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정통
헤롤드 브라운 지음, 라은성 옮김 / 그리심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적인 복음주위자인 해롤드 브라운의 [Heresies(이단들)]을 번역한 책이다. 2,000년 교회사에서 이단의 발생, 성장, 쇠퇴, 그리고 그 신학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단들의 모습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동시에 이단들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정통을 제시한다. 이단들은 복수이지만 정통은 단수이다. 이단들은 여러 사상들을 혼합했지만 정통은 철저하게 성경중심이다.(이상 도서출판 그리심의 광고 내용)

***참고 :출판사 이름인 그리심은 모세가 율법을 낭독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한 사마리아에 있는 산 으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이루어진 야곱의 우물도 여기에 있다. ***

책 값이 3만원이 넘는 책인데 680면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좋은 종이에 컬러사진이 끼워져 있을까? 번역자이신 라은성 목사님은 이 책 내용을 중심으로 [정통과 이단](200쪽 분량) 상/하권을 출간했다. 가격은 다 합치면 2만원가량되는데 20시간분량의 강연내용 mp3 CD가 부록으로 들어있어 오디오북을 함께 구입한 셈이 된다. 오히려 책자체보다도 CD가 더 낫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만약 이 책들 내용을 대략적으로만 훑어보고 싶으신 분이라면 굳이 책을 살 필요는 없다. 라은성 교수님의 블로그에는 괜찮은 동영상과 책 내용의 요약이 떠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www.eunra.com을 기억하시길 바란다.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이런 책을 읽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유럽 역사나 지성사를 이해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역사를 알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테면 중세나 근대의 사상이나 철학이란 것이 신학 논쟁을 떠나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고, 인류 보편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궁금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예수의 신성 인성론이나 삼위일체론의 경우 아마도 연관짓는다면 불교에서의 선종과 교종의 논쟁, 조선의 사단칠정 논변 등과 유사한 관점, 유사한 구조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  현실적인 동기는 요즘 도올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의를 들어보면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고 핏대세우는 걸로 시간이 상당히 간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런 호기심이 생겨났다. 정말 도올선생님은 이단인가? 만약 누군가 이단이라면 어떤 속성이 어떤 판별점이 있어 그런 낙인을 찍는 것인가?

반면 정통이 있다면 그 정통이라는 것을 삶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들은 어떤 사고방식과 감정체계를 가진 것인가? 도대체 그들에게 세상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 결국 정통이든 이단이든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제정신인가? 그러한 선택으로 도대체 무얼 추구하는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 아래는 번역자 라은성 교수님의 최근 저서 [정통과 이단](상)의 리뷰이다. 알라딘에서는 판매되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다르지만 관련이 깊은 책의 지면을 택했다.

200쪽의 내용에 정통과 이단의 역사를, 즉 초기 교회로부터 중세까지의 교회사를 담으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힘든 일이다. 따라서 정통과 이단을 주제로 한 책의 선택은 두 가지일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시간 상으로 쭉 훑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는 이단을 결론 내리는 주체가 당대의 권력층이 된다는 것이다. 권력을 기반으로한 이단 판정은 정치를 타고 춤을 춘다. 예를 들어 왈도파의 학살이나 13일의 금요일 공포로 남아있는 템플기사단에 대한 이단 판정 및 학살은 당시에는 당연한 판정이었을지 모르나 명백한 오류에 속한다. 그렇다고 시대를 관통하는 기준이 되는 정통이란 것을 이런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고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라교수님의 이 책은 이런 걸 이루기가 힘들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이 책의 흠에 대해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리자면,  과연 라교수님이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의 주요 저서를 제대로 읽으시기는 하신 것인지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예전의 시내버스를 연상시키는 감이 있다. 논리 상으로도 개념 상으로도 매끄럽지 않다.)

이런 고충을 덜 수 있는 방법은 정통의 기준에 맞추어 대표적인 이단이나 이단 사상의 특질을 밝히는 것이리라.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의 본의를 밝히고 신학자들이나 교파의 신학을 검증해 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난점이 존재하는데 현재의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날카로운 칼을 휘두른다면 복음서의 저자들도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심하게 이야기해서 예수나 열두 제자보다 현대의 학자가 더 진리에 합당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꾸로 성서를 중심으로한 대표적인 기준들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정통으로 인정받은 해답이 더 나은 해답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더 성서적인가? 하는 식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성숙하는 신앙의 역사를 구축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라는 것도 결코 녹록치 않으리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는 완전한 존재일 테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많은 이단 처형이 권력층의 이해득실을 위해 봉사해왔고, 끔찍한 살육과 무고한 자들의 피해로 점철되었다는 것은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사족을 하나 단다면, 예수의 부활을 논증하는 경우 핵심적인 논거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후 많은 순교자가 신앙을 위해 죽었는데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 [정통과 이단]을 보면 이 논거는 설득력이 낮다는 걸 알 수 있다.

폭압적인 권세가가 존재하는 한 순교자는 무수히 배출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또한 진실여부와 관계없이도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해 왔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는 많은 이단들과 정통이 함께 고통받고 학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학살 즉 중세, 근대까지 이어진 이 살육의 드라마는 현대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세계대전이나 히틀러 등의 대학살로 나타난 것 같다.

이런 면을 볼때 잔인함과 살육의 광기는 인간의 속성이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지향한 기독교인들이 피로 물들인 역사를 볼 때 이 사실이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결국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가 매도하는 히틀러는 역사상 특수한 누구가 아니라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보편이 아닐까? '하는 인간성에 대한 비통한 고발  그 자체이다. 

이런 착잡함을 안은채, 지금부터 시끄럽지만 누구도 꼼꼼히 따져주지는 않는 문제를 대강 풀어보려한다.'도올 선생님은 이단자인가?'를 풀어 보려 한다. 이 책의 핵심인 이단성 판단의 기준에 따라 도올선생님의 이단성을 판정해 보려한다.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도올선생의 이단성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시도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불신자이다. 그러나 누군가 도올 선생님을 이단자라고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주장을 할 것인가를 구성해 보려 하는 것이다.

참고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단, 이단자, 이단성과 같은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맞지 않는 성격을 지닌것을 '이단성이 있다'라고 말하고, 이런 이단성을 지닌 사람이 파당을 지을 때 '이단'이라고 한다. 끝으로 이런 이단에 속하는 개인을 '이단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치도 않고 또 그런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그것대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단어를 아는 것과 사랑을 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러면 참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 것인가? 이런 걸 생각해보면 '원칙적으로는 예수님 외에는 누구나 이단성이 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이단성이 있으나 기독교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기독교인의 현실이다.

결국 종교회의나 총회에서 결정한다고 하는 이단 판정이라는 것은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소수 종파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배척의 의미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단 판정은 그러한 판정을 내리는 자들에 대한 또는 기준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신앙의 격전지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중요한 기준인 삼위일체가 과연 예수적인가? 성찬식이 기독교의 핵심인가? 성모나 성상에 대한 숭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등 정통 이단 논쟁의 범위는 외형에서 사상까지 도대체 안닿는 곳이 없다. 

따라서 나는 복잡한 이단 판정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순히 라은성 목사님의 이단 판정 기준을 지금 이 시점 한국 교회의 주된 기준으로 상정하고(...실제로 그런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Who Knows?) 내가 들은 만큼의 도올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그 기준에 맞춰 판정을 내려보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글은 당연히 무척 불성실한 것이다. 그러나 선의와 지적 호기심에서 우러난 것이니 좋게 봐주셨으면 한다. 여기서 다시 사족을 단다면 라목사님의 기준에 의하면 천주교나 순복음교회 등 많은 교파가 다 이단이다. 설혹 도올 선생님이 이단 판정을 받을지라도 이런 걸 미리 아시고 편하게 봐주시길 바란다.    

(1) 신이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신 그분, 즉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신 그 분을 진실한 신자들은 믿고 신앙합니다. "(21쪽)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도올 선생님은 강의 중에 예수는 인간 100%, 하나님 100%인 존재이다 라고 밝힌 적이 있다. 따라서 이 기준에서는 이단성이 없다.

(2) 삼위 일체론에서 '위'는 특성을 의미하고 '체'는 동일 본질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특성을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을 의미한다."(82쪽).... (1)번의 기준이 더 강화된 것으로 라은성 교수님의 책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올선생님의 의견은 어떠한가? ""성부.성자.성신"이라는 말은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톨릭교회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론적인 교리개념일 뿐이다.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다.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자기이해 속에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107쪽).....

예수의 아버지는 자애로운 존재며,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편협하지 않게 파악하는 존재며, 아들에게 무한정의 사랑을 퍼붓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신적 존재"라기 보다는 '자비의 품"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느낌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은 내가 아버지보다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고(요 14:28) 또 아버지와 동격의 존재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자신감을(요 10:30)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표현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기독교 성서의 이해 111쪽) 

삼위일체설을 개똥으로 여긴다는 면에서 도올 선생님은 이단이 된다. 그렇지만 삼위일체설의 핵심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라면 도올 선생님은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기도 거시기하므로 라은성 교수님이 지적한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한 이단의 모습을 부기한다.

 가. 양태론 :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가지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 성부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그것을 실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그것을 적용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또 다른 양태론은 어느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계셨고 다른 시대에서는 성자 하나님이 계셨고, 그리고 지금 현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설명한다.

(도올 선생님은 양태론자가 아니다.)

나.단성론 : 예수를 인성과 신성의 한 속성을 중심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단성론인 양자론은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인간이셨는데 하나님이 되었다고 강조했고 그분을 도덕적으로 닮고 싶어 했습니다.그러다보면, 그분처럼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그분처럼 영력을 받게 되고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죄를 짓지 않는 '하늘 육체'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93쪽)   

"하늘 육체를 갖고 싶어 하고 보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수도사들 가운데 단성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삶에만 치중하고 육적인 일, 즉 세상적 일에는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가정은 팽개치고 교회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신앙은 좋을지라도 단성론적인 모습입니다.

반면, 인성을 강조하고 신성을 약화시키면 세상을 좋아하고 교회에는 출석만 하거나,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고 영적인 일은 등한히 합니다. 이것도 단성론입니다.

인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을 덜 강조하면 자유주의 신학자가 되고, 신성을 강조하면서 인성을 덜 강조하면 신비주의가 됩니다."(94쪽)

(도올 선생님은 단성론자가 아니다.)

다. 성령 중시 파 : "성령을 강하게 강조하다보니 나에게만 직통계시가 있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성경도 강조하지만 성경보다 더 우위에 나에게 임한 성령을 강조합니다....모두 개인 중심입니다. 성령을 강조하다보니 은사 쪽으로 가게 됩니다."(189쪽)

(도올 선생님은 은사 중심의 성령 중시파가 아니다.)

(3)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온다 :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조건이 아니라 무조건적입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정한 사람입니다."(119쪽)

도올 선생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영지주의나 펠라기우스 주의와 닮아있다. 원죄를 부인하며 실존적 체험을 중시한다. 구원이란 "나라는 인간 실존에 내재하는 신적인 존재성의 자각"([요한복음 강해]147쪽)이 된다. 그러나 구원의 통로는 로고스이신 예수라고 이야기 한다. (같은 책, 147쪽) 따라서 애매하지만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추구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이단성이 있다.

가. 영지주의 : 정통신앙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 하지만 영지주의에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지혜 곧 영지를 통해 신과 만나고 구원을 받는다.

 "창조된 사람은 마음 속에 영적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씨앗은 영지를 통해 성장합니다.그런데 육체가 그 씨앗을 영지에 의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육체적 금욕을 강요합니다. 육체를 제어해야만 영지를 통해 씨앗이 성장하여 충만, 즉 플레로마로 들어가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영지주의는 가르칩니다."(40쪽) 

나. 펠라기우스 주의 :"펠라기우스는 원죄란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한 잘못을 우리가 전가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는 구원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선택이고 해택이라고 여겼습니다. 펠라기우스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111쪽)"그가 주장했던 것은 인간이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원죄를 짓지 않았기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112쪽)

다. 신비 주의 : "신비주의자들은 성경보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보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교통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신비주의가 교회를 삼키게 되면 교회는 지상에서 사라질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신비주의는 교회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1쪽)

(4)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느냐 예수 밖에 구원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다만 최근에 읽은 김경제 교수님의 [이름없는 하느님]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다."일반적으로 '유일신 신앙'이란 신이 한 분밖에 없다는 신의 숫자 개념과 관련된 종교적 신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그 '하나'라는 개념이 둘이나 셋이 아니고 수량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때, 유일신이라는 개념은 매우 옹졸해진 숫자 개념에 얽매인 '하나의 유한한 신적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위의 책, 17쪽) 

이런 논란의 끝에 '오직 예수만이''오직 주님만이'논쟁이 있다. 그러나 그 논쟁을 접어두고 보면 결국 우리가 만나는 예수라는 것이 일단은 4복음서이고 더 나아가 신약성서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와 예수와의 만남의 접점인 신약성서 읽기라는 것은 기독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결국 기독교의 역사는 성서읽기의 변화상으로 다시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책에 의하면 기독교의 역사는 소수의 성직자들이 말씀을 사유화하고 권세와 폭압을 부려오다가 성서의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민주화된 역사이다. 중세까지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보지못했으므로 성상, 십자가, 성례 등과 성직자를 통해서만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교황을 중심으로한 권력은 구원을 빌미삼아 위협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성서의 인쇄로 만인이 성서 속의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 종교 개혁을 몰고왔다. 성직자의 위치가 변화된 것이다. 군림하는 자에서 도움을 주는 자로, 지도자에서 동반자로 변화한 것이다.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서를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허구적인 종교 권력이 해체되는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올 선생님의 요한 복음 강해 작업과 라은성 선생님의 교회사를 통한 성서해석사 강의 작업은 만난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한국의 기독교가 성서 읽기라는 과정 자체을 성찰하고 불순한 권위를 해체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층 성숙해가고 있는 셈이다.  신앙의 기준인 성서의 판본학적인 문제랄지 번역 상의 난점, 그리고 해석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성서의 대중적 유포가 가져온 변화에 이어서 더 심화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라교수님도 생각이 같을 것이라 본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매개체로 해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지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만큼 교회 예배에 출석하고 교회당을 위해 헌금했으면 은혜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불가시적인형상'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는지 염려가 됩니다."([정통과 이단],129쪽)

"우리 신앙의 근본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성경해석은 제각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의 자취를 더듬는 것은 정말 의의가 깊다고 여겨집니다."( 같은 책의 맨 앞쪽)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라교수님의 교회사 작업보다 더 한층 근원적인 문제의식 속에 위치하는 작업이 도올 선생님의 요한복음 강의라고 생각된다. 성서의 새로운 번역과 해석이란 해석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에 더  다가서는, 폭풍의 눈이라 아니할 수 없다.ad fontes! ad fontes! (근원으로! 근원으로!)

도올선생님은 이단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같이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정통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어불성설로 여기고 원죄설을 부정하는 면에서는 이단성이 있다. 이런 이단성은 이단성이 강한 영지주의 또는 펠라기우스 주의에서 비롯했으리라 생각된다. 

도올 선생님의 신앙은 예수 또는 하나님과의 실존적 관계를 중시한다. 또한 신앙은 이성 또는 학문적 탐구와 병립할 수 있다는 소신이 있다. 여하튼 도올 선생님의 이단 논쟁은 '기독교적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계신다면 누가 옳다고 하실까?'하는 갈증과도 같은 호기심을 일으킨다. 아! 언제나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은 책으로 닿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참으로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