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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조약돌 - 틱낫한의 작은 이야기
틱낫한 지음, 김이숙 옮김, 정경심 그림 / 열림원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앞에 있는 리뷰 중에 마리안느님의 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무언가 긴장감이 부족한 그저 좋은 이야기같은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저도 그래서 50페이지까지 읽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진부하고 반복되는 이야기...음..지루하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장마가 들고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자 어느새 이 책을 다시 펴게 됩니다.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래리 코리엘의 pieta(=죽은 예수의 몸을 떠받치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를 들으며 멍한 느낌으로 책을 보는데 처음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의 슬픔이 불교의 자비로움으로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음성조차 지척에서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은 아홉 살때 어느 잡지에 실린 붓다의 사진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붓다는 우리나라 절에 있는 뚱뚱하고 위대한 모습도, 비쩍 마른 고행하는 붓다의 모습도 아니었나 봅니다. 붓다는 다만 풀밭에 평화로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후로 스님은 수도승이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됩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절대 경지나 궁극의 깨달음 따위를 성취하기 위해 스님이 되려하는 모습과는 무척 다릅니다. 반면 실연의 아픔이나 가족간의 갈등 따위로 도피하는 모습과도 무척 다릅니다. 해탈이 아닌 평화로움을 향한 길이었던 겁니다.
스님은 열한 살 이었을 때 친구들과 은자가 사는 산으로 소풍을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자는 없고 떠나간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스님은 아쉬워서 혼자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샘물을 마시게 됩니다. 인자를 향한 배고픈 여정에서 인자는 사라지고 텅 빈 마음이 되어 맑은 샘물을 마신 스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멍하니 한잠을 잔 스님은 '나는 이 세상 최고의 물을 맛보았네'라고 읇조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 샘물이 바로 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득 이 조그만 샘물 이야기가 실은 매우 깊은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이나 지혜의 스승에 대해 갖고있는 편견을 깨뜨리는 매우 힘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쩌면 샘물을 참으로 느끼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고 티없이 맑은 어린이가 읊조리는 한 줄의 시보다 더 큰 지혜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숨이 멎을 거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 같은데 조금더 생각하다보면 지금 나의 생각과 너무도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너무도 다른 이야기는 달리보면 너무도 먼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스님의 세계에서는 돌멩이도 꽃도 나무도 친구 또는 형제입니다. 아니 우리와 같은 한 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깊은 체험과 명상 속에서 나온 것이고, 도시 속의 우리와는 다른--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스님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세계와 너무도 동떨어진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헝클어진 자신을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평화를 위해 스님이 계신다는 프랑스의 자두 마을(=plum village)로 갈수도 없는 대한민국의 저로서는 이 책의 아름다움이 절망스러울 뿐입니다. 제가 가진 선입견을 뒤흔들지만 책이 주는 대안의 차이는 저를 한없이 망설이게 합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이런 생각조차 듭니다. 저는 숲 속에 살 수도 없고 나무도 풀도 돌도 친구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착잡한 마음을 접고 책을 다시 펼치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이 된 조약돌 이야기입니다. 책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이야기 한 편마다 한 장씩 그려져 있어서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림에 적힌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1) 어느날 나는 숲 속에서 조용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집을 떠나기 전, 모든 창문과 문을 열어두었다. 햇빛과 바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그런데 오후가 되자 날씨가 바뀌었다.
(2) 그래서 당장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외딴 집은 매우 끔찍한 상태였다. 춥고 어두웠으며, 종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혀 즐거울 수가 없었다.
(3) 나는 바로 창문과 문을 닫고 등불을 켰다. 그리고 난로에 불을 지폈으며, 종이들을 주워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이제 빛이 존재했으며, 나는 따뜻했다.
(4) 바깥에서 쌩쌩 불어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나무들이 바람 속에 나동그라진다고 상상했다. 난롯가에 앉아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그지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5) 그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들어갈 외딴 집이 있다. 은신하여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이. 그렇다고 그대를 세상으로부터 절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대 자신에게 좀더 가까이 접근하라는 뜻이다. (39쪽)
어떻습니까? 책 내용이 이렇기 때문에 때로는 구름잡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깊이 속삭여 주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면 볼 수록 샘물처럼 맑고 깊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그리고 알고보면 스님은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현실 참여적인 분이셨습니다. 현실도피적인 또는 염세적인 신도를 양산하는 그런 종교가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없이 무의미한 일상을 사시는 분들이라면, 잠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이성을 거두고 이 책을 펴보는 것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와 우리와의 거리는, 이야기가 당장 현실화가 될 수 없다는 절망도 주지만, 반성없는 일상에 대한 사색과 성찰의 여유도 주는 무엇일 테니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감명을 받았던 이야기는 17쪽의 '팔이 많은 보살 이야기'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 보살로 불리웁니다. 고통을 겪고있는 뭇 생명을 구하고자 그렇게 많은 손과 눈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이야기는 보살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겁니다. 팔이 많은 보살은 먼 데 있지 않고 바로 이 곳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문득 신영복 선생님의 [나무야 나무야]에 그려져 있는 고달픈 한 어머니의 초상이 떠올랐습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나무와 풀과 돌멩이와의 우정은 저멀리 있을지언정,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과의 인연은 저버릴 수 없는 책무인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맑은 샘물처럼 저를 적셔주고 끝없이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붓다나 보살을 하늘에 계시는 존재로 생각하지 말라. 그분들은 바로 이곳에, 우리 곁의 어디에나 계신다. (19쪽)
그대가 사랑과 이해를 발견하는 어디에나 붓다는 계신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