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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1. 이 영화의 기본 정신은 이렇다. 오대수는 넥타이 하나로 누군가 비참한 자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마찬가지로 이우진은 오대수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더 나아가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의 시선을 통해 관객의 감정과 상념을 좌지우지 한다. 이게 독재이고 오만한 독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당신은 참으로 피학적 심성을 가지고 있다!
2. 영화 속에서 유독 크게 들리는 말이 이런거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거 아닌가요?" 그럼 이 영화는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 대한 공감을 담은 영화인 것일까? 냉정히 답해보겠다. 아니다. 이 영화는 이들을 비웃는 영화이다.
그리고 말나온 김에 이 영화를 한 걸음 떨어져보자. 비참함은 너무나 상투적이며 그 비참함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도 비인간적이다. 바라보는 시선의 생경함과 다양한 카메라웤은 감독이 창조한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보게 강요하지만 영화 전반의 흐름은 스타일리스트의 저질 잡탕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이쯤해서 발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의도한 바는 나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차근히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나는 이 영화가 장편 일본만화를 영화화하면서 피치못해서 또는 의도적으로 생략한 장면이 많다는 걸 먼저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위에 있는 사진 속의 개를 안은 남자의 상황을 영화만 보고 아실수 있다면 참 요상한 사람이다.
이런 것은 인터넷을 찾아볼 수 밖에 없다. 놀랍게도 저 남자는 개하고 섹스하는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이웃들에게 밝혀지면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이 얼토당토 않게 불쌍한 자는 15년의 감금생활에서 풀려난 심상치 않은 외모의 오대수에게 공감을 구한다. -사실 오대수라는 인간의 죄와 이 사람의 죄는 공통점이 많다. 뭉뚱그리면 사회적 금기정도가 되겠지만 이런 유사함과 대칭성 때문에 굳이 감독은 이 남자를 맨 앞에 둔 것이다.-
4. 여하튼 개와 섹스하는 이 사람의 죄나 오대수의 죄에 대해 이 영화는 굳이 판정을 하려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회적 금기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감독은 단지 별난 상황을 만들어놓고 스타일대로 굴리다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만 갈 뿐이다. 어디로 가느냐? 내 생각엔 그저 재미있고 멋지게 후까시를 잡는다는 것이 감독의 생각인 것 같다.
간혹 이 영화를 반전 영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생각에 반전이란 삶의 중층성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무슨 삶의 진실이 있는가? 그러니 이 영화는 반전영화가 아니라 판타지 스릴러 정도나 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삶의 이중성이 판타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나도 이런 예외적인 상황에 내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그런데 이런 나조차 당혹스러운 것은 이 영화는 여기서 굳이 비인간적으로 더 나아간다는 점이다.
오대수는 벼랑에 선 이 남자의 상황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토록 고독에 몸부림 치던 자 오대수는 전혀 소통의 의지가 없다. 떨어져 내려 죽는 고독한 영혼에게 굳이 던지는 말이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니! 이 영화 전체를 통해서 감독은 과장된 비참함을 만들어내고 마음껏 희롱하고 마음껏 조롱할 뿐이다.
5.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행하는 짓거리도 보기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절절한 복수극인듯 보이지만 복수극이 아니다. 평론가들의 말대로 복수란 죄인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우진의 분풀이 영화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개지랄이다. 왜냐? 오대수는 죄인이 아닌데 그냥 어처구니 없이 두들겨 맞는 재수없는 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어린 시절 목격한 사실을 그저 몇마디하고 전학을 갔을 뿐이다. 물론 도미노처럼 전개된 상황은 비극적이었지만 띨빵한 오대수를 이 모든 것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이우진의 독단이고 자기 합리화이다. 오대수의 죄를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앙금에서 이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6. 그러니 이 영화는 아주 역겹고 공포스럽다. 이 영화가 공포스러운 이유는 이우진의 어리석은 최초 상황판단에 이은 철두철미하며 화려한 분풀이 과정을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인양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상은 이우진 자신의 죄로 비롯되었는데 자신은 싹 지우고 오대수에게 모든 것을 전가한다. 그리고 너도 한번 내가 맛본걸 그대로 당해보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감독은 마치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양 멋진 대사와 화면으로 우릴 유인한다.
공감이란 똑같은 처지를 겪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 이우진은 오대수가 자신이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맛보게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분풀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이 모든 분풀이를 합리화하기를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니!
7. 개를 안은 불행한 남자나 오대수나 생활에 지친 불쌍한 종자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을 오로지 어리석은 자신의 분풀이를 위해 감금하여 군만두 하나만 먹이는 그 엽기적인 상상력은 이나중 탁구부에 버금가는 엽기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이나중 탁구부는 누추한 현실을 보여주는 재치라도 있었건만 박찬욱 감독은 단지 화려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잡탕 곰탕을 만들고 멋스러운 대사를 어거지로 녹여내느라 시끌벅적 하기만 하다. 도대체 이렇게 어거지로 엮어 만들어야만 만족스러운 그의 머리 속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8. 이 영화를 보면 무언가 참 안맞는다는 괴이한 느낌이 드는데 예를 들어 짐승만도 못한 오대수가 갑자기 도덕군자처럼 구걸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그럴 수는 있겠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그렇게 저질스럽고 냉소적인 오대수가 갑자기 이우진의 상상의 나래 속에 그냥 올라탄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이야말로 감독의 멋진 후까시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우습게 보는 이유이다.
물론 영화 자체의 맥락으로 보면 이런 어색함은 영화의 핵심일수가 있다. 오대수의 몬스터가 무한히 팽창하다가 이우진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와의 접점에서 다시 한번 오대수로서의 자신이 분열하며 절규하는 장면이리라고 생각된다. 몬스터는 폭력과 성욕에 자유롭다. 그러나 몬스터가 결국 도달한 다시 살아난 오대수는 갑자기 비굴해지더니 도덕적이 된다.
- 이런 상황은 이우진에게 폭언을 쏟아붓다가 개가 되어 구두를 핥는 모습으로 또 애절하게 무릎꿇는 모습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묘하게도 박찬욱 감독은 오대수에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개라는 이미지를 묶어 놓았다. 이런 이미지 결합도 참 역겨운 부분이다. 여하튼 오대수의 개됨은 이우진의 몬스터로 사육되고 확장되다가 이우진의 죽음과 더불어 소멸한다는 것이 감독의 큰 밑그림이리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오대수의 몬스터란 다른게 아니라 오대수와 이우진이 머리와 몸을 섞어 만든 자식이다. 이런 얘기를 하니 나도 조금 돌은 것 같다.-
9. 그러나 이런 논리적 허술함과 이미지의 결합이 주는 기괴함을 넘어 이 영화는 더욱 심한 파국으로 나아간다. 끝내 오대수는 몬스터조차도 죽이고 자신의 기억조차 지워버리더니 뇌도 열정도 상념도 없는 공허한 성욕에 자신을 가두어 버린다. 어쩌면 오대수보다도 초라하며 몬스터보다도 가증스러운 끝없는 추락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처럼 심란한 영화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런 심란함을 그냥 후까시를 잡는 감독 때문에 느껴야 한다는 것처럼 짜증나는 것이 어디 있으라?
10. 끝으로 [올드보이]를 보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네이버 지식검색에 있는 iv426님의 글과 씨네 21의 황진미님, 심영섭님의 리뷰를 보시길 바랍니다. iv426님의 글은 영화를 보다가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을 잘 짚어주고 있고 씨네 21의 평론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분석해 놓았습니다. 저는 특히 황진미님의 [올드보이의 기꺼이 자기를 잊고 투항하기]가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