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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
정진홍 지음 / 강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은지 1년이 되지만 통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글을 쓸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선생님의 말투는 특이하다. 어찌보면 오만한 말투고 어찌보면 겸손한 말투이시다. 모든 권위를 해체하는 지적인 오만함과 다양한 삶의 현실에 대한 한없는 겸손! 선생님의 강의실에 앉아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도 이 책에 나오는 문어체 그대로 말씀하시니 책을 보면 곧바로 선생님이 나타나신다. 선생님 책은 어떤 때는 간곡하고 섬세한 목소리로 나의 고독을 어루만져 주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같은 글인데도 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언뜻 보기엔 편한 글인데 다시 보면 결코 쉽지가 않은 글이다. 그렇다. 선생님 글은 무척 사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하시기 때문에 내 삶의 고민을 투영하면 곁에 있는 듯 다독거려주시지만, 내가 단지 관념의 유희를 펼치고자 한다면 문은 닫혀 버리고 만다. 또 선생님은 끊임없이 한겹 한겹 연신 새롭게 질문하시기 때문에 어느덧 내 고민의 한계에 다다라 높은 벽을 발견한다. 따라서 나는 한편으로는 감정의 일렁임때문에 한편으로는 선생님 글을 압축할 능력의 부족때문에 리뷰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리뷰가 계속 공란으로 남겨져 있어 제자된 도리로 몇 줄 남기려 한다. 리뷰라기 보다는 선생님과의 추억이라 할 글이지만!
정진홍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으니, 내가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된것은 10년전이었다. 졸업이 임박해서 "우리 학교에서 가장 강의 잘하신다는 분이 누구냐?"라고 물었을때 친구들과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선생님을 지목했었다. 누구나 졸업쯤에는 자신의 마음속의 질문에 진지해지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진지함이 날 선생님 앞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아! 다시 501호의 오래된 책상에 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종교현상학과 신화학 수업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으로 또는 더 깊은 존재의 아득함으로 우릴 이끌었었다. 첫 수업에서 항상 강조하시던 "만남과 스침의 존재론"은 언제나 가슴에서 메아리친다. 내 어찌 죽는날까지 그 수업을 잊을 수 있으랴! 사실 굳이 대학원을 포기한 것도 선생님이 그해 정년퇴직을 하신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느끼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종교학과는 전혀 다른 직업인으로 살고있는 지금, 삶의 공허함 속에서 다시 선생님을 책으로 만난다. 사실, 고전에 대한 책을 선생님이 쓰셨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책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걸 좋아하실 분이 아닌 줄 알기때문이다. 제목은 '고전'이라는 것보다는 '끝나지 않는 울림'이라는 과정에 중점이 주어져 있을 터이다. 즉, 우리 머리 속에 있던 고전이라는 개념의 해체에 해당하는 책이리라. 그 해체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끄시리라.
선생님이 선택한 고전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삼국유사] [모비 딕] [햄릿] [마담 보바리] [돈 끼호테] [아 Q정전]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선생님은 이 책들을 자신의 삶의 고비마다 거듭 읽게 된다.그리고 그렇게 읽어갔던 그 읽기의 경험들은 그 당시의 삶과 고민을 당연히 담고 있다. 제자의 입장으로 보면, 읽기의 과정 중에 간간히 비치는 선생님의 젊은 시절의 고민과 궁색함의 모습이 무척 절절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이걸 쓰고 계시는 선생님 역시 때로는 가슴이 멍해져서 때로는 억울해서 손을 잠시 멈추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고전 읽기는 결국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그때마다 새롭게 읽혀지는 무언가라고 생각하신다. 그러고 나니 생각이 난다. 선생님은 인생이란 삶이란 까도 까도 또다른 껍질이 나타나는 양파와 같은 거라 하셨었다. 삶의 중층성을 담고있는 상징적 속성을 지닌 원형은 우리를 묘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고 우리는 신들린 듯 책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원형이란 우리가 겪는 고비의 높이만큼 절실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은 없다. 오해와 부질없는 시간마저도 우리의 삶이기에!
그러나 선생님에게 고전이란 이미 권위를 지니고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선생님의 거듭 읽기는 게으르다 생각될 정도이다. 보통은 수십년에 걸쳐있어, 전에 읽었던 것은 저물녘 땅위에 깔린 그림자처럼 희미한 상태인지라 거듭 읽기는 첫 만남이나 다름없는 읽기가 된다.따라서 이 정보의 획득이나 정해진 교훈 찾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게으른 독서는 독서의 대상, 즉 고전에 하등 권위를 주지않는다. 선생님에 있어 고전이란 거듭 읽게하는 힘이지만 그 힘을 권위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고전이란 무언가?
"'되읽음'을 충동하는 긴 여운, 끝내 그 여운을 지울 수 없는 아련한 유혹을 내 안에서 일도록 하는 어떤 '처음 읽음'의 경험, 그리고 그것에 대한 회상,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되읽음' 속으로 들어가 침잠하는 일, 이러한 일련의 구조가 이른바 '고전'을 마침내 일컫게 하고, '고전읽기'의 문화를 일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되읽음이나 되읽힘의 원초적인 충동과 종국적인 책임이 작가와 작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독자의 정황과 맥락은 오히려 더 원초적이고 종국적일 수 있습니다. '읽음'이 없으면 '읽을 거리'의 존재 의미도 없어지니까요....독자는 읽기 문화 또는 고전 읽기의 문화를 만드는 저간의 현실 속에서 충분히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 스스로 안달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무책임이야말로 독자의 특권이고 작가의 횡포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기억나는 대로 옛날 젊었을 때 제가 읽었던 작품들을 뽑아 되읽고 싶은 것들을 그렇게 거듭거듭 읽었습니다."
사실 이런 글들을 보면 느껴지듯이, 선생님의 문체는 특이하다. 매우 길고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서술하고 부연한다. 그래서 왜 평이하게 쓰시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었던 거 같다.우리도 대학국어를 배웠고 길고긴 접속문장보다는 뚝뚝 끊어쓰는 것이 글을 명료하게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명료함이나 전달성은 진정어림의 다음이라고 하셨다. "여러분. 우리가 글을 쓸 때 최초의 독자는 자신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독자도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절절한 무언가를 어떻게든 자기 말로 담아서 그걸 끝까지 다 표현해 보십시오. 마치 세상을 달관한 도사처럼 꾸미지 마십시오. 무언가 아는 체 하지 마십시오. 자연스럽고 짧고 쉽고...이런 거보다는 자기를 그대로 담는게 중요합니다.어떤 글은 오직 자신만 읽고 끝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한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선생님의 믿음 그대로 글을 쓰신다. 잘 와 닿지 않을 때도 "이건 선생님의 진정이 담긴 글이야. 결코 허투로 쓰시진 않지."하고 마음으로 되뇌인다.
이 책을 읽으며 끝내 도달하는 것은 역시 '회상의 존재론'이다. 사람은 과거의 추억으로 돌아가 그 잃어버린 시간을 음미하고 싶어하나 똑같은 강물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현재를 살기위한 순간이다. 과거는 또다른 현재와 오래된 미래로만 존재하는 셈이다. 선생님은 그렇게 힘들여 가르쳐 주셨는데 아직도 선생님의 품안을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되읽음을 끝내고 이제 그 경험에서 얻은 것을 '회상의 존재론'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0년, 20년, 어느 것은 40년의 간격을 두고 되읽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실은 '되읽음'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그것은 '되읽은 처음 읽음'이었습니다. 작품도 저도 모두 '이전의 작품, 이전의 나'가 아니었습니다. 회상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과거를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게 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처음이게 한다는 회상에 대한 존재론적 서술이 그대로 낯설지 않은 내 삶의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