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미제라블 - 전6권
빅또르 위고 지음, 송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삼국지를 보면 대하소설이란게 이런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또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편소설이 이런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멋있지 않은가!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더 미저러블The Miserable =비참한 사람들! 이 말을 들으면 코제트의 어머니 팡틴이 생각이 난다. 탐욕에 어두운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아기를 맡기고 모진 병에 양육비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마저 뽑아 시름시름 앓다 죽은 여인! 그의 딸 코제트 역시 바람 속에 꺼질 촛불처럼 사라질 운명이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자비는 뭇생명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는데 우리의 쟝발쟝 아니 그 당시 마들렌 시장은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들을 도와주려다 끝내 다시 죄수 쟝발쟝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난 '지옥의 중생이 한명이라도 있는한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기도가 떠올랐다. 이건 가톨릭의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불교로 하면 자비로운 실천의 길을 가는 보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장발쟝 역시 얼마전 까지는 레미제라블, 지옥 속에 사는 인간이었다. 모든 것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범부중생에 범죄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미리엘 주교의 은혜를 입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게 되다니!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생떽쥐베리의 '인간의 대지' 에서 한 조종사는 사막에 불시착하고 만다. 그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넓은 사막을 어떻게 다 뒤지겠는가? 그런 그의 눈에 문득 자신의 생환을 초조히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다. 아!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구의 슬픔을 구원하는 구원자임을 깨닫고 그 너른 사막을 마침내 건너고 말지 않던가! 그러니 보살, 부처, 신의 이름 바로 옆에는 슬픔의 얼굴, 비참한 사람들이 넘실대는 것이 아닐지... 쟝발쟝이 변한거는 미리엘 주교 때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마차에 깔려죽는 사람의 절규를 지나칠 수 없어 마차의 무게를 어깨에 받쳐든 순간에도, 가엾은 팡틴을 위로하고 그녀의 딸 코제트의 손을 잡으며 걷는 순간에도 쟝발쟝은 끊임없이 깨달아갔는지 모른다. 난 가장 치열한 구도의 소설이 레미제라블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쟝발쟝을 쓴 빅토르 위고는 어떤 사람이던가? 20대에 이미 낭만주의자의 선봉이 되었던 그는 인도주의와 자유주의에 기울어져 40대 후반 나폴레옹 3세의 쿠테타에 반대했다가 장장 19년의 망명의 길에 오른다. 그렇다면 죄인 쟝발쟝의 끊임없는 도망의 길은 빅토르 위고의 50대 60대의 길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자신에게는 비참했던 시기였을 지라도 그 망명의 기간은 빅토르 위고의 문학에서 가장 충실했던 시간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매일매일이 도망의 길이고 자신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에 목이 메었을 망명객이 역사와 인간에 고한 처절한 기록이 그의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쟝발쟝의 몸짓과 말에는 빅토르 위고가 묻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렸을적 읽은 쟝발쟝을 생각하고 '나도 레미제라블을 읽었다'고 하신다면, 난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가로서의 위고와 역사가로서의 위고가 뒤섞인 웅혼한 책이다. 거대한 산맥과 같은 '전쟁과 평화'같은 책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렸을적 읽은 쟝발쟝의 신화를 사람들이 잊지않는다면-자신의 비참함을 이기고 다른 비참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위치까지 성장한 처절한 쟝발쟝의 동화를 기억해준다면-아마도 그것은 구약의 모세의 이야기와 닮아있을 것인데- 우린 조금더 아름답고 덜 슬픈 세상을 이룩할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러므로 레미제라블을 읽지 못하더라도 쟝발쟝을 잊진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레미제라블을 읽는다면 더 좋겠다...그런 생각이 든다.
끝으로 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의 꼽추같은 장편을 읽지 못하는 분이 빅토르 위고를 짧지만 깊게 느끼고 싶으시다면 단편'사형수 최후의 날'을 추천드리고 싶다. 더 말못하겠다. 그 소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저며드니 말이다. 인간에 대해 참된 삶에 대해 성찰하고 싶은 분께 빅토르 위고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