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가 - 김태길 인생론
김태길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1. 학교 다니면서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 국민윤리였다. 그러다보니 국민윤리 교과서를 집필했을 때 핵심 인물일 것 같은 선생님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김태길, 안병욱, 유안진, 김동길.. 이런 분들이다. 이분들은 또 [아무개 인생론] 같은 류의 책을 내셨다. 솔직히 운좋게 공부 많이 하고 대학교수 해먹은 것이 무슨 인생에 대한 통찰을 준단 말인가? 나는 아니꼬왔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80년대를 살아오면서 민주화에 기여하신 경우가 드물다. 눈에 보이는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한마디 외친 적이 없는 냉혈인간 같은 사람들이 무슨 인생을 논하는가?... 이런 반감도 적지 않았다. 솔직히 나의 반발은 그런 정도를 지나 이 부류의 선생님들을 어용교수 비스무리한 인간으로 낙인을 찍고 있었다.

2.어찌 보면 삶과 독서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인생론류의 책처럼 비판과 성찰이 요구되는 글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도 그랬었다. 고등학교때, 대학 초년에, 군대 입대, 제대의 빈 시간에, 대학 말엽에, 또 사회를 살다가 지쳤을 때-인생이란 것이 문득 녹록하게 느껴지지 않고 버거울때-인생의 지침이 될 인생론이라는 책을 펼쳐보았었다. 누구도 인생에 대해 깊게 살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책들밖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었던가? 듣고 싶은 말은 나오지 않아 지루해서 채 다 읽은 적도 없었지만,문득 의문시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정작 책들의 저자인 이들이 권력의 똥구멍이나 핥으며 도피적이거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주범이라면 그래서 그렇게 고상하지만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항상 들려준다고 하면 거기에서 무슨 희망과 전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이 인생론의 저자들의 삶을 추적하고 정치적 사회적 성향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 내 보리라 다짐했었다. -이 일은 정말 도전할 만한 일로 눈 밝으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3. 어제 우연히 처남이 보다가 팽개쳐둔 이 책이 눈에 띄어서 호기심 삼아 책을 펼치게 되었다. 처음은 무척 시시껄렁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자가 글을 진솔하게 폼잡지 않고 쓰는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인생론이 아니라 삶에 대한 수필로 느껴져서 생각보다는 술술 잘 읽혔다.

저자는 1920년 생이시니 1996년에 나온이책은 76세의 노숙한 식견이 담긴 셈이다. 그럼에도 조금은 맥없고 싱겁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이야기가 귀에 들린다. 느릿하고 나직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나 같은 사람의 마음도 두드리는 걸 보면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저자도 서문에 밝히시길 사람사는 것이 뻔한 것이기 때문에 뻔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글이 시시하고 싱거운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변함없는 모습 즉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싱겁고 시시하다는 내 표현은 담담하다 또는 담백하다라고 바꿔야겠다. 

4. 거칠지만 선생님 책을 요약해 보겠다. 미리 말하지만 이게 선생님이 책 전체를 통해 말씀하신 핵심의 60% 정도 된다.  

(1) 사람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에는 두가지가 있다. 내면적 가치(인격, 사랑, 우정, 건강 등) 외면적 가치(권력, 돈, 향락) 사람은 내면적 가치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한다.  

(2) 사람들은 돈을 중심가치로 놓고 살고있다. 그렇지만 돈은 살아가는 도구라는 걸 잊지말라. 돈이 중심가치가 될 수 없다.

(3) 자기가 최고가 되겠다고 경쟁이 치열하다. 그렇지만 나만 아니라 서로 잘 살 수 있는 길로 가야한다. 배운 사람이란 공동체를 배려하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4) 나는 일제시대에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문을 한 사람이다. 미신이 횡횡하는 전근대성과 혈연에 이끌리는 폐쇄적인 공동체를 벗어나 보편적 논리적 자율적인 인간을 추구했다. 나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추구했다. 그렇지만 나이들고보니 그게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겠다.

5. 이 책을 보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생님의 인품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선생님의 학벌과 사랑에 대한 부분을 요약해 보겠다.

(1)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30년넘게 교과서로 사용했던 렘프레히트가 쓴 [서양 철학사]의 번역자이다. 그야말로 대표적인 원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학벌도 무척 화려하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동경대 법대를 다니고 귀국해서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 홉킨스 대학교 박사를 했으니 그야말로 천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의 말미에 가면 무척 절절한 고백이 펼쳐진다. 자신은 고등학교도 동기들에 비해 2년이 늦어졌으며 진로를 늦게 결정하는 바람에 동경대에도 재수를 해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동경대 법학부 정치학과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끝을 내지 못했고 전쟁통에 다닌 서울대 시절은 그야말로 고생스럽기만 하고 배운 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계속 자신이 뒤쳐지고 쓸데없는 데서 헤메고 있다는 느낌으로 20대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가 화려한 학벌에 감탄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한탄을 하고 있었다. 계획없이 낭비된 시간이 많아서 다시 살수만 있다면 좀더 현명하게 진로를 정하고 싶다는 후회가 참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또 누구나 최고가 될 수는 없지만 자신만의 적성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는 조언은 가슴에 새길 말씀이었다.  

(2) 책이 심심하다보니 처남의 책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새책이나 다름없는데 중간의 '연애'와 '진로결정'에 대한 부분만 줄이 쳐져 있다. 그런데 연애부분에서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선생님은 사랑이라는 것은 성욕에서 생기지만 우정이 합해져야만 지속될 수 있다고 쓰셨다. 그럴 법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선생님은 이어서 예를 들기를 창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성욕일 뿐으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다가 갑자기 뜻밖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생님은 사실 자신은 그런 걸 지켜본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는 그냥 상상일 뿐이고 연애나 사랑은 잘 알지 못한다며 그만 넘어가자고 쓰셨다. 

또 다른 곳에서는 자신도 로맨스를 바라지만 로맨스와 샌님 중에서 굳이 택해야 한다면 적적한 샌님을 택하겠다고 하셨다. 이런 진실한 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분이 어디에 계시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인품만은 본받고 싶었다.  가장 감명을 받은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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