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범우사상신서 30
자크 모노 지음 / 범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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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리고 인간: 필연적이면서도 우연적인 존재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1985년 번역 출간)
 

 삶은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연속일 뿐인가? 평생 한 번쯤 우릴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건 이 질문이 결국 ‘우린 삶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수 있나?’, 혹은 ‘우린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나?’와 같은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행복한 삶과 관련이 있어서일 것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1749-1827)가 19세기 초에 떠올린 것으로, ‘‘현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유추하는 존재'이다. 만약 이 누군가가 전 우주의 모든 원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고전 역학의 법칙들로 그 원자들의 그 어떤 과거나 미래의 물리 값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출처: 위키백과)’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은 운동 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과학적 결정론의 상징이다. 현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긴 하지만, 이 관점에서라면 삶도 운명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위 문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우선 저자는 노벨 생리·의학상(1965)을 받은 20세기의 과학자다. 바로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1910-1976). 이 책 『우연과 필연』은 프랑스에서 1970년에 출간됐다. 책에서는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의 출현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삶은 어떨까?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모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생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전통적 관점인 생기설과 물활설의 정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생기설은 ‘생물체는 무생물체와 성질상 다르다'는 관점이다. 여기에서 생명과 무생명의 구별은 합목적성(어떤 사물이 일정한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질.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곧 생명체는 무생물과 달리 분명한 목적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물활설은 ‘모든 물질은 생명이나 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연관(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생기설적 관점에서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47p)’고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관점은 다르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모든 생명체가 가진 놀라울 정도의 구조적 동일성을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인 저자 역시 생명에 있어서 ‘신비의 영역’은 이미 거의 소멸되었다고 본다. 이를테면 모든 생물의 화학적 기구는 단백질과 핵산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구조상 같으며, 대사 반응을 수행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능적으로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과학은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과학적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부터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과학적 세계는 모든 것이 오직 객관성이라는 유일한 전제로 측정되는 세계다. 바로 이러한 특성 덕택에, 과학은 오랜 역사를 거쳐 내려오는 철학적 논쟁에 참여할 필요 없이 오직 모든 현상을 분석하여 불변성을 찾는 노력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철학적 논쟁들은 모두 ‘선험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리 품고 있던 윤리와 정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후천적 구조물이었던 것이다(131-2p).’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과학 이전까지의 철학은 객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윤리와 정치를 위한 짜맞추기에 불과했단 것이다.

 

 이어 저자는 진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현대 분자유전학에서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연구한 결과, 그러한 변화는 순전히 ‘우발적인 것이며 무방향적인 것(146p)’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목적없는 이런 우연한 변화가 생명체의 진화를 낳는 것이다. ‘그 변화가 유전의 텍스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며, 이 텍스트가 생물의 유전적 구조의 유일한 저장물이므로,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물권에 있어서의 모든 신기한 것과 모든 창조의 원천은 다만 단순한 우연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146-7p).’ 즉 저자가 책 제목에서 말한 ‘우연’은 곧 돌연변이를 뜻한다. 이는 양자적 구조가 원인이라 불확정성의 원리가 적용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예견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한다. 더구나 책이 쓰여질 당시 ‘삼십 억에 이르는 인류는 각 세대마다 천억 내지 일조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있다(157p)’고 하니, 유전정보의 우발적 변화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결국 그는 진화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과학 분야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파괴하는 것(147p)’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서다.

 

 인간이 진화의 산물인 이상 우연의 영역에서 인본주의는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책 이름에 쓰인 나머지 단어인 ‘필연’의 영역에서는 어떨까? 여기서도 인본주의는 처참히 무너진다. 우선, 어떤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당연히 그러한 행동을 한다. 놀라운 것은 학습된 행동조차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 행동을 발현시킬 거라는 게 미리 예정되어 있다. ‘프로그램의 구조가 학습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습이라는 것도 종의 유전적 유산으로서 미리 만들어진 '형태'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192p).’ 요컨대 유전자 및 모든 조상의 축적된 경험에서 우리의 행동이 유래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와 비교했을 때 하등 우월한 점이 없으며, 그 존재조차 우연적 산물이라는 점을 과학이 이토록 무자비하게 파헤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토록 경계해마지않는 ‘인간 중심주의’의 불씨는 지금껏 거의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가 ‘물질이 그 자체의 최고의 개화인 사고하는 정신을 비정(非情)의 필연성으로써 어느 날엔가 지구상에서 근절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질은 똑같은 필연성으로써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대에 사고하는 두뇌를 재생시키고야 말 것이다(66p).’라고 역설하며 자연 변증법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것, 그리고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이 자유주의와 냉전을 벌인 것은 각각 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19, 20세기의 일이다. 인간 중심주의적 경향의 또 한 가지는 뇌와 정신이 실생활에서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뇌라는 관념과 정신이라는 관념과는 17세기의 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실제 생활 체험 속에서 구별되고 있다(199p).’

 

 독서량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생명과학의 발견 간의 충돌’을 우려하는 주장이 뇌과학 연구 성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최근의 연구에서뿐 아니라 1970년 출간된 이 책에서도 이미 등장하였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유발 하라리와 같은 유명 저술가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저자 또한 이러한 간극의 원인을 ‘두뇌와 정신의 이원론’으로 설명한다. 그는 ‘영혼 속에 비물질적인 '실체'를 인정한다는 환상을 단념하는 일은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문화적 유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개인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풍부함·측량할 수 없는 깊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간 개개인의 정신보다도, 집단으로 이어져 내려온 '호모 사피엔스' 종의 총체로서의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서 과학주의로의 전환은 오늘날까지 큰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여전히 한 시대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함께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가깝게는 자연계열 전공자와 인문계열 전공자 간의 소통 문제부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나아가 종교와 과학계의 충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 근대적 형벌 제도가 뇌과학적 연구 성과가 상치된다는 뇌과학계의 주장이 가장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2015)에서 지적했듯,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감옥제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묘사했습니다. 그 핵심은 절대왕정 시대의 잔학한 형태에서 규율 훈련을 토대로 정신을 교정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푸코 자신도 깨달았듯, 이런 근대적 형벌제도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닐까요? …(중략)…

뇌과학 연구는 근대적 형벌제도의 전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정말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경우, 뇌 속 회로에 원인이 있어서 범죄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흉악범이나 약물중독자의 뇌가 종종 사례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아직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는 뇌가 원인이 되어 범죄행위가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그 사람의 뇌에 있다고 말하는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당연히 처벌 형태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처럼 형무소에 수용해도, 범죄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 처벌을 대신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을 구상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근대적 처벌제도는 이제 황혼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_오카모토 유이치로,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2018), 147p.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_유발 하라리, 『사피엔스』(2015), 334p.

 

 이러한 의문에 저자는 뭐라고 답하고 있을까? 그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가치와 지식의 통합’만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예측한다. 따라서 과학이 점차 발달하면서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최근의 시대를 관찰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과학에 의한 가치와 지식의 통합은 가능성 높은 미래로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서 유물 변증법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물활설의 전통은 가치, 도덕, 의무, 권리, 금지의 기초를 신화적 내지는 철학적 개체 발생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이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216p)."

 

 한편 이와는 대조적인 관점으로, 과학 또한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특정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과학사를 살피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란 신화는 무너지고 만다. 어느 시대가 낳은 과학이론은 과학자의 인생관, 자연관은 물론 당대의 시대사조나 사회·경제·문화적 제반 요소들이 상당히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총체적 산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느 시대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어떤 과학이론을 출현시키는가 하면, 그 배출된 이론이 다시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되먹임 되어 직접 또는 간접의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사회적 다윈주의가 출현한 것은 그 가장 극적인 예이고, '엔트로피 법칙'이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틀이 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_「국어」, 『2010년 대한민국 국가직 9급』, 4번 지문(원전을 찾지 못해 해당 출처로 표기)

 

 그러나 모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위 주장도 지식의 영역에 속한 과학을 무분별하게 가치의 영역에 대입해 버린 것에 불과하다. 즉, 지식을 제공하는 과학의 힘을 물활론적 가치지향 사회에서 객관성을 결여한 채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위 주장은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란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말하는, 가치와 지식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미래가 항상 예측한 바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며 주저 『사피엔스』를 마무리 지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와는 달리, 자크 모노는 과학자로서 ‘필연’이라고 믿는 미래의 도래를 역설한다. 그것은 지식과 가치의 원천이 과학으로 일치되는 미래다. 이것이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는 이를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을 만들어내는 일에 비유한다. 왜냐하면 ‘현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경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킬 것이며, 이것이 ‘진정성의 탐구가 도달하는 필연적 결론’이라고 말한다. 그 유토피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진화가 축적된 산물이기에, 과학으로 가치와 지식을 통합시키면 필연적으로 과학의 힘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자크 모노는 말하고 있다. 만일 실현된다면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그 이상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마치 다른 차원의 우주를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서론에서 제시한 삶의 행복과 관련된 고민 따위는 전혀 의미를 가지지 않는 세상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생명이 우연과 필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간다는 건 결국 앞일을 있는 대로 예측해 놓고서도, 미래는 항상 예측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유발 하라리의 다소 어정쩡한 결론과도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능성 높은 미래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돌연변이라는 우연적 요인에 의하여 결국 인간은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한 까닭이다. 비록 38억 년 동안 축적된 유능한 시뮬레이션 장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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