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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 + OST 특별 패키지 - Limited Edition
스톰프뮤직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강아지 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화이다. 나는 이 동화가 작가의 원숙한 시기에 발표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69년 서른 셋의 늦깎기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선생님의 삶은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었다.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청송이란 아직도 오지 중에 오지인데 그때는 오죽 했을 것인가?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가, 열 여덟 살에 경북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 들어와서 그 후로 쭉 살았다. 선생님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시냇가에 지은 다섯 평짜리 흙집이다.
권정생 선생님 사진을 보면, 매우 유명한 작가라는 선입견을 비웃는 뜻 밖의 모습이다. 올해로 일흔의 나이시니까 노인이시기는 하다. 그래도 선생님이 고무신을 신은 모습은 그냥 시골 할아버지이다. 솔직한 표현을 하면,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넝마중이 아저씨나 청소부 아저씨들의 모습 그대로시다. 이런 걸 생각해볼 때 [강아지 똥]에 나오는 ‘똥’은 일생동안 저 낮은 곳에서 질병에 신음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되물어야 했던 선생님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선생님이 드물게 긴 이야기를 하셨다는 인터뷰가 있어 소개한다. 이현주 목사님의 드림교회에 방문하셨던 모양이다. 이것은 뜻밖의 일로, 내가 알기로는 선생님은 사람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또 집밖을 나서기도 싫어하신다. 말 몇 마디 하시는 것도 버거워 하신다. 태생이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결핵 때문에도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그런 분이다. 오죽했으면 찾아온 도법스님이 말이 많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으시겠는가? (이 부분은 제 추측입니다.)
선생님이 그날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느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죠.”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었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동화 [강아지똥]은 월간 기독교 교육 제 1회 아동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동화가 꼭 기독교에 한정되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강아지똥이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은 오히려 동양적인 생명관이 물씬 나는 장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원작을 보고 기독교적인 느낌을 받기는 조금 어렵다. 적어도 내 판단에는, 원작의 하느님은 천지의 하느님이지 조물주인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보인다.
[강아지똥]과 비견될 수 있는 동화가 있다면 [미운 오리 새끼]일 것이다. 그러나 미운 오리가 백조였음을 알고 비상하는 장면이 꼭 상쾌한 것만은 아니다. 백조와 오리가 계급적으로 나뉘어지는 세계를 내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백조가 아니라 더 흉한 어떤 존재였다면 미운 오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인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 찾기 과정이 다른 존재 위에 서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에 비해 강아지똥이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은 훨씬 고통스럽지만 평화롭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외부 세계로의 비상, 즉 출세라기 보다는 변화로 이어지는 내부적 성장, 즉 깨달음에 가깝다.
애니메이션 [강아지 똥]은 국내 최초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많은 정성이 깃들여진 작품이다. 다른 어느 나라의 애니메이션이 이런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나처럼, 농촌에서 성장하고 소똥이 떨어진 길을 달구지를 타고 지나본 기억이 있었던 세대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세계를 감동 깊게 보여준다. 어색한 듯한 모양새와 움직임, 투박한 질감이 더 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야말로 걸작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인 ‘하느님은 쓸모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에 대해서는 만인의 작품을 기독교적 작품으로 한정짓고 말았다는 한탄이 절로 일어난다. 우선 하느님을 주어로 앞세우면서 기독교적인 색깔을 깊이 새겨놓았다. 현재의 언어적 습관으로는 하느님이 기독교적으로 들리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라는 것과 ‘하느님은... 만드셨어’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야말로 좋은 동화에 개칠을 한 셈이라고 느껴진다.
강아지 똥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똥도 아니고 강아지 똥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하층민의 신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설혹 계급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더라도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이고,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처절한 고독감을 느껴보았던 사람이라면 강아지 똥의 절규는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으리라. 그렇다. 강아지 똥의 이야기는 처절한 자신의 혐오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혐오에서 비롯한 강아지 똥의 일생은 자기 존재 발견이라는 깨달음으로의 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선지식을 찾아나선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강아지 똥이 만난 최초의 선지식, 흙덩어리의 선량함과 쓸모에 대한 고민은 구시대적인 고민인 것 같다. 과연 착하게 살면 다 좋은 주인을 만나 구제될까? 나는 착하기만 한 누나와 이모들이 못된 남편 만나 신세 조지는 것을 종종 보았다. 따라서 구시대 농사꾼들이 물건 아끼는 것에 대한 향수로만 보여 진다. 그런데 어쨌거나 흙덩어리의 쓸모에 대한 생각은 마음을 울리는데, 많은 실직자나 취업 희망자들을 생각해볼 때 좋은 땅에 옮기면 엄청난 생산력을 보여줄 인재들조차 사회적으로 버림받았을 때는 무용한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강아지 똥이 만난 두 번째 선지식, 감나무 잎은 너무도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는 신세에 대해 말해준다. 나는 감나무 잎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바퀴아래 으스러지는 장면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인생의 무상, 존재의 무상 그 사이에 바람을 타고 추는 너울너울한 춤 ....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것이다. 적어도 싯달타나 장자는 그런게 인생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그런 존재조차 아쉬움과 무상의 슬픔은 있을 것이다. ‘과연 이 허망한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절절한 질문을 감나무 잎은 던지며 사라진다.
강아지 똥이 만난 마지막 선지식은 민들레이다. “나에게 거름이 되어줘.”라고 부탁하는 민들레.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런 부드러운 말조차 위험하다고 생각이 든다. ‘여러분의 피와 땀이 조국의 근대화의 거름입니다. 여러분은 조국 근대화의 역군인 것입니다.’이런 감언이설도 있었지 않았는가? 그러면 민들레와 강아지 똥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민들레가 꽃을 피우는 것과 강아지 똥이 녹아 없어지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예를 들어 우리가 소고기를 먹어 피가 흐르는 것과 소가 우리를 잡아먹고 피가 흐르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왜 민들레는 감히 강아지 똥에게 희생을 강요하는가?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강아지 똥과 민들레가 조물주가 만든 별도의 존재라면 이런 논리적 모순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애니메이션을 이렇게 만들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내밀한 성숙의 이야기, 서로간의 관계와 사랑의 이야기를 포착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와 강아지 똥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친구들이 우정을 쌓듯이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합해져서 새로운 존재가 되듯이 그렇게 만나는 존재인 것이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를 만나 이루어지는 일은 ‘희생과 헌신’이 아니다. 이루어지는 것은,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낡은 관계에 대한 생각이 깨짐으로써 자연히 찾아오게 되는 ‘사랑의 몸짓’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참으로 탁월한 부분을 찾는다면 민들레가 강아지똥과 포옹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차디찬 눈에 덮혀 존재의 아픔을 경험했던 강아지똥에게 그 포옹의 따뜻함이야말로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었으리라. 더러운 강아지똥에게 몸을 의탁한 민들레도, 민들레를 위해 자신의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아지똥도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포옹 속에서 변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과거에서 벗어난 또다른 여행, 우주적 신비를 향한 것이었다.
민들레 씨앗이 날리며 이루마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엔딩에서 나는 울었다. 저 움직임을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내가 원작에서 느꼈던 내밀한 울림을 산산히 조각낸 채 비행하는 저 씨앗을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만들지 않으셨어."라고 나래이션이 나올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마침내 느끼는 것은 꽃이 피고 씨앗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감나무 잎도 민들레 씨앗도 바람에 날리운다. 그런데, 감나무 잎은 무상의 몸짓으로 날릴 뿐이지만, 민들레 씨앗은 사랑의 추억을 품고 미래의 희망을 그리며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러니, 민들레는- 아니 모든 생명은 사랑의 춤으로 태어난 존재들인 것이다.
다시 한번 권정생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 배암발 : 강아지 똥 홈페이지(www.doggypoo.co.kr)도 방문할 만 하고, 권정생이라고 자료검색하다보면 인터뷰 내용과 음악, 그리고 [강아지 똥] 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싸이트가 있으니까 한두 번 보실려면 굳이 안사셔도 될거 같네요. ****