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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이 내가 산 책 중에서 가장 표지가 예쁜 책이 아닐까? 이 그림을 그린 박방영이란 분이 궁금해 진다.
2. 이 책이 내가 만난 가장 멋진 제목이 아닐까? 고은 선생님의 짧은 시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저며와서 한동안 멍하다.
3. 이윤기 선생님의 첫 산문집인 [무지개와 프리즘]을 보면 [희랍인 조르바]에 있다는 다음 구절이 맨처음에 우릴 반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그에 비한다면 이 얼마나 한적하면서도 담백한 말인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10년 사이에 선생님도 나도 머리에 서리가 늘었다. 그래선지 이런 여백이 너무도 좋다. 물론 이 여백이란 '나'라는 주어가 사라진 탓일 것이다.
4. 선생님도 고백하시거니와 내 어찌 높은 오도송을 짐작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요즘 일이 안풀리면 83쪽에 인용해 놓은 남송시대의 시인 육우의 시를 떠올린다.
산궁수진의무로 山窮水盡疑無路
산이 막히고 물이 다하여 길이 없을 줄 알았더니
유암화명우일촌 柳暗花明又一村
버들 그윽하고 꽃 밝은 또 한 마을이 있네.
5. 그리고 75쪽에 적힌 함민복 시인의 시구도 떠올린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6. 꽃으로 시작하여 꽃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결국 삶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기에 죽음에 다다를때까지 부여잡고 가야하는 삶의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36쪽)
삶이라는 것은 윌리엄 스태퍼드
그대가 붙잡고 따라가는 한 가닥 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이 실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걸 잡고 있는 한, 길 잃을 염려는 없지.
슬픈 일들은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다치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그대 역시 고통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겠지.
세월이 펼치는 것은 그대도 막을 수 없으니
오로지 실만은 꼭 붙잡되, 놓치지 말아야 한다.
7.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란 자잘한 일상과 초라한 이웃에 대한 따스한 눈길과 사랑이 담긴 손길로 채워질 수도 있을 터이다. 인문학이란 바로 이것에- 우리의 삶..이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있는 꽃을- 즉, 지혜와 사랑을- 찾게 하여 아름다운 길을 걷게 한다는 것-에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히 찾아온 멧새 하나를 그윽히 바라보다가 멧새의 추운 겨울을 생각하고 따스한 봄행차에 같이 즐거워하며 끝내 그의 떠나감에 그리움을 품는 시인의 모습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깊은 깨우침을 준다. 사실 이 대목이 가장 가슴 찡했던 대목이었다. 아마도 이윤기 선생님이 고은 선생님의 오도송에 이렇게 짝을 지우신 것 같다. (아래 시는 316쪽)
춘신 春信 청마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나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