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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평점 :
최근에 읽은 경제학 책 중에 가장 명쾌한 책이다. 이 책을 산지 1년이 다 되어서야 읽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음 두 가지이다.
1) 책이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신문에 나왔던 경제 논평을 모은 것인데 사진이나 그림도 없이 글만으로 이루어진 밍숭한 편집이라 읽고 싶은 의욕이 별로 없었다. 2) ‘개혁의 덫’이라는 제목은 노무현 정부의 경제 개혁을 비판하는 의도를 내포한 이름이다. 따라서 힘든 개혁에 물타기 같은 느낌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내용이 쉽고 명쾌하여 부담 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일반 독자를 의도한 간명한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무현 정부의 개혁에 우려를 금치 못하는 요즘의 나의 태도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의 다른 책인 [사다리 걷어차기]나 [국가의 역할]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나 소용되는 책이리라 생각되지만 이 책은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에는 [사다리 걷어차기] [국가의 역할]의 핵심이 어느 정도 요약되어 있기도 하다. 다음은 이 책을 중요한 몇가지의 질문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려고 노력한 흔적이다.
책의 내용은 다음 내용이 거의 70% 정도 되는데 계속 반복된다. 아마 여러 매체에 기고한 탓에 당시의 현안에 따라 핵심은 같되 조금씩 모양만 바꿔 답변한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다음만 꼼꼼히 읽어도 핵심은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뒤로 갈수록 늘어져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1. 저자 장하준은 좌파냐 우파냐?(247쪽)
저자 장하준은 2003년 4월 소버린의 SK 주식 매집 사태를 계기로 자본의 국적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해서 과연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재벌을 옹호한다는 면에서는 우파, 자본의 국적성을 따진다는 면에서는 반시장적인 좌파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롭게도 저자는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은 한 가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과 노무현 정부의 신 자유주의적 개혁론자를 좌와 우로 나누고 있다.
1) 자본가편(우파) 노동자편(좌파)...저자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타협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중도파이다. 반면 기업에 대한 주주의 권리를 강조하는 개혁론자는 자본가 편이므로 우파이다.(이 부분은 이하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2)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우파) 찬성(좌파)... 저자는 정부 개입에 찬성하는 좌파이고, 개혁론자들은 개방과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우파이다. (여기서 시장에서의 평등과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은 다른 것이라는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250쪽)
3) 경제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데 급진적이냐(좌파) 점진적이냐(우파)... 저자는 재벌 등 기존의 질서의 유용성을 믿는다는 면에서 우파이고, 개혁론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좌파이다.
저자는 이런 말을 곁들여 놓았다.“나의 입장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입장들이 간단히 좌.우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이념 논쟁은 ‘딱지 붙이기’로 끝나고, 그 결과는 소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사다리 걷어차기 :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선진국들도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발전했다.
기만적인 자유 무역에 대한 선전에 속지 말라!
(*** 참고 : ‘유치산업 보호론’이란 후진국 정부는 관세, 보조금, 쿼터 등을 통해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론
*** 참고 ; ‘사다리 걷어차기’란 독일의 경제학자 리스트가 말한 것으로 ‘영국이 후진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권하며 다니는 것은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놓고는 정작 뒷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과 같다고 혹독하게 비판)
1) 자유 무역을 통한 발전이란 선진국의 이데올로기일 뿐
선진국들은 자유 무역덕분에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발전하고 나중에 자기 물건 팔아먹기 위해 자유 무역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시장이라는 게 선진국들의 이데올로기다.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나라는 발전을 못하고, 미국이나 독일처럼 무조건적인 자유 무역을 강력히 거부한 나라는 성공했다.”
2) 영국의 유치산업 보호
가. 14, 15세기에는 당시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모직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보호 관세를 매기고, 외국에서 기술자를 정부 돈 주고 초빙하였다.
나. 17, 18세기에는 최초의 수상 월 폴이 수출 원료 관세 환급 정책을 시행했다.
3) 미국의 유치산업 보호
가. 초대 재무장관인 해밀턴이 유치산업 보호론을 학문적으로 정형화했다. 그의 이론은 미국이 세계 최고의 제조업 국가로서 지위를 완전히 굳힌 1945년까지 130여 년간 미국 경제 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다.
나. 링컨은 가장 열렬한 유치산업 보호론자로 남북전쟁은 노예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라기 보다는 관세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다.
다. 19세기에 유명한 경제학자는 거의 다 보호무역주의자이고, 제도 경제학자였다. 그러나 현재 주류 경제학계에서 이들의 역사는 언급도 되지 않는다.
라. 미국은 35 - 55 %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제조업 관세를 유지하면서 자국 산업을 발전시켰다.
마. 20세기 중반까지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규제했다. 예를 들어 해운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아예 금지되어 있었으며 은행의 경우에는 외국인의 경우 이사가 될 수 없었다.
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산업이 세계 최고의 위치에 이르자 자유 무역과 외국인 투자 자유화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3. 재벌은 유용한 존재이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아직 필요하다.
1) 1997년 IMF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자유 방임 정책)
가. 초기에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정부개입과 기형적인 재벌 체제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제도적 결함이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나. 그러나 1997년의 외환 위기는 지나친 정부개입 때문이 아니라 금융 규제의 미비 등 지나친 자유방임 정책 때문에 발생했다.
다. 우리 경제 제도가 ‘기형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지난 40여 년간 세계가 놀랄 정도의 고도성장과 비교적 균등한 소득 분배를 낳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라. 세계은행 스티글리츠 부총재도 지적한 바 있듯이, IMF의 지나친 고이자율 정책은 가뜩이나 단기 부채 비율에 시달리는 우리 기업들의 단기적인 유동성 위기를 불필요하게 증폭시켜 결과적으로 건전한 기업까지 도산케 하고 비정상적인 실업을 발생케 만듬으로써 우리 경제를 멍들게 했다.
2) 국적 없는 자본이 존재하는가?(외국인보다는 국내 재벌이 낫다.)
가. 최근 외국계 크레스트 증권이 단기간의 전격적인 주식 매입을 통해 SK 그룹의 사실상 지주 회사인 주식회사 SK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외국인에 의해 간단히 인수 합병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나.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 합병이 합법화되었고 대기업 집단에 대해 순자산의 일정 비율을 초과해 계열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출자 총액제한 제도로 말미암아 많은 수의 재벌 기업들이 계열 기업에 대해 갖고 있는 지분만큼의 의결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재벌들이 외국계 자본에 의해 인수 합병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다. 세계화된 세상에서 자본의 국적을 운운하는 것은 낡은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초국적 기업들의 경우에도 장기 전략 수립이나 연구 개발 등 핵심 기능은 거의 전부가 본국에서 행해지고, 최고 경영진도 대부분 본국인이다.
라. 선진국에 기반을 둔 투자 기금들의 경우 이들의 주 고객층이 고령화되고 안정화된 선진국 국민인지라 후발국 기업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배당을 높이는 방식의 경영을 선호한다. 따라서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투자는 생각할 수 없다.
3) 한국 기업이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가. 한국 기업이 주식시장을 회피하고 부채 비율이 높다는 비판에 대한 반론
국제적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 기업들의 주식시장 의존도는 별로 낮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높은 것은 워낙 투자율이 높은 관계로 선진국의 기업들처럼 내부 유보에만 의존하여 투자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부채비율은 일본, 프랑스와 비슷하고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구권에 비해서는 낮은 편으로 터무니없이 높지도 않다.
나. 한국 기업이 효율성이 낮고, 그에 따라 이윤율이 낮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우선 이윤율이라는 것이 해당 기업의 효율성이나 사회적 공헌도를 완전히 반영하는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한국 기업의 이윤율이 낮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교대상으로 흔히 제시되는 미국 등의 기업에 비해 부채 비율이 높아 금융 비용이 많기 때문이지, 기업 자체의 효율성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 한국 재벌이 지나치게 비관련 다각화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대부분 재벌의 경우 2- 4개의 주력 기업이 매출의 70- 80 %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다각화 정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비관련 다각화는 위험 분산의 차원에서도 필요한 전략이다.
4) 영미식 자본주의는 진정 우월할까?
가. 영미계 국가의 경제 성과가 지난 7-8년 간 비교적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1989년 - 1998년 사이의 미국의 1인당 경제 성장률은 불과 1.6%로 일본이나 독일과 비슷했다.
게다가 영국은 국민소득 기준으로 유럽연합 15개국 중 11위로 떨어져 있다. 결국 영미게 국가들의 경제 성적이 좋아 보이는 것은 일본과 독일 등 주요 경쟁극들의 상대적인 침체와 언론의 과대 포장 때문이다.
나. 영미계 국가들이 1990년대에 거둔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이 과연 그들의 ‘체제적 장점’에 기인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현재 영미식 자본주의의 장점으로 꼽히고 있는 발달된 주식시장, 자유방임적 정부, 이윤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방식과 같은 것들은 1980년대에만 해도 영미계 국가들의 상대적 쇠락을 가져온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었던 사항들이다.
다. 1990년대 일본이나 독일 등 비영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침체를 겪은 것이 이들의 제도적 결함에 기인한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의 1990년대 장기 침체는 거시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고 독일의 침체는 통일비용 지출 이후 긴축적 거시정책 때문이다.
5) 영미식 자본주의인 주주 자본주의는 득보다 실이 많다.
가. 현재 재벌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주주 자본주의이다.
주주 자본주의는 기업은 주주의 소유물이므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주주란 직접 금융의 조달자로서 경영진 노동자 채권자 하청업체 지역사회 등 여러 이해당사자 집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 주주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식시장이 정확히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지난 300여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역사는 주식 시장이 기업 가치의 판단에 있어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 주식 시장의 속성상 단기주의의 만연은 불가피한데, 이는 결국 설비와 기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를 통한 경영을 어렵게 한다. 즉, 주주 자본주의의 추구는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 좋지 않다. 대부분의 주주들이 기업의 장기적 성공에 따른 이익보다는 단기적 배당이나 주가 차액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주 이익의 추구가 과연 국민 경제 전체에 득이 되는냐는 점이다.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된 1980년대 이후 영미계 국가에서 대량 해고, 고용의 불안정화, 소득 분배의 악화 등이 급증한 것은 주주의 이익과 다른 사회 성원들의 이익이 불일치할 수 있다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마. 주주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데 영국이나 미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소득 분배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 면에서도 열등생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6) 우리에겐 재벌이 필요하다. 재벌과의 공존은 어떠해야 하는가?
가. 재벌 체제의 장점
가) 경영권의 중앙 집중, 대규모 자금 동원력, 위험 분산 능력 등을 통해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 비교적 쉽게 새로운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다.
나) 계열기업 간의 상호 보조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없더라도 장기적으로 전망 있는 산업을 키울 수 있다.
다) 총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대규모 투자를 과감, 신속하게 할수 있다.
나. 재벌 체제의 단점
가) 장기적으로 채산성이 없는 기업을 계열사 간 보조를 통해 지탱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부실을 장기화하는 것은 물론 자칫 계열사 전체의 연쇄 부실까지 가져올 수 있다.
나) 총수의 독단에 다른 투자가 실패할 경우 피해가 매우 크다.
다. 국민들과 재벌 간의 빅딜
가) 재벌 기업은 총수 가족의 것도 아니고 주주들만의 것도 아니다. 국민 전체의 것이다.
나) 총수의 이익과 주주의 이익 뿐만 아니라 주주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합치할 수 있게 조정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다) 재벌들은 역사적으로 국민들에 대해 자신들이 진 빚을 인정하고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국민들은 이러한 전제 아래 재벌들이 안정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도와주는 정치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라) 재벌들의 안정 지분 확보를 위해서는 출자 총액제한을 완화하고 지주회사 설립 요건을 완화해 주는 동시에, 재벌들 사이의 상호 출자를 시도하고, 국민연기금의 사용으로 ‘국민 지분’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