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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10여년에 걸쳐 세번째 읽고 있는데도 딱히 멀쩡한 리뷰를 쓸 수 없다는 것이 좌절스럽다. 내가 가진 책은 1979년의 책을 개보한 1987년판인데 이런 것도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박정희가 죽은 그 시점에 이문열은 오늘의 작가상을 비롯한 문단의 상들을 휩쓸며 명성을 다졌고 다시 민주화가 무르익는 이 시기에 개보판을 내고있다. 사실 이문열이라는 작가와 동시대에 살면서도 감정적인 비판 외에 적절한 거리와 독자적인 경험을 통한 인문학적인 성찰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슬픔 속에서 조그만 몇 가지 틈새를 찾아내보려 한다.
우선 이문열의 책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은 3가지이다. [젊은 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이 소설들은 지금의 이문열을 만든 초기작들인데 [젊은 날의 초상]은 이문열이라는 개인의 자화상이라는 느낌이 강하고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의 사회의식과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의 심도를 보여주고 [황제를 위하여]는 이문열 문학의 전형을 완성한 모델 같은 느낌이다. 이후 이문열은 언론과 출판사조차 아부해야하는 거대한 문화권력이 되었고 반면 사회에 저항하고 관습을 비판하는 문인으로서의 생명력은 시들해졌다. 그 결과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들 초기 3작품을 능가하는 책이 나온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마치 오래되어 썩어가는 나무를 보듯이 최근의 그를 본다.
이문열의 작품에서 '사람의 아들'또는 '인자'라는 말이 나오는 책이 또 있다. [젊은 날의 초상]이다. 처음 이 책을 볼때 이 말이 주는 묘한 느낌이 좋았다. 과문해서 이 말에 대해 최근에야 얻어들게 되었는데 [도올 요한복음 강해] 171-174쪽에 그 설명이 나온다. 참고로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최종적 결론은 이것이다: 인자는 그냥 "사람의 자식"일 뿐이다. 예수의 자기 인식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의 자식으로서의 자기의식을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즉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고 소외받은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겸손한 표현일 뿐이다. Q자료에 속하는 다음의 용례를 보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여기서 인자는 결코 특칭이 아니다. 그것은 타이틀이 아니라 류의 개념(generic concept)일 뿐이다. 포유류인 여우도 굴이 있고, 조류인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인류의 자식인 나는 편하게 눕고 잘 수 있는 곳도 없다는 표현이다. 지상에서 그의 사역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나, 얼마나 헌신적이고 수고로운 것이었으며, 자기희생을 감내했어야만 하는 것이었나를 나타내주는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자식으로서 평범한 인간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들과 지상에서 운명을 같이함으로써만 가능했던 고난이었고 수난이었다..."
굳이 이 긴 인용을 적은 것은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이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을 기독교와 사회학, 신화학과 비교종교학적인 탐구를 통해 구체화시킨 작품으로 어느 정도의 지적 탐구를 병행해야만 분석할 수 있은 작품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적어도 엘리아데 등의 종교사가들의 견해에 입각했음을 이문열은 밝히고 있는데 마치 이문열이 이런 생각을 허구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이남호 평론가의 해설은 그런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줄거리 찾기에 급급한 무척 불성실한 글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사실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 학설로서 몇 년전 문제가 되었던 [예수는 신화다]같은 책의 과격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온건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나에게도 당장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이 책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인 교양이 70년대의 이문열에도 미치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지닌 모순의 역동을 느끼지 않고 어떻게 이 책을 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엘리아데 등의 종교사가가 밝힌 종교학적인 상식과 구약과 신약에 대한 간략한 상식조차도 없이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를 따라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알고보면 적어도 [사람의 아들]에서 이문열이 탐구한 책이라곤 몇 권 안된다고 보여진다. 별로 어렵지도 않고 그쪽 쟝르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책들인데 우리사회의 닫힌 구조 때문에 워낙 낯선 책이다보니 조금만 읽고 인용해도 완전히 새로운 별천지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이 책이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공부 좀 하라는 질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회다니던 사춘기 소년이 어느 순간에 교회의 비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을 발견하고 신앙을 회의하게 되는 그런 갈등에서 비롯된다. 사랑의 하나님은 왜 세상의 누추함과 비참함에 무관심한가? 사람의 아들 예수의 기독교는 왜 세상의 비리에 동참하고 있는가? 오히려 교회야말로 종교야 말로 구원이 아니라 거대한 사기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유치찬란하지만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절절한 질문에 대해 민요섭도 조동팔도 아하스 페르츠도 고민한다. 아마도 이문열의 개인적인 신학의 종착역일지도 모를 [쿠아란타리아서]에 이르기까지의 비교종교학적인 탐색은 계속된다. 이 책이 구성상의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와의 역동적인 긴장, 그리고 그 긴장 속에 내포된 질문의 치열함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이문열을 나는 좋아했었다. 그러면 이문열이 다다른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민요섭의 신학적 탐구의 종착역인 [쿠아란 타리아서]의 끝은 이러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너희는 지음 받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몸소 분별해야 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너희에게 선을 부어넣었고, 간섭하는 수고 대신에 지혜를 내렸다. 그 선과 지혜를 정의와 자유로 나란히 누리게 되는가 독선과 악으로 스스로의 멍에를 삼는가는 오직 너희 손에 달렸다.
그 날에는 부질없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찾지 말아라. 우리는 땅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일어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253-254쪽)
나는 [쿠아란타리아서]가 무척 의미있는 종착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신학적인 인간에서 인문학적인 인간으로의 독립 선언이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서의 신은 기독교적인 신이 아니라 인문학 적인 신으로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하는 신'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교회조직의 횡포에서 고통받는 인간이 종교학의 성과를 통해 다다른 하나의 결론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이어 바로, 민요섭이 조동팔에게 죽임을 당한다는데 이 책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민요섭은 갑자기 옛 하나님과 그 교회로 다시 돌아가고 마는데 조동팔의 입을 빌어 이렇게 그 심정을 밝히고 있다.
"쓸쓸하고 두렵다는 거였오. 웃지 않고 성내지 않는 우리의 신,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꾸짖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 우리의 신- 그에게 이제 지쳤다는 거요.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 판단에서 유리된 행위, 징벌 없는 악과 보상없는 선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거였오."(265쪽)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이때 민요섭이 돌아간 하나님과 십자가는 맹목적 신앙의 대상이었던 예전의 하나님과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쓸쓸하고 두렵다'는 것과 '공허하다'는 적나라한 심정의 토로가 지극히 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치열함과 진실성인 것인지 이문열 작가의 기성에의 회귀라는 보수성으로 인한 것인지는 참 알기 어렵다. 바라건대 이 장면에서 민요섭은 칸트가 이성의 끝에서 신을 요청하는 바로 그 지점을 지나고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반면 민요섭을 죽인 조동팔의 마지막 외침 역시 의미심장하다. 아! 삶에도 신앙에도 유일무일한 해답은 없는 것이리라. 적어도 실천에 있어서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은가?
" 그러나 나까지 패배해 쓰러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지금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민요섭의 피지, 우리의 신에 대한 절망은 아니오. 이 시각 이전에나 이 시각 이후에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은 우리의 신뿐이며, 설령 아무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고독한 신성은 언제나 당신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오..."
배암발 : 이문열의 비교 종교학적 탐구를 지켜보며 인문학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지적 편력과 이성적인 해결이 종착일 수는 없다. 인간의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깊이을 확보하지 않는한 정보 검색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이문열의 책을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은, 적어도 이 책에서의 안타까움은 넓이에 비해 깊이가 얕다는 것이다. 민요섭이 중간에 실종되고 아하스 페르츠도 구라만 남게 된다. 이것은 이문열 개인의 경험이 실종되고 책만 파서 그렇다는 느낌이 든다. 오!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너무도 초라하였더라. 이 책이 주는 안타까움이 그러하다. 이런 안타까움이 더 애착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