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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 - [초특가판]
허진호 감독, 한석규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2년 2월
평점 :
어린 시절 단체 관람한 영화 중에 [소나기]가 생각난다. 간결한 기타 소리가 인상적이었고, 빗소리가 좋았던 영화였다. 아마 그 영화 속의 소년과 소녀가 윤회를 거쳐 이번생에 태어난다면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소년과 소녀가 무엇에 이끌리듯 사랑에 빠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어 소년이 먼저 죽고 소녀가 살아남게 되는 영화를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 [소나기]의 후속작 같은 영화가 이 영화이다. 담담한 수채화같은 영화이다.
감독은 허진호 감독으로 이 영화를 찍을 때 35세여서 의외였다. 나는 그래도 마흔은 넘은 감독이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30대 초반에 인상적인 단편[고철을 위하여]를 찍으며 재능을 보이더니, 다음은 누군가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했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찍었다. [전태일]의 불꽃을 찍은 후 이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뜻깊게 느껴진다.
DVD에 나오는 감독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다. [전태일]을 찍고 후속 작품을 물색하던 차에 가수 김광석의 자살 사건을 목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독이 보기에 특이하게도 김광석의 영정사진은 껄껄 웃고 있었는데, "아하 죽어가는 사람도 꼭 슬프고 어두운 건 아니구나. 밝은 면이 있고 웃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가수 김광석을 추모하는 영화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전작때문인지 전태일이 떠오르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정원은 죽음으로 다가설수록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웃음과 사랑을 전하는 존재이다. 노동 운동의 꽃인 전태일의 인생은 격한 투쟁사라기 보다는 주위에 대한 연민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던가? 전태일의 불꽃이 잔잔한 미소로 타오른 영화가 이 영화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주인공 정원을 맡은 배우는 감독과 동년배인 한석규이고, 그의 안타까운 사랑인 다림은 심은하이다. 죽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한석규의 연기는 정말 좋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살던 정원은 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찍게 되면서 조금은 변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깨끗한 모습으로 제사상 위 사진으로 남고 싶어하는 할머니를 보며 정원은 자신이 갈 길을 찾게 된다.
'우린 잊고 살지만 죽음이란 누구나의 운명이다. 다만 누군가 먼저 그 길을 가게 되고 누군가는 더 슬프고 억울한 길을 가게 된다는 차이일 뿐...' 아마 이런 생각이 정원의 머리 속에 맴돌았으리라. 이제 그는 아직도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또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하나하나 비우기 시작한다. 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 싶었던 정원이, 어느 비오는 밤, 고통과 고독을 이기지 못해 이불 속에서 흐느끼는 장면은 그야말로 가슴을 후벼내는 명장면이다.
그럼에도 사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은 다림역의 심은하 때문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다림처럼 털털하면서도 청순한 매력을 뿜어내는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 선풍기 바람을 쏘일때 살랑거리는 옷맵시랄지, 정원과 같이 우산을 쓰고 걷지만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 결과 둘다 쫄딱 젖고마는 장면 등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이 많은 영화이다. 다림의 이런 풋풋함이 정원의 짙은 고뇌와 중첩될 때 영화는 한없이 빛난다.
한석규와 심은하 말고도 반가운 배우가 두 명 더 눈에 띠는데, 정원의 단짝친구 역으로 나오는 이한위와 여동생으로 나오는 오지혜가 그들이다. 이한위와 한석규의 담장 오줌씬은 우정이란 무얼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하는 명장면이다. 또 오지혜는 연극 [지하철 1호선] 등으로 유명한 배우인데 나에게는 한겨레 강좌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의 사회자로 더 기억이 남는다. 여하튼 오지혜는 이 영화에서도 나쁘지는 않아서 수박을 먹다말고 오빠를 보며 살짝 눈시울을 적시는 장면같은 것은 인연이란게 무엇인지 사람살이가 무엇인지 하는 감회에 젖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또 한명 더 기억해야만 할 사람이 있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이셨던 유영길 감독이 이 영화를 찍고 작고하고 말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영화 제작 화면에 나오는 유감독의 모습은 이 영화가 허구이되 사실이 되도록 혼신을 다했던 장인의 마지막 실루엣이다. 제작 장면이 더 찡한 것은 유감독의 아들이 밤늦게 수고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장면도 있다는 것인데 일에 미쳐 살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느끼는 허망함이 어땠을까 하는 그런 것이 자꾸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말 이 영화에는 좋은 장면이 많다. 그러니 영화를 보시면서 직접 가슴이 아려오고 훈훈해지고 하는 느낌을 가져보시기 바란다. 나는 수수께끼를 하나 내면서 리뷰를 마무리해야 겠다. 그럼 수수께끼가 무어냐.... 음, 감독은 왜 영화의 제목을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했을까요? 힌트를 하나 드린다면 이 영화에서 8월에 대한 이야기는 딱 한번 나온다. 다림이가 "아저씨는 사자자리죠? 나는 사자자리를 만나면 잘 산다던데.."하고 은근슬적 마음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사자자리에 해당하는 사람은 7월 23일 ~ 8월 22일에 태어난 사람이다.)
*** 배암발 : 이 영화의 촬영장소는 전북 군산으로, 주차장에 만들었다는 [초원 사진관]은 볼 수 없지만 그 밖의 풍경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다. 정원이 흐느끼며 다림을 멀리서 바라보며 유리창을 더듬던 것이 생각나는가? 레스토랑으로 돈까스가 맛있던 집으로 기억이 된다. 영화 속의 정원과 다림이 도와줬는지는 모르나 그렇게 만나서 여하튼 나는 결혼에 골인했다.
***배암발2 : 이 영화의 제목만큼이나 미스테리한 사실은 이 영화가 15세 관람가 영화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묘하게 상상을 자극하는 부분인데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문제가 되는 부분일까? 담벼락 오줌 장면? 경찰서 난동 장면?다림의 사진관 폭파 장면?) 영화의 상영가능 연령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기준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