말고, 생각을 먼저 하세요. ‘Just do it’이 아니라 ‘Think first’가 되어야 합니다. 그 생각의 자료 중 하나로 앞에 말씀드린 3가지 상수도 활용해보시기를 권합니다. - P-1

테크놀로지에 대한 정의 중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당신이 태어난 다음에 나온 것Technology is anything invented after you were born, everything else is just stuff"이라는 말입니다. 컴퓨터과학자 앨런 케이Alan Kay의 말인데, 한마디로 내가 새로 배워야 하는 신기한 게 테크놀로지라는 거예요. 저에게 스마트폰은 테크놀로지입니다. 그래서 처음 쓸 때 적잖이 애를 먹었죠. 반면 1996년 이후 태어난 Z세대는 스마트폰이 너무 쉬운 기술입니다. - P-1

둘째는 인과를 증명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이때는 ‘쉽게’ 전달한다는 게 특히 중요합니다. 복잡한 도표와 논리로 만들어진 논문으로 전달한다면 소수의 전문가만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러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정받더라도 전체 사회의 자원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공감하지 못한 대다수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쉬운 형태로 정보를 표현하는 방식이 소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합의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를 최근에는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data visualization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정의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정말 훌륭한 사람은,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사람이에요. 많은 산업 또는 학문의 전문가들이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나름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끼리는 쉽지만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 나쁜 사람은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합니다. 상대방의 무지 혹은 정보의 격차가 자신의 헤게모니를 키워주기 때문에 일부러 못 알아듣게 말하는 거예요. - P-1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반복해서 읽으면 나도 모르게 그 속의 패턴을 익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백신 전문가가 된 거죠. 무엇 덕분에? 바로 소셜 네트워크 덕분입니다. 유튜브, 트위터,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이 수많은 정보의 상호교류를 가능케 합니다. 예전에는 엄청난 이슈가 생기거나 루머가 돌면 TV나 라디오에서 정부 담화문을 발표해 잠재우곤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 발표로 끝이었고요.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의견과 피드백이 교류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공감을 많이 얻고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정보가 우위를 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자가 스스로 교양을 쌓는 시스템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 P-1

더욱이 이제는 기존처럼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행위란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어서 정해진 진도를 나가는 건데, 유튜브만 봐도 세상에 수많은 지식과 그에 따른 엄청난 지혜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가르치나요. 이제는 내가 배우고 싶은 걸 정의하고, 그것을 스스로 체크해야 합니다. 즉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배울 범주를 정하고, 그것을 나의 본진으로 삼는 것이죠. 그에 따라 현명해지기 위한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는 작업, 곧 얼개를 만드는 작업이 교육의 역할이 될 테고, 나머지는 매체를 통한 자가학습으로 가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 P-1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려면 측정이 중요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improve it"라는 금과옥조를 전해주었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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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2010년 한 신문사에서 데이터를 통해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작업이 가능한지 의뢰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기껏해야 특정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측정하는 리포트를 내는 수준이었던 터라 언감생심 그 일이 가능한지도 가능할지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요 일간지 전면을 무려 5일이나 우리의 이름을 걸고 채울 수 있다는데,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죠. 당시 그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패기와 무모함은 지금 생각해보면 가히 치기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건대 그때가 저와 동료들의 터닝포인트였음은 분명합니다. - P-1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개인들의 욕망의 합이 곧 미래에 벌어질 일들의 인풋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욕망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애초에 멈출 수도 없습니다. 욕망이란 나의 존재가 좀 더 안정되게 유지되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내가 소멸한 후에도 나의 존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본능에서, 나의 자아가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에게 존중받고 영향력을 가지길 바라는 무한한 욕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니까요. 우린 결코 욕망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욕망하고, 원하는 것을 시도하십시오. 지금 시작하면,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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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와 달리 소리를 보자 무척 어색해했다. - P-1

소리가 풋 하고 웃었다. 그러곤 혹 지우가 그 웃음을 오해할까 얼른 표정을 단속했다. - P-1

지우를 만난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 소리는 벌써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소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갈색거저리 유충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 용식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지우의 답장을 한참 기다렸다. 가게 일이 바쁜지 지우는 바로 답신 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 P-1

지우는 제 속에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몇몇 기억 때문이었다. 지우는 그걸 이야기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그러다보면 자신도 그 과정에서 뭔가 답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혹은 다른 질문을 발견하거나. - P-1

사실 방학 첫날 소리에게 용식을 맡길 때 지우는 ‘방학 동안 외삼촌 가게를 도울 거’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랑 카페, 파도타기 용품 대여를 겸하는 곳인데 삼촌이 와서 일도 배우고 마음도 좀 추스르라 했다’면서. 지우는 ‘마음 좀 추스르라’는 말이 소리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았고, 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좀 싫었다.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 P-1

보험사에서도 카드 내역서를 보면 다 알 테고, 그때 일을 굳이 낯선 이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우 딴에는 드물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 P-1

지우가 전송 단추를 누르자 연이어 휴대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지우가 움찔 놀라며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문자창을 열었다. - P-1

이번에도 선호 아저씨였다. 지우가 집을 나온 뒤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우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지우는 아저씨에게 따로 전화하거나 답장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 것 같았고, 자신이 하고픈 말 역시 이미 쪽지로 남기고 와서였다.

‘아저씨, 저 방학 동안 다른 데서 일 좀 하고 올게요. 가출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개학 전에는 돌아오겠습니다.’ - P-1

선호 아저씨였다. 지우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떠난 엄마에게 화가 나면서도 왜 자꾸 아저씨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생전에 엄마가 자주 강조하던 대로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라서?
—하지만 조금 약한 사람이기도 해.
아저씨와 살림을 합치기 전 엄마는 선호 아저씨를 소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늘 센 척해온 네 아빠보다는 강한 사람’이라고. - P-1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 P-1

다른 이유는 없었다. 소리는 그저 그 자리에 자신이 채권자로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지우 또한 채무자가 아닌 친구로 거기 있어줬으면 했다. 소리 생각에 그러려면 둘 사이에 어떤 형식 혹은 교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 사이의 어떤 계산 혹은 지위를 무화시키는.

‘그런데 그게 뭘까?’ - P-1

이모가 호박잎을 다듬다가 멈추고 문득 거실 바닥을 응시했다.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 P-1

‘그동안 내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인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재작년 축구 훈련중 채운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했다. 그러고 담당의로부터 더이상 운동선수로 살기 어려울 거란 진단을 받은 뒤 남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내가 그만둔 게 아니니까. 내가 의지가 약해서, 실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양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 P-1

희생과 인내가 꼭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닌데, 그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진실을 감당하는 데는 언제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 P-1

어쩌면 내게 ‘당신이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 약속한 그 사람이 그런 용기를 주었던 걸까? 그 밤, 과연 어떤 마음과 마음이 만나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때 나는 모든 걸 이해하고 움직였다기보다 그냥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래야 한다’는 걸. - P-1

—왜 하필 뱀이야?
처음 용식을 집에 들였을 때 엄마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집에 파충류를 들이는 게 마뜩잖은 눈치였다. - P-1

하지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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