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박이문 선생님은 30년생이니 77세가 되신다. 서울대와 소르본느에서는 불문학을 하셨고 미국에선 철학을 하셨는데 아마도 실존철학과 현상학이 전공이신 듯 하다. 따라서 문학적인 글솜씨로 철학적 문제를 깔끔하게 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운 문젠데도 해박하면서도 솜씨있는 선생님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경쾌하게 요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포항공대에 계실 때부터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뒤늦게 책을 읽으니 새삼 게으름을 뉘우치게 된다.

이 책은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사유의 가시밭'이라는 표제를 걸고 5년동안 연재한 철학적 에세이 20편 중에서 18편을 엮은 것이다. 사실 나는 [당신에게는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다소 도발적이면서 무슨 얘긴지 모호한 제목보다는 원래의 제목[사유의 가시밭]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왜 '사유의 가시밭'인가?

'사유의 가시밭'이라는 큰 제목을 묶었던 것은 모든 중요한 문제는 따지면 따질수록 그 내용이 복잡해서 그에 대한 해답이 쉽지 않다는 평소의 필자의 생각에 기인한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문제도 우리는 늘 신중하게 그리고 여러모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11-212쪽)

이 책은 2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 실존적 선택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와  2부 사회적 규범 '공동체는 어떤 틀을 갖추어야 하는가?'로 되어 있다. 뭔가 딱딱할 거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1부의 첫 글 '실존적 방황: 모든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이 방황한다'를 보자. '우리는 모두 방황하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많은 방황의 예를 문학적인 필치로 그려나간다. 그러다가 한번 깊어지는 철학적 사색!

선택은 언제나 가치의 선택이고, 모든 가치 선택은 궁극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내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의미있는 삶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 가운데의 최선의 대답이 선택으로 나타난다. 장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종교들, 철학들, 수많은 전통이 나름대로 대답을 제공해왔고, 문화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각기 나름대로 선택하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각기 자신의 행동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가치를 어떤 근거에서 선택하느냐에 있다. 선택의 문제를 놓고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어떤 가치를 어떤 근거에서 선택해야 할지를 알수없는 데 있다. 그렇다면 모든 행동 선택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방황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규의 직접 혹은 간접적 표현이며, 이러한 절규는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궁극적인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가슴을 찢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우리의 물음에 대답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형이상학적 상처를 받은 우리의 영혼은 길을 잃고 아직도 헤매고 있다.(15-16쪽) 

그후엔 많은 종교의 현자들의 이야기, 많은 철학자의 이론이 짧게 짧게 요약되어 제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에 위안받지 못하고 설득되지 않는 현대인들의 고충 역시 묘사한다. 드디어 아쉬운 끝맺음!!

하지만 방황하는 영혼을 구원할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문명의 구원을 찾는 애타하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귀담아 들어주는 존재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다려도 '고도', 구원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각기 고독한 '나', 역사 그리고 문명은 혼자서 결단을 내려한다. 즉 고독한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결단문제를 놓고 끝없이 방황하고 진통한다.(22쪽)

사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두번째 글 '생존의 수치: 생종경쟁이 거칠고 험하다. 살아남아 있음이 부끄럽다.' 이다. 이 글은 우선 긴 시간동안 내가 생존한 것에 대해 갖는 자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미 칠순이 넘은 나는 '인생 칠십 고래희'라는 인류의 수명척도에 비추어 보아도 무척 오래 살아남았지만, 인류의 진화사가 300만년 전에 시작되고, 생명의 진화사가 35억년 전으로 올라가고, 현재 내 생명의 뿌리가 그곳에 있다는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볼때 나의 수명은 거의 영원에 가깝다. 나는 정말 무척 오래 살아남는 것이며, 그만큼 나의 가치는 크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생존에 대해 자존심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24쪽)

그렇지만 글쓴이의 자부심은 그리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간 내가 살아온 시간적 길이의 크기를 의식하면 할수록 그 시간적 과정 그리고 그 의미를 곰곰히 반성해보면 볼수록 나는 나의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그리고 인류적 자부심이 수치심으로, 나의 기쁨은 쓸쓸함으로 나도 모르게 어느덧 변색됨을 느낀다. 나의 생명의 조상인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얼마나 지독한 경쟁력을 가졌기에 다른 박테리아와의 생존경쟁에서 수억만 년에 걸쳐 살아남고 번식하여, 지렁이로, 바퀴벌레로, 악어로, 여우로, 사슴으로, 코끼리로, 돼지로, 개로, 소로, 침판지로, 크로마뇽인 그리고 최초의 원시인으로 생존할 수 있었을까?

.....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졌을 때 나의 유전자는 후손을 이어 왓던 것이다. 청동기, 철기의 나의 조상들이 얼마나 무정했기에 같은 부족에서도 강자가 되어 살아남아 자손을 퍼트리고, 얼마나 무자비했기에 다른 부족들과의 창과 칼싸움에서 그들을 약탈 또는 말살하고 승자로 군림하여 보다 편리한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인가......(25쪽)

이와같은 글을 본다면 아마도 2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이 서둘러 결론을 내거나 강제로 무언가를 설득하는 글이 아니라 사색하고 성찰하는 걸 바라는 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끝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만일 이 책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필자와 함께 그 문제들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필자는 이 책에서 보람을 느끼겠다.'(212쪽) 두번 째로,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이란 것이 소박하고 솔직한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자는, 아이의 눈으로 문제를 보자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논리를 따지기에 앞서 진실한 인간의 양심에 기대고 소박한 아이의 편견없는 마음에 기대지 않는한 문제는 꼬이고 꼬여 그 해결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이 책의 머릿말에서 벌거숭이 임금님의 동화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선생님이 생각하는 철학에 대해 한마디하시는데 다음과 같다.

어른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는 것은 그들이 관습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가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아이의 눈만이 관습과 편견에 물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아이의 경험은 경이wonder이며 그것은 반성으로 이어지고, 반성은 비판적 사고로 연결되며, 비판은 새로운 사유와 인식으로 통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필연적으로 어린이며, 철학은 어린이의 사유이기도 하다.(6쪽)

여러분, 77세의 어린이 박이문 선생님의 눈에 비친 철학적 질문으로 모험을 떠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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