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리 스트로벨.개리 풀 지음, 김재영 옮김 / 두란노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1. 우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처음부터 이상한 것은 영화의 원래 제목이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것이다. the는 생략하고 핵심단어로만 영화제목을 삼은 황당한 과감성이 놀랍지 않은가?

2. 그리고 우리는(나만은 아닐거 같으니까 우리는) 영화 제목을 '그리스도의 열정'이란 뜻이리라 짐작하다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걸 알고 조금 당황하게 된다. passion은 열정이라는 뜻이지만 'the Passion'은 예수의 (특별한) 수난, 즉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밤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수가 겪였던 고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passion과 Passion이 별도의 단어란 말인가? 영영사전을 찾아봐도 특별한 연관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다만  the Christ 라고 지칭한 그리스도는 예수인 모양이니까 Christ 즉 구세주는 예수말고도 여러명 되나보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3. 이 책의 저자인 리 스트로벨의 명저 [예수는 역사다]를 보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수난에 대한 매우 생생한 화면을 보여주지만 몇 가지 잘못된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1) 예수가 무거운 십자가를 힘겹게 메고 가는 장면이 장엄하지만, 실제 십자가형에서는 죄수가 180센치 크기의 14kg의 가로대만을 지고갈 뿐이라고 한다. 세로기둥은 골고다 언덕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혹독한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된 죄수에게는 여전히 고통스럽긴 하지만 실제 예수는 적어도 영화 속 화면보다는 훨씬 가벼운 가로대만 메고 갔다.

(2) 예수가 못박힌 부위는 손바닥이 아니라 정중신경이 지나는 손목부위라고 한다.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자칫 못이 손바닥을 찢고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뼈사이에 단단히 고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를 보면 제자인 도마가 손가락을 넣고자한 것은 예수의 손이었지 손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래의 희랍어 원문에서의 손은 손목까지를 의미하는 단어라고 한다.

(3) 산업사회 이전 시기에는 출생아의 75%가 26세가 되기 전에, 90%가 46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32세의 예수는 요즘 나이로 보면 50- 60세 정도의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당시 사람이 보기에 예수는 젊은이가 아니라 요즘 우리가 중년의 선생님을 볼때 느끼는 원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도 상당히 시골스럽고 유쾌해보이는 인상으로 꽃미남보다는 털털한 소크라테스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그는 술꾼이요 탐식하는 사람이었다는 표현이 복음서에도 보인다.    

4. 따라서  얼마전 리 스트로벨의 [예수는 역사다]를 너무도 감명깊게 읽었던 나는, 이 책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헛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책이리라 판단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이 책은 예수 수난의 디테일을 포착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목표는 전도에 있다. 리 스트로벨이 영화 상영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고자  쓴 책이다.

자세히 보면 이 책의 원래 제목은 [Experiencing the Passion of Jesus]로 '예수의 수난을 몸소 겪어본다'는 뜻으로 영화 제목과도 약간 다르다. 따라서 나처럼 영화의 구체적인 부분을 알고 싶은 사람이 보아야할 책은 같은 저자의 [예수는 역사다]이다. 특히 'part 3. 부활연구'는 저자와 최고의 신학자의 불꽃튀는 부활에 대한 탐구이다.

또 예수의 수난에 대한 실존적 또는 신앙적 탐구를 원하시는 분이 찾아야 할 책은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예수의 마지막 날]이다. 아주 작지만 좋은 책이다. 이 책에서 특히 감명깊었던 부분은 예수의 수난을 볼때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보다는 악역을 행하는 자들과 자신이 유사하지는 않은지 돌이켜보라는 당부였다.

5.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신약을 공부하면서 역시 기독교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걸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개구리를 잡아 못을 박아 널판지같은데 달아놓은 적이 있다. 가엾은 개구리는 한참을 꿈틀거리다가 말라죽었다. 그런데 개구리가 아닌 사람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을때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다니 끔찍한 처형이다. 나는 개구리를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예수를 생각하며 내 팔을 뒤로 젖혀 잠시 난간에 매달려보았다.

수많은 채찍질로 상처를 입지않았으나 나는 무척 괴로웠다.그러나 아시는지?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최악의 고통에 시달리며 2일 또는 3일을 꿈틀대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신약에 나오는 죄수의 정강이 뼈를 부러트리는 풍습은 죽음을 앞당겨 고통을 줄여주는 사려깊은 행위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십자가의 고통이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십자가는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하는 곳이며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장소로 더 이상 떨어질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곳인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던 한 인간이(신인지는 난 모르겠다) 모진 학대와 비웃음, 모멸을 당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추구를 버리지도 않았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오히려 가해자를 감싸주었다.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그 개구리라면 나를 용서하겠는가? 아니다. 나는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날카로운 가시관이 머리뼈까지 파고들며 타는 갈증과 호흡곤란으로 꿈틀거렸을 예수의 고통을 생각할 때, 그리고 어린 시절 개구리의 꿈틀거림을 기억할 때 나는 더더욱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진정 나는 저주와 절망을 벗어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십자가 형벌의 고통을 헤아릴 때에, 예수는 한없는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피울 수 있었던 너무도 선량한 사람이었음을 그래서 아마도 신이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였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순결하면서도 깨어있고, 그토록 자비로우면서도 강인한 영혼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6. 최근에 읽은 톰 라이트의 [예수]라는 책에 보면 예수가 "오른 뺨을 치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라는 말이 '바보처럼 맞고만 있으라'는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간디의 비폭력 사상을 열매맺은 이 말은 결코 그렇게 이해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관습을 알아야한다. 즉, 유대인들은 동등한 사람에게는 교육의 의미로 손바닥으로 때리고 혐오하는 사람에게는 경멸의 의미로 손등으로 때리는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오른 뺨을 손등으로 때리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리는 것은 때리는 이를 손바닥으로 칠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적극적인 저항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그와 동등한 인간임을,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성찰할 때, 예수의 원수에 대한 사랑은 저항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에게 로마병정과 유대인, 그리고 구경꾼들은 원수라고 할 수가 있으리라. 예수는 그들이 참된 길을 알지 못하기에 벌을 내릴 수는 없다고 감싸준다. 아마도 예수의 사랑은 저항에 있다기보다는 포용과 겸손, 연민과 지혜에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7. 이 책을 읽으며 리 스트로벨이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죄사함'과 '대속'의 논리로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물론 누가복음이나 바울의 글에서 예수의 죽음을 '죄사함'으로 볼수있는 여지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죄라는 것이 형법상의 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참됨을 알지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죄는 누군가가 대신 죽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죄 또는 어두움은 참된 말씀과 빛으로 일깨워야만 한다. 이와같이, 일방적인 희생에 의한 속죄가 아니라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게하는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는 데에 복음의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다시 살아난 후에도 제자의 대부분은 의심을 표했다. 또 관심을 끄는 것은 부활한 예수가 조금은 다른 존재였을 지언정 구름을 타고 벼락을 내리치며 지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한 일은 예전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며 식탁에 앉아 빵과 고기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야말로 오히려 감명이 깊은 부분이다. 부활 후의 예수조차 여전히 일상의 지평에서 사셨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승천을 했다고 하는데 저 위에는 대기권 너머 허공 밖에 없다는 걸 다 아는 세상이다. 예수의 승천이란 대기권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그래서 '뼈와 살'이 되는 승천이 아닐까?

 8. 여하튼 책의 맨마지막에 소녀에게 20달러짜리 수표를 주는 리 스트로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예를 들어 서점주인이 5달러의 100배 1000배를 요구하면 갚아줄 수 있을 것인가?  

리 스트로벨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예수의 죄사함은 한이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극한과 인간이 차마 떨어지고 싶지않은 모멸의 극한에서도 예수는 그들을 용서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수는 자비로웠다. 예수는 그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사랑했고 카르마를 남기지 않으셨다라고.

9.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내가 기독교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된 때가 언제인가? 아마도 [레미제라블]을 읽은 때도 그런 때일 것이다. 미리엘 주교가 범죄자를 집에 들이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은 장발장을 쫒아내고 인격적으로 모독했지만 미리엘은 그를 쫒아내지 않았으며 존대말을 사용했다. 미리엘은 장발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은 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아도 좋았소.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오. 이 문은 들어오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않고, 다만 그에게 고통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볼 뿐이오. 당신은 고통을 받고 있고, 굶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니 잘 오신 것이오.

그리고 내게 감사할 필요도 없소. ...여기는 내 집이라기보다 오히려 당신의 집이오. 여기 있는 것은 모두 당신의 것이오. 어찌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알 필요가 있겠소.그뿐 아니라 당신이 이름을 말해 주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이름을 하나 알고 있소.... 당신 이름은 '내 형제'라는 것이오."  

오랜 범죄자였던 장발장의 거듭남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미리엘은 판검사의 자리에서 고고한 성직자의 자리에서 장발장을 내려다본 것이 아니라 형제의 자리에 다만 있었다.장발장의 형제 미리엘이 장발장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다만 정직하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했다. 정직한 사람의 길은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예수는 우리 죄에 상응하는 벌금을 치룬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낮고 비참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서조차 변함없는 사랑의 길을 갔다.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 예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우리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사랑과 빛이 충만한 삶을 살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가 주는, 나같이 나약한, 저주와 절망으로 지친 인간에게 주는, 궁극의 위안이자 희망이리라.

10.  좁은 소견이지만, 예수의 사랑이 카르마가 없다고 한 것은 예수의 본뜻이 우리를 정해진 틀에 얽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진정 있어야 할 곳과 해야할 일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굳이 말한다면 빛이요 생명이리라.

장발장에서 보듯이 참된 사람의 길이 도대체 어디로 가겠는가? 그리고 참된 길을 찾는 것이 머리가 좋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굉장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풀잎은 빛을 향하고 뿌리는 땅을 향한다. 생명의 길이란 명확하고 당연한 길이리라고 생각된다.

노파심으로 말씀드린다면, 이런 언사는 나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길을 가고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간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그길을 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고 아름다운 길이리라는 것이다.

결국 리 스트로벨이 아무리 훌륭해도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예수이다. 너무도 대속의 논리에 사로잡힌 결과 리 스트로벨 당신은 소중한 무언가를 잊고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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