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문자를 주고받을 때와 달리 소리를 보자 무척 어색해했다. - P-1
소리가 풋 하고 웃었다. 그러곤 혹 지우가 그 웃음을 오해할까 얼른 표정을 단속했다. - P-1
지우를 만난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 소리는 벌써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소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갈색거저리 유충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 용식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지우의 답장을 한참 기다렸다. 가게 일이 바쁜지 지우는 바로 답신 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 P-1
지우는 제 속에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음을 알았다. 강렬한 경험이지만 여전히 해석이 잘 안 되는 몇몇 기억 때문이었다. 지우는 그걸 이야기로 한번 풀어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직접 말했을 때보다 그림으로 그렸을 때 훼손되는 부분이 적은 어떤 마음을. 그러다보면 자신도 그 과정에서 뭔가 답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혹은 다른 질문을 발견하거나. - P-1
사실 방학 첫날 소리에게 용식을 맡길 때 지우는 ‘방학 동안 외삼촌 가게를 도울 거’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랑 카페, 파도타기 용품 대여를 겸하는 곳인데 삼촌이 와서 일도 배우고 마음도 좀 추스르라 했다’면서. 지우는 ‘마음 좀 추스르라’는 말이 소리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았고, 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좀 싫었다.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 P-1
보험사에서도 카드 내역서를 보면 다 알 테고, 그때 일을 굳이 낯선 이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우 딴에는 드물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 P-1
지우가 전송 단추를 누르자 연이어 휴대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지우가 움찔 놀라며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문자창을 열었다. - P-1
이번에도 선호 아저씨였다. 지우가 집을 나온 뒤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우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지우는 아저씨에게 따로 전화하거나 답장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 것 같았고, 자신이 하고픈 말 역시 이미 쪽지로 남기고 와서였다.
‘아저씨, 저 방학 동안 다른 데서 일 좀 하고 올게요. 가출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개학 전에는 돌아오겠습니다.’ - P-1
선호 아저씨였다. 지우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떠난 엄마에게 화가 나면서도 왜 자꾸 아저씨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생전에 엄마가 자주 강조하던 대로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라서? —하지만 조금 약한 사람이기도 해. 아저씨와 살림을 합치기 전 엄마는 선호 아저씨를 소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늘 센 척해온 네 아빠보다는 강한 사람’이라고. - P-1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 P-1
다른 이유는 없었다. 소리는 그저 그 자리에 자신이 채권자로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지우 또한 채무자가 아닌 친구로 거기 있어줬으면 했다. 소리 생각에 그러려면 둘 사이에 어떤 형식 혹은 교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 사이의 어떤 계산 혹은 지위를 무화시키는.
‘그런데 그게 뭘까?’ - P-1
이모가 호박잎을 다듬다가 멈추고 문득 거실 바닥을 응시했다.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 P-1
‘그동안 내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인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재작년 축구 훈련중 채운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했다. 그러고 담당의로부터 더이상 운동선수로 살기 어려울 거란 진단을 받은 뒤 남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내가 그만둔 게 아니니까. 내가 의지가 약해서, 실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양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 P-1
희생과 인내가 꼭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닌데, 그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진실을 감당하는 데는 언제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 P-1
어쩌면 내게 ‘당신이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 약속한 그 사람이 그런 용기를 주었던 걸까? 그 밤, 과연 어떤 마음과 마음이 만나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때 나는 모든 걸 이해하고 움직였다기보다 그냥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래야 한다’는 걸. - P-1
—왜 하필 뱀이야? 처음 용식을 집에 들였을 때 엄마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집에 파충류를 들이는 게 마뜩잖은 눈치였다. - P-1
하지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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